강정구 교수(姜禎求, 1945년 3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후학을 양성하면서 통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18일(79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시절
2001년 8월 17일 8·15 축전 때 만경대에 들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써 친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방명록으로 말미암아 그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저촉돼 구속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만경대의 사립문

강 교수는 만경대혁명학원을 떠올리고 만경대정신을 방명록에 썼지만, 나는 아마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는 만경대의 사립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하직하고 고향을 떠날 때에는 모두들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오겠다면서 씩씩하게 사립문을 나섰”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면서, “나는 그때부터 남의 집 사립문에 들어설 적마다 이 사립문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몇이며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이 나라의 모든 사립문들에는 눈물에 젖은 이별의 사연이 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혈육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한 아버지 어머니,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한 동생 철주, 그리고 옥사한 작은삼촌 김형권, 13년 8개월의 오랜 감옥생활 끝에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난 외삼촌 강진석 등을 그리면서 김일성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독립을 찾기 위해 나선 모든 가정의 사립문에 서린 아픔을 그렸던 것이다.

필자가 만경대의 사립문을 보며 살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목메인 그리움과 뼈를 에는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면 필자도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없이 김일성 일가의 ‘날조된’ 항일투쟁을 찬양한 몸이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대한민국사 1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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