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만, 어쩌면 100만 명이 ‘빨갱이’라는,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심지어 그런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모든 학살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학살은 괜찮고 어떤 학살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살은 다 나쁜 것이다. 설혹 빨갱이라 할지라도 그가 민간인이라면 국가권력이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한국전쟁 전후의 빨갱이사냥처럼 그런 식으로 마구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그늘 아래 빨갱이 자식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유가족들의 이야기야 어찌 무딘 필치로 제한된 지면에 담을 수 있으랴. 이 땅에 살기 위해 부모를 처형한 우익반공단체의 열성 간부가 된 아들의 심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한국 현대사에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청산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상호 관련되어 있다 함은 친일세력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나 지원자로 등장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서 최대규모의 학살인 보도연맹원 집단처형, 크고 작은 집단학살을 숱하게 낳은 ‘공비토벌’ 전술, 그리고 학살의 주체로 등장한 군과 경찰, 청년단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묻어난다.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 일상화 되어 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있음에도 이 나쁜 버릇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수구세력들의 위기감이 진전되면서 이 나쁜 버릇이 오히려 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동학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에 이르게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이다.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이 고려와 조선 천년을 통해 아홉 사람의 문장가를 꼽았을 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황현은 시골 선비라 차별을 받아 과거에 떨어지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부모의 원을 풀었으나 도무지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미친 도깨비가 되라 하느냐며 황현은 초야에 남았다.

"그대 홀로 누운 것 서러워 마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고향에 돌아온 황현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대시인인 황현은 절명시(絶命詩)를 짓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秋燈俺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몇 해 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아이에게 글 아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축원해 주었던 그 황현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들. 모두 판서의 자제로 한 분은 양자로 가서 영의정의 아들이요, 한 분은 고종의 측근이요, 다른 한 분은 영의정 김홍집의 사위였다.

그 6형제가 지금으로 치면 재벌 부럽지 않을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속좁은 우리 사회는 통일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남쪽의 ‘관제 주사파’에 대해 수구세력은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가 함께 통일을 이루려 하는 이북에는 철두철미한 주사파가 2천만 명이나 있다.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북은 남을 고무·찬양해야 하고 남은 북을 고무·찬양해야 한다. 북은 남이 거둔 물질적 성과를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로 찬양해야 한다. 남은 또 북이 큰 나라들에 대해 큰소리쳐온 역사를 연개소문 죽고 처음이라고 부추겨주어야 한다.

요즈음도 연좌제란 말을 많이 쓰는데 한자로는 緣坐制와 連坐制 두 가지가 혼용되다가 요즈음은 連坐制로 굳어져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緣坐라 함은 혈연관계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친족들이 처벌받는 것이고, 連坐는 스승과 제자, 친구 등 비혈연적 관계에 의해, 또는 다른 관리의 문제에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분명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祖族),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父族),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己族)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법률체계의 모법이 되는 『대명률직해』나 『경국대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에서 연좌제의 적용을 받는 친족의 범위도 친가, 외가, 처가의 3족이 아니라, 조족, 부족, 기족의 3족으로 국한되어 있다.

아끼던 김일성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화성의숙에서 중퇴하려 하자 최동오는 몹시 노여워하였지만, 결국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운동권‘의 반미와 청소년, 네티즌들의 반미는 그렇게 만나고 있었다. 아직까지 미군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그 엄청난 촛불의 바다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따위로 하려면 나가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습니다"를 외칠 때 우리는 서로 반미냐 미국 반대냐를 따지지 않았다. 호들갑을 떠는 수구세력에 하나가 되어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모두 외치는 듯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는 재조지은을 강조할수록 당시 권위가 실추된 선조나 대신들은 어려운 입장이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즉,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의 대부분을 명군의 것으로 돌리고, 나아가 명군을 불러온 주체가 자신들임을 부각함으로써 전쟁 초반의 연이은 패배 때문에 실추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이순신이나 권율 같이 정규군을 이끈 명장들이나 김덕령(金德齡),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을 이끈 진짜 구국영웅들의 역할과 의미는 축소되고, 명군을 불러들인 조정 신료들이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된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에는 이순신·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나라에 파병을 청해 불러들인 공로로 정곤수(鄭崑壽)를 일등공신에 봉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명군의 노략질이 오죽했으면 민중 사이에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명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해 "어찌하여 왜적이 오지 않아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임재해 교수는 당시 민중은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관계란 혈연의 친연성이나 혈맹관계 운운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에 의한 선린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