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1960, 70년대에 비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말은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분의 조상으로부터 퍼져나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단일민족일까?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분의 조상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두 퍼져나왔다는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와 부계 혈통주의가 결합된 아주 난폭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뻗어나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올려잡아도 한말 이상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이런 의식이 전 국민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좀더 세밀히 연구해 보아야겠지만 신분제와 신분의식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들어와서일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여기에 "월급은 왜 안 줘요?" 같은 말들이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에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일민족국가 한국의 현실이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김두한은 뉴스 메이커이자 트러블 메이커였다. 정책 입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두목으로 몰아붙인 유일한 인물이었다.

김두한이 이승만을 친일파 두목으로 비판한 것이 말인즉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이승만이 두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온갖 파괴공작을 일삼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유족들은 호소한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부디 이 땅의 풀 한 포기 함부로 밟지 말아 달라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가족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온 국토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온 국토에 학살의 흔적이 널려 있고, 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학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흔히 ‘유격대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은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가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이남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최근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두 가지 이유에서 새롭게 고조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언론개혁운동 과정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재조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심화되면서 이 문제를 우리 사회 내의 친일잔재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 점이다.

이렇게 땅에 묻힌 친일의 어두운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쳐 지금 부족한 대로나마 우리가 친일잔재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분은 임종국(1929∼89) 선생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자료를 뒤져가며 친일파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추적한 임종국 선생과 그 제자들의 엄청난 노력에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坦白)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뒤에 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한-일관계는 미국이 내세운 반공의 깃발 아래 이렇게 살아남은 군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야합의 역사였다. 친일파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 친일파의 행위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과연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우경화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백민태는 바로 이들이 선택한 하수인이었다. 그런데 백민태는 항일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테러리스트였기에 백민태를 하수인으로 고른 것은 이들 암살모의자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노덕술의 체포는 이승만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재직시 직접 그를 이화장으로 불러 "자네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을 뻗고 잔다"고 격려한 이승만은 노덕술이 검거되고 얼마 뒤인 1949년 2월12일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종철이 아버님 말씀처럼 "아무 할말이 없데이…"다. 노덕술이 가고, 박처원도 가고, 이근안도 사라진 마당, 그러나 그들이 남긴 씨는 아직도 이 땅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 그들과 똑같은 논리, 똑같은 수법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한 자들이 남아 있는 곳이 어디 경찰뿐이겠는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은 이 어정쩡한 민주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군부독재잔재의 청산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친일문제는 5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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