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또라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잘 계산된 미친 짓이었다)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돌려주고 떠날 수 없도록 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작전지휘권을 환수하지 않은 것은 개인의 정권 유지에는 유리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에는 두고두고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남북 관계에서 이북은 "어른들 얘기하는 데 애들은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대미 직접 교섭을 추구했다.

채명신 장군은 생전에 필자에게 월남전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기에 파병 자체를 반대했지만 박정희가 자신을 굳이 사령관에 임명했고, 일단 파병되자 미군에 예속되어 함께 진흙탕에 빠질 수는 없었기에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전지휘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관철시켰다고 말했다.

여기가 네버랜드인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어떻게 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호를 책임진단 말인가. 한국 안보가 불안하다면 그 진짜 이유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자들이 자기들만이 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고 믿으며 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개인의 인격적 고매함으로 많은 부분을 메울 수 있지만, 이른바 친노 그룹의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자산을 갖고 있지 않다. 지금 그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우리는 폐족"이라던 절절함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스스로 정치적 존엄사를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친노 정치인 중 금배지 달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야당성 회복은 민주주의 계승의 역사성, 민주주의를 위해 절실하게 싸우는 실천성,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꿈을 담아내는 진보성의 강화에서 찾아야 한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먼 친척인 유표에게 얹혀 지낼 때의 일이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놀고먹던 유비가 어느 날 뒷간에 가서 보니 허벅지에 몰라보게 살이 쪘다. 늘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다니느라 허벅지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편안하게 세월만 죽이다 보니 살이 오른 것이다. 유비의 탄식을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 한다. 싸움의 근육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탄식이다

유비가 천리마를 얻은 곳이 하필이면 신야(新野)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야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천리마는 시민이다. 지금 자기 등에 말안장 얹어주길 바라는 시민, 제대로 된 정치인에게 기꺼이 자기 등을 허락할 시민은 한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 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신야를 달리는 천리마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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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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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한국 현대사학자, 혹은 현재사학자.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 이사,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한겨레21>과 <한겨레>에 ‘역사 이야기’와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등을 연재하며 독자들을 흥미진진한 한국 현대사의 세계로 이끌었다.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고전이 된 《대한민국사》 1~4권을 비롯해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지나간 사건들의 현재적 의미를 밝혀 소개해왔다. 유신 시대의 부활을 염려하며 쓴 《유신》, 정수장학회의 진실을 파헤친 《장물바구니》, 소설가 서해성과 함께 금기를 넘나들며 한국 사회 위선과 부당함에 쓴 소리를 날린 《직설》 등 다양한 저작을 통해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려 하고 있다.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역사학은 분명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자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일 수밖에 없다.

30여 년 전 광주에서와 또 다르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족속이란 말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한겨레〉 2014년 5월 3일 자 특별기고 "가만히 있지 말라"에서 통렬히 질타하신 바와 같이 이승만이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짓은 이준석보다 훨씬 더 무책임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2015년 3월
견지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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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으라 세월호에, 가만있으라 서울에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은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호언과는 달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은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해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 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김성칠은 그날의 일기를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라는 탄식으로 마무리했다.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의 무덤은 평양 외곽에 있다. 마오쩌둥이 한국 전쟁에 백만 대군을 파병할 때 남의 집 자식들만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 내보낸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타 죽은 마오안잉을 마오쩌둥은 조선에 묻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가 조선 반도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떻게 자기 새끼만 고향으로 데려가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수많은 정치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미군 장성의 아들 중에 아버지와 함께 한국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145명이고, 이 중 35명이나 전사하였다고 앞에 인용한 페런바흐는 쓰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의 아들 중에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경우가 있는가? 과문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이 망할 때 구례 촌구석의 가난한 선비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왕조의 녹을 먹은 적도, 특별히 황은을 입은 적도 없었지만 500년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데 목숨 바치는 놈 하나 없으면 그것이 무슨 꼴이냐며 아편을 탄 술을 오래 보다가 결국 마셨다..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 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 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일본의 장점도 배우지 못한 친일파들

친일파들은 일본과 친했고 일본을 위해 일했을지는 몰라도 일본의 보수 세력 본류가 가진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덕성과 희생정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 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 들고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나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나선 이순신이 있었고,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들이 있었다. 장수만 있어서 어찌 전쟁이 되겠는가. 역사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세웠다.

내란의 나라,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내란은 부도덕한 인간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부도덕한 세력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제헌헌법은 그 이익을 노동자들이 ‘노나’ 먹을 권리를 신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조항은 제헌헌법을 기초한 현민 유진오 박사가 자부했듯이 대한민국 헌법 이외에 어느 나라의 헌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며, "18~19세기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만능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규정"이었다.

몇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어, 이 책이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 대학의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했을까? 우리 제헌헌법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사회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모든 국민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태를 사회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개인의 경제상 자유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 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제헌헌법이 갖고 있던 진보적인 조항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제헌헌법을 만든 의원들이 공유하고 있던 낙관적인 예상도 실현되지 못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추구한 사회국가의 영향을 받은 유진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제헌헌법 84조)을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기본으로 규정했으나, 신용옥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정의’로 표현된 사회국가의 이념을 뒷받침할 주요 기제들이 삭제되어 허구화"되었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국순옥 교수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헌법재판소가 떠맡은 이데올로기적 억압 기능은 "지배 체제를 부정하거나 지배 체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반체제 이단자가 생길 경우 헌법의 적인 그에게 사회적 파문을 선고함으로써 지배 체제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사실 이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자기방어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 그 자체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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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은 나를 구해줘

2017년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허수아비〉로 시작해 15여 편이 넘는 앤솔로지에 참여했고, 2022년 전자책 단편집 《폭풍의 집》을 출간했다.

지혁은 조수석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가을인데도 도로 양옆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푸르렀고 햇빛은 쨍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서야 연보랏빛 페인트칠이 벗겨진 철문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명 수학 클리닉. 지혁은 그동안 과외며 여러 유명 입시학원을 다녔다. 이런 단과학원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점수에 맞춰 엄마가 준비해줬고 자신은 그에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괜찮을까.

익숙한 질문이었고 그 결과 또한 익숙했다.

현수 엄마는 대기업 협력 업체 부장인 남편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대치동으로 올라온 대전족(대치동 전세 세입자)이지만, 웬만한 돼지엄마(사교육 정보에 능통해 다른 학부모를 이끄는 엄마)나 원주민보다 입시 정보에 빠삭했다.

"20년간 맡은 학생들을 인서울시킨 걸로 유명해. 1년에 다섯 명도 안 받아. 이번에 수시로 나간 아이가 있어서 아마 한 명 자리가 남았을 거야. 내가 연락해둘게."

"무조건 그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

"네, 그럼요. 원장님만 믿습니다."
스트레스가 어떻게 발현되건 상관없었다. 이 수업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붙잡는 희망의 지푸라기나 다름없었다. 무조건 믿을 수밖에.

"이 풀이가 이해 가니?"
원장님이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알아듣는다 해도 막상 돌아서면 눈앞이 깜깜했다. 머릿속에서 숫자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지금 사면이 벽인 낯선 공간에 갇힌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운명 앞에 펜 하나 들고 맞설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는 전우, 혹은 희생자. 엄마는 어차피 시험장에 들어가서 책상 앞에 앉으면 혼자라고 말하겠지만 함께라는 생각만으로 문제가 수월하게 풀렸다.

"너는 그런 데도 안 가고 뭐 했어?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쟤도 한 사람이에요. 생각이 있고 의지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힘든 시기일 뿐, 이 시기가 지나가면 누구를 충분히 도와주기도 하겠죠."

"그래 당장은 누구처럼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겠지. 그게 누구 덕분일 것 같으냐?"

"내 몸속에 들어왔다고?"
"그래. 일단 좀 빨리 걸어줄래? 시험 끝나자마자 몰래 나온 건데 얘 엄마도 좀 극성맞아서."

"나도 몰라. 난 그냥 세상 모든 게 싫었어. 전교 1, 2등에 목숨 걸었고 전국 상위권을 노렸지. 너도 알잖아. 문제 하나에 순위가 뒤바뀌는 거. 그날도 그랬어. 살고 싶지 않았고 정신 차려보니 학원 옥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죽었다는 거야."

수천 년을 살아온 늙은 악마는 새롭게 태어날 지상의 악마를 기대하며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괴이, 학원》은 ‘괴이학회’에서 만든 ‘괴이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가상의 도시 ‘월영시’를 배경으로 한다. 월영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장소로 괴담, 호러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악마, 요괴, 괴물, 크리처, 귀신, 악령, 외계인, 고대의 생물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중첩되어 있는 마(魔)의 소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선민 특별 수업

웹소설, 장르문학 작가, 스토리 디자이너. 괴담·호러 전문 레이블 ‘괴이학회’를 운영하며 《괴이, 도시》, 《괴이한 미스터리》,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등 다양한 장르의 앤솔로지를 기획, 공저했다. 현재 청강문화산업 대학교 웹소설창작전공 교수로 재임 중이다.

은상 얽힘

현업 편집자이자 글 쓰는 사람. 대표작으로는 《너의 뒤에서》,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 등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 에세이 《결국 소스 맛》이 있다.

"으아, 씨○ 깜짝이야. ○나 놀랐네."

"왜 욕은 하고 지랄이야."

"너희 점수가 안 오르더라도 다른 아이들의 점수가 떨어지면 너희의 등수는 올라가는 거야. 많이도 필요 없어. 너희와 비슷한 점수를 받고, 생각이 비슷한 경쟁자 수십 명만 아래로 떨어뜨리면 돼. 어차피 대학은 그 수십 명과 경쟁하는 거야. 너희보다 점수가 훨씬 높거나, 혹은 낮거나, 혹은 지망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야. 너희와 비슷한 아이들, 생각이 비슷해서 비슷하게 지원할 아이들, 그 아이들만 떨어뜨리면 돼. 바로 이것으로."

매싸는 유능하게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 아이에게 같은 처방을 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경쟁자는 지금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내 목을 조르고 있을 것이다.
"○발, 매싸 새끼 ○나 유능하네."
그래, 지금은 욕이라도 해야지. 어떡하겠어?

참고로, 이 글에서 매싸가 준 약물을 먹고 영서가 느끼는 감정은 실제 애더럴을 처음 먹은 사람들의 수기에서 참고하였다. 그만큼 효능감을 느끼지만, 또한 그래서 그 효능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도 동시에 찾아왔다고 하니,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찾지는 말기를 바란다. 아, 물론 환각 부분은 창작이다.

정명섭 4층의 괴물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거쳐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로 일했으며,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미스 손탁》, 《유품정리사》, 《기억 서점》, 《체탐인》,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 등이 있다.

공원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네 명은 월영시 최고의 불량 학생들이라 무서울 게 없었다. 촉법소년인 것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까짓 소년원’이라는 생각에 말썽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주목받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네 명을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한 배불뚝이 강 형사는 대놓고 열네 살만 넘으면 꼬투리를 잡아서 처넣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김하늬 이영의 꿈

소설가이자 드라마 작가.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청춘 블라썸⟩을 집필했으며, 카카오페이지에서 주최한 ‘넥스트 페이지’ 공모전에 ⟨신의 비늘을 삼킨 소녀⟩가 당선되어 웹소설로 연재했다.

자각몽은 단순히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과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평행 우주가 있고 함께 흘러가는 시간대를 운 좋게 꿈이라는 연결 고리로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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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모스타르. 이것들은 왠지 애틋한 느낌이 드는 이름들이다. 무엇인가 생각나면 그것을 보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돌려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엘레나와 나는 다리를 건너 차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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