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한국 현대사학자, 혹은 현재사학자.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 이사,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한겨레21>과 <한겨레>에 ‘역사 이야기’와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등을 연재하며 독자들을 흥미진진한 한국 현대사의 세계로 이끌었다.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고전이 된 《대한민국사》 1~4권을 비롯해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지나간 사건들의 현재적 의미를 밝혀 소개해왔다. 유신 시대의 부활을 염려하며 쓴 《유신》, 정수장학회의 진실을 파헤친 《장물바구니》, 소설가 서해성과 함께 금기를 넘나들며 한국 사회 위선과 부당함에 쓴 소리를 날린 《직설》 등 다양한 저작을 통해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려 하고 있다.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역사학은 분명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자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일 수밖에 없다.
30여 년 전 광주에서와 또 다르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족속이란 말인가?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한겨레〉 2014년 5월 3일 자 특별기고 "가만히 있지 말라"에서 통렬히 질타하신 바와 같이 이승만이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간 짓은 이준석보다 훨씬 더 무책임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2015년 3월 견지동에서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은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호언과는 달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은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해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 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김성칠은 그날의 일기를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라는 탄식으로 마무리했다.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의 무덤은 평양 외곽에 있다. 마오쩌둥이 한국 전쟁에 백만 대군을 파병할 때 남의 집 자식들만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 내보낸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타 죽은 마오안잉을 마오쩌둥은 조선에 묻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가 조선 반도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떻게 자기 새끼만 고향으로 데려가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수많은 정치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미군 장성의 아들 중에 아버지와 함께 한국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145명이고, 이 중 35명이나 전사하였다고 앞에 인용한 페런바흐는 쓰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의 아들 중에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경우가 있는가? 과문이지만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이 망할 때 구례 촌구석의 가난한 선비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왕조의 녹을 먹은 적도, 특별히 황은을 입은 적도 없었지만 500년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데 목숨 바치는 놈 하나 없으면 그것이 무슨 꼴이냐며 아편을 탄 술을 오래 보다가 결국 마셨다..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 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 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친일파들은 일본과 친했고 일본을 위해 일했을지는 몰라도 일본의 보수 세력 본류가 가진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덕성과 희생정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 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 들고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나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나선 이순신이 있었고,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들이 있었다. 장수만 있어서 어찌 전쟁이 되겠는가. 역사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세웠다.
내란의 나라,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내란은 부도덕한 인간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부도덕한 세력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제헌헌법은 그 이익을 노동자들이 ‘노나’ 먹을 권리를 신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조항은 제헌헌법을 기초한 현민 유진오 박사가 자부했듯이 대한민국 헌법 이외에 어느 나라의 헌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며, "18~19세기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만능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규정"이었다.
몇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어, 이 책이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 대학의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했을까? 우리 제헌헌법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사회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모든 국민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태를 사회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개인의 경제상 자유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 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제헌헌법이 갖고 있던 진보적인 조항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제헌헌법을 만든 의원들이 공유하고 있던 낙관적인 예상도 실현되지 못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추구한 사회국가의 영향을 받은 유진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제헌헌법 84조)을 대한민국 경제 질서의 기본으로 규정했으나, 신용옥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정의’로 표현된 사회국가의 이념을 뒷받침할 주요 기제들이 삭제되어 허구화"되었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글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다시 생각나는 밤이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 한홍구 저
국순옥 교수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헌법재판소가 떠맡은 이데올로기적 억압 기능은 "지배 체제를 부정하거나 지배 체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반체제 이단자가 생길 경우 헌법의 적인 그에게 사회적 파문을 선고함으로써 지배 체제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관들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사실 이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자기방어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 그 자체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