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은 나를 구해줘 2017년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허수아비〉로 시작해 15여 편이 넘는 앤솔로지에 참여했고, 2022년 전자책 단편집 《폭풍의 집》을 출간했다.
지혁은 조수석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가을인데도 도로 양옆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푸르렀고 햇빛은 쨍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서야 연보랏빛 페인트칠이 벗겨진 철문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명 수학 클리닉. 지혁은 그동안 과외며 여러 유명 입시학원을 다녔다. 이런 단과학원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점수에 맞춰 엄마가 준비해줬고 자신은 그에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현수 엄마는 대기업 협력 업체 부장인 남편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대치동으로 올라온 대전족(대치동 전세 세입자)이지만, 웬만한 돼지엄마(사교육 정보에 능통해 다른 학부모를 이끄는 엄마)나 원주민보다 입시 정보에 빠삭했다.
"20년간 맡은 학생들을 인서울시킨 걸로 유명해. 1년에 다섯 명도 안 받아. 이번에 수시로 나간 아이가 있어서 아마 한 명 자리가 남았을 거야. 내가 연락해둘게."
"네, 그럼요. 원장님만 믿습니다." 스트레스가 어떻게 발현되건 상관없었다. 이 수업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붙잡는 희망의 지푸라기나 다름없었다. 무조건 믿을 수밖에.
"이 풀이가 이해 가니?" 원장님이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알아듣는다 해도 막상 돌아서면 눈앞이 깜깜했다. 머릿속에서 숫자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지금 사면이 벽인 낯선 공간에 갇힌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대한 운명 앞에 펜 하나 들고 맞설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는 전우, 혹은 희생자. 엄마는 어차피 시험장에 들어가서 책상 앞에 앉으면 혼자라고 말하겠지만 함께라는 생각만으로 문제가 수월하게 풀렸다.
"너는 그런 데도 안 가고 뭐 했어?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쟤도 한 사람이에요. 생각이 있고 의지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힘든 시기일 뿐, 이 시기가 지나가면 누구를 충분히 도와주기도 하겠죠."
"그래 당장은 누구처럼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겠지. 그게 누구 덕분일 것 같으냐?"
"내 몸속에 들어왔다고?" "그래. 일단 좀 빨리 걸어줄래? 시험 끝나자마자 몰래 나온 건데 얘 엄마도 좀 극성맞아서."
"나도 몰라. 난 그냥 세상 모든 게 싫었어. 전교 1, 2등에 목숨 걸었고 전국 상위권을 노렸지. 너도 알잖아. 문제 하나에 순위가 뒤바뀌는 거. 그날도 그랬어. 살고 싶지 않았고 정신 차려보니 학원 옥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죽었다는 거야."
수천 년을 살아온 늙은 악마는 새롭게 태어날 지상의 악마를 기대하며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괴이, 학원》은 ‘괴이학회’에서 만든 ‘괴이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가상의 도시 ‘월영시’를 배경으로 한다. 월영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장소로 괴담, 호러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악마, 요괴, 괴물, 크리처, 귀신, 악령, 외계인, 고대의 생물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중첩되어 있는 마(魔)의 소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선민 특별 수업
웹소설, 장르문학 작가, 스토리 디자이너. 괴담·호러 전문 레이블 ‘괴이학회’를 운영하며 《괴이, 도시》, 《괴이한 미스터리》,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 등 다양한 장르의 앤솔로지를 기획, 공저했다. 현재 청강문화산업 대학교 웹소설창작전공 교수로 재임 중이다.
은상 얽힘 현업 편집자이자 글 쓰는 사람. 대표작으로는 《너의 뒤에서》,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 등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 에세이 《결국 소스 맛》이 있다.
"너희 점수가 안 오르더라도 다른 아이들의 점수가 떨어지면 너희의 등수는 올라가는 거야. 많이도 필요 없어. 너희와 비슷한 점수를 받고, 생각이 비슷한 경쟁자 수십 명만 아래로 떨어뜨리면 돼. 어차피 대학은 그 수십 명과 경쟁하는 거야. 너희보다 점수가 훨씬 높거나, 혹은 낮거나, 혹은 지망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야. 너희와 비슷한 아이들, 생각이 비슷해서 비슷하게 지원할 아이들, 그 아이들만 떨어뜨리면 돼. 바로 이것으로."
매싸는 유능하게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 아이에게 같은 처방을 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경쟁자는 지금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내 목을 조르고 있을 것이다. "○발, 매싸 새끼 ○나 유능하네." 그래, 지금은 욕이라도 해야지. 어떡하겠어?
참고로, 이 글에서 매싸가 준 약물을 먹고 영서가 느끼는 감정은 실제 애더럴을 처음 먹은 사람들의 수기에서 참고하였다. 그만큼 효능감을 느끼지만, 또한 그래서 그 효능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도 동시에 찾아왔다고 하니,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찾지는 말기를 바란다. 아, 물론 환각 부분은 창작이다.
정명섭 4층의 괴물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거쳐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로 일했으며,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미스 손탁》, 《유품정리사》, 《기억 서점》, 《체탐인》,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 등이 있다.
공원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네 명은 월영시 최고의 불량 학생들이라 무서울 게 없었다. 촉법소년인 것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까짓 소년원’이라는 생각에 말썽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주목받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네 명을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한 배불뚝이 강 형사는 대놓고 열네 살만 넘으면 꼬투리를 잡아서 처넣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김하늬 이영의 꿈 소설가이자 드라마 작가.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청춘 블라썸⟩을 집필했으며, 카카오페이지에서 주최한 ‘넥스트 페이지’ 공모전에 ⟨신의 비늘을 삼킨 소녀⟩가 당선되어 웹소설로 연재했다.
자각몽은 단순히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과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평행 우주가 있고 함께 흘러가는 시간대를 운 좋게 꿈이라는 연결 고리로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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