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종사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통령은 사기업 출신답게 그런 경영 논리를 국가의 교육 경영에 도입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새 말을 신교육의 목표로 내건 것이었다.
자사고라는 것은 오래 터 닦아온 고교 평준화의 파괴였고, 차별 교육의 표본이었다. 공부를 잘해도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없으면 자사고는 열리지 않는 금단의 문이었다. 경제력으로 교육 차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다니, 그보다 잔인한 비교육적 행위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성적 줄 세우기에 치여 그렇게 많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정작 학부모들이 일제고사를 반대하고 나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자식만큼은 1퍼센트 안에 들게 해야 한다!’
엄마들이 일으키는 사교육 무한 경쟁의 광풍은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야 아이의 입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경탄스러운 금언까지 만들어내며 해가 바뀌고 바뀌어도 기세가 꺾일 줄을 몰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그 끔찍한 사건은 터졌다.
"오늘 또 여러분들의 기분이 어떨지 잘 알고 있다. 긴 말 하지 않겠다. 단, 성적보다는 인간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란다."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나와 남을 비교해 가며 불행을 키우는 것이다.
공부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많은 능력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은 그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부여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듯이 인간의 모든 능력도 평등하고 공평하다.
학교 교육의 가장 큰 잘못은 시험 점수만으로 학생의 능력을 규정하고 속단하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한평생 신명 나게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 귀하고 천한 직업은 없다. 도둑질과 사기가 아닌 한 그 어떤 직업이든 소중하고 존귀하다.
성공한 인생이란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을 한평생 열심히 즐겁게 해나가고, 그리고 사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노년을 맞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다. 그런데 그 연극은 극작가도, 연출가도, 주인공도 자기 자신이면서, 단 1회의 공연일 뿐이다.
이 세상에 문제아는 없다.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사회가 있을 뿐이다.
—교육가 닐
나는 나 혼자일 뿐이다
선도위원회는 사흘째 열리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마치 중죄인을 심판하는 법정처럼 무겁고 긴장되어 있었다.
"글쎄 말이야. 근데 할머니도 손자만큼 행복해하면서, 얘 그놈의 공부 기를 쓰면서 할 것 없다, 사람은 다 타고난 팔자대로 살게 돼 있다, 괜시리 에미들이 극성 떨고 설치고 야단법석인 게지, 하며 손자 놈 기를 살리는 거야."
"그래,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내가 당하고 보니 이건 정말 큰일 나게 생겼어. 교육계에선 무슨 대책이 없는 건가?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
부모가 자식에 대한 과욕을 버리고 바르고 참된 사람이 되게 도와주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일이야. 그 길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공부라는 것, 그건 각자가 선택한 직업에 알맞게만 적당히 하면 되는 것이고, 돈이라는 것도 하루 세끼 먹으면서 누추하지 않게 사람 품격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지면 되는 것 아닐까. 시인은 이 시에서 그걸 사람들에게 일깨우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잖아."
"그건 아니지. 왕성한 기업 활동 없이는 우리 사회가 안 돌아가니까 기업 종사자들은 최선을 다해 뛰어야지. 단, 시나 책들을 꾸준히 읽어 인간성을 고양시켜 가면서 말이지."
엄마가 없는 곳으로 소년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몸집은 큰 편이고, 발육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숙였던 고개를 완전히 들지 않았고, 눈길도 떨구고 있었다. 그런 몸가짐이 몸에 밴 것임을 설명하는 듯 양쪽 어깨가 표 나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늘 주눅 들고, 기죽어온 애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문득 글에서 만난 아이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아이를 들볶아온 어머니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자식의 모습이었다.
어린 자식이 있다면 최선의 능력을 다해 돕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일이다. 존재할 공간을. 아이는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다.
—에크하르트 톨레*
"아니, 진짜 분한 건 내가 막 야단을 쳐도 큰 덩치로 떡 버티고 서서 꿈쩍도 안 할 때예요."
"아이고, 누가 아니래요. 잘 먹여 키워놨더니 어디 덩치로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버티고 서 있을 때는 저게 내 자식이 맞나 싶은 게 정이 뚝 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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