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이 안중근을 다설명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안광(眼光:식견)을 가지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로 나선 사람이다.
박은식의 평가처럼 안중근을 단순히 하얼빈 의거의 주인공으로만 평가하고 영웅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젊어서부터 협객 기질이 있었던 그는 1907년 이후 항일투쟁에 본격적으로 투신했으며, 민권운동, 교육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집안에서 천주교를 수용한 뒤로는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평화‘였고, 그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좌우합작과 독립운동의 통합에 힘을쏟았다. 해방 후에도 안중근 일가는 좌우합작과 남북합작, 반독재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고, 일부는 외교관과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의발전에 기여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에 헌신한 분들의 후손을 홀대하면서 외치는 ‘위국헌신 정신‘은 공허한 메아리일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안 의사의 ‘위국헌신 정신‘과 평화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계승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안 의사뿐만 아니라 삼대에 걸친 안 의사 집안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더욱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새롭게 안중근 의사 사당과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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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차지해 왔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안중근추모사업‘의 임원조차도 친일파나 친일파의 후손, 독재정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안중근숭모회 초대 이사장인 윤치영은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역사학자 이준식 박사는 "친일파 후손들이 ‘역사 세탁을 위해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며
"정치인들도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이름을 높이는 데 쓰는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독립운동가의 유지를 받들고, 그 후손들을 국가가 보살피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왔다. 안중근 의사를 보는 우리의 인식도 단순히 ‘우국지사‘로 영웅시하는데 머물러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영웅‘이 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로부터 멀어진 셈이다. 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 이라는 글씨 정도만 기억될 뿐 안중근의 사상과 그 일가의 삼대에 걸친 고투는 잊혀졌다. 이제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테러리스트‘라거나 평생을조국 광복에 헌신한 김구 선생조차도 "대한민국 독립에 아무런 공헌한 바가 없다"는 망언이 공개석상에서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애국선열들이 통곡할 일이다.
역사학자이자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은 1914년에발간한 《안중근전》에서 안중근을 단순히 민족의 원수를 갚은 지사로만 보는 것은 단견이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역사(행적)에 근거하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한국을 위하여 복수한 열협(俠, 義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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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이들의 애국심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안 의사의 조카 안민생은 1980년대 후반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동생 경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친일파 가문이거나 군사독재 정권에서 고위 관직을 지낸인사들이 독립운동가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의 회장과 임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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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과 가문의 안녕을 뒤로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독립운동가는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은 몰락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추앙하는 안중근 의사의 집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할아버지 형제들과 아버지 6형제들이 가지를 쳐 5대에 이르러서는 자손이 수백 명을 헤아린다. 그중 몇 명은일제에 체포되어 회유공작에 넘어가 친일행적의 오점을 남겼고, 또일부는 이승만, 박정희 정부 때 외교관과 군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후손들은 반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광복된 조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북으로, 미국으로, 파나마로 흩어져소식조차 끊겼다.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의 손녀이자 안정근의 외손녀인 김효자는 미국으로 떠난 후 행적이 묘연하다.
실제로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는 "광복 후 국내에는 우리 집안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안중근 집안이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하나 대다수 후손들의 삶은 고단했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안경근은 4·19혁명 후 ‘민주구국동지회‘를만들어 정치에 나섰다가 5·16군사정권에 의해 7년간 투옥되었다.
안 의사의 조카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 역시 5·16군사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일제강점기 때 안명근이감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 내의 같은 감방이다. 그나마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안 의사의 조카 안진생도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당한 뒤 충격을 받고 쓰려져 8년간 투병하다.
숨졌다.
독립운동가 집안이 광복 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외국에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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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후 독일방송에서 우승자 손기정은 일본인이라고 소개했다. 이때 방송국에 찾아가 손기정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정정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안봉근이다.
이들은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조선인들끼리 몰래 축하모임 가졌다. 이날 모임을 준비한 사람도 베를린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하던안봉근이었다. 후에 손기정은 <동아일보> 1964년 1월 4일자 인터뷰에서 "교포집에서 첫 축승회가 있었는데, 안봉근씨라고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어요, 독일부인이 쌀밥에 두부,
닭고기국을 끓여주어서 잘 먹었어요."라고 회고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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