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명의 부하와 함께 한나라 땅을 나섰던 반초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으로 반평생을 보낸 서역 땅은 숙주에서 서쪽으로 수만 리 떨어져 있었다. 서역 땅에 머물고 있던 반초가 말년에 향수를 견디지 못하고 황제에게 바친 상소문에는 "신은 추호도 주천군까지 가기를 바라지 않으며, 원컨대 살아서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기만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옥문관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9백 리 지점에 있었다. - P96

이듬해인 명도(明道) 원년(서기 1032년)에서하국왕인 이덕명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신해 아들 원호가 서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의 덕명은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송이라는 두 대국 사이에 끼어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며 형세를 살피는 정책을 취한 결과, 당시 한창 성장 과정에 있던 서하를 별다른 대과 없이 다스런 인물이었다. - P104

아들 원호는 부친과는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송이나 거란에 대한 정책을 놓고 걸핏하면 부친과 대립했다. 일찍부터 아버지에게서 병권을 넘겨받아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더구나 수많은 전투에서 속속 승리를 거두며 양주와 감주, 숙주를 평정한 덕분에 이제는 그 어떤 전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원호는 평소 서하인은 고유의 풍속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로, 송나라 조정이 내려준 비단 용포를 입은 아버지 덕명에게 불가함을 주장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 P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율곡 이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는 3세 때 부터 글을 깨치고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 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한 천재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한 이후 15세에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게 없다며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백인걸 문하에 들어가우계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16세 (1551)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묘막 생활을 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뇌하며 불교 서적을 읽고 흥미를  느껴서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엔 금강산 마하연에 들어가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을
얻고 승려 생활을 했다. 그때 율곡의 나이는 불과19세였다. - P460

그러나 1년 뒤 결국 불교나 유학이나 도를 찾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라며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는 위나 아래나 같은 것/이는 색(色)도아니요 공(空)도 아니라네" 라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시를 짓고 하산했다.  20세(1555)에 하산해서는 다시 성리학에 열중해 23세 때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물음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퇴계는 율곡이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같은 글을 주었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
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 P460

퇴계를 만난 바로 그해 겨울 율곡은 생원시 별시(別試)에서 장원했고 29세(1564)에는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이로써 율곡은 13세 이후 모두 9번 장원으로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올라 대사간을 몇 번이나 지내며 경륜을 펼쳤고 한때는 파주 율곡으로 물러나 학문에 열중하기도 하다가49세(1584)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피란길에 한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5천원 권 지폐에 그의초상을 담아 기리고 있다. - P461

율곡 이후에 배향된 이들은 모두 율곡학파의 노론계 학자였다. 김장생과 조헌은 율곡의 제자였고,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율곡의 사위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은 김장생의 제자이자 김집의 제자였다. 박세채역시 김집의 제자였다. - P462

탁영 김일손과 남명 조식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와 퇴계학파의 학봉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우 정경세 등은 문묘 배향이 추진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 P462

"천리마 꼬리를 잡고 가는 파리도 천리를 간다." - P464

안회는 비록 독실하게 공부하기도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를붙잡았기 때문에 그 덕행이 더욱 드러났다.
여기서 사마천이 천리마 꼬리에다 비유한 것에 대해서는 당나라사마정이 『사기』의 주석으로 쓴 『색은(隱)』을 보면 ‘기미창승(驥尾蒼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기미‘는 천리마 꼬리고 ‘장승‘은 파리다.
파리가 천리마 꼬리를 잡으면 천리를 간다. 
蒼蠅附驥尾而致千里 - P465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 ·외교적 기술보다 한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크건 작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 P476

성균관 답사를 이 하마비에서 시작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곁에 있는 영조대왕의 탕평비(蕩)에서 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영조 18년(1742)에 세운 이 탕평비에는 영조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나오는  말을 풀어서 친필로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두루 아우르고 치우치지 않는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比而弗周 寔小人之私
(비이불주식소인지사의)
치우치고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 P476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 「홍범(洪範篇)」에 실린  이상적인 정치를펴기 위한 9가지 규범 중 다섯번째에 나오는 말이다.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 - P476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을 기리며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흥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 P479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 P479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 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 P480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 P480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 P480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 P480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 P481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보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국의 첫문장 比較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
雪国であ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군마 현(郡馬縣)과 니가타 현(新潟縣)의 접경을 말한다. 본문의 <국경>은 모두 이 뜻이다.
† 군마현과 니가타 현을 잇는 시미즈(淸水) 터널을 가리킨다.

1. 민음사, 유숙자 번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었다.

2. 청목사, 유승휴 번역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희뿌연히 밝아 왔다. 신호소에 기차가 멎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처녀가 일어나 시마무라 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밀려 들어왔다. 처녀는 창 밖으로 온통 몸을 내밀고 멀리 외치듯이 소리쳤다.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내는 목도리를 코 위에까지 두르고 귀에 모자의 털가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3. 문예출판사, 장경룡 번역
현(懸)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島村)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9-29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첫 문장으로 자주 언급되지요. 저도 저 문장이 넘 좋아서 읽다가 줄거리가 ?! ㅎㅎㅎ 전 민음사 판으로 읽었어요.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좋네요 *^^*

대장정 2022-09-29 18: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민음사판으로 읽고, 청목사판 또 읽고 있습니다. 편안한 저넉시간 보내세요 미니님! ><.
 

김진명 소설 모아보기

김진명 1957년 부산출생, 보성고, 한국외대 법학과 졸업, 대한민국 소설가, 민족주의자?
1993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로 데뷔, 600만부 이상 팔리며 밀리언셀러 작가로 등극
제천에서 고구려 집필중

고구려는 고구려1권을 2011년3월1일 초판1쇄 발행후 11년 5개월 12일 지난 지금 고구려7 권이 간행됐다. 너무 느린 집필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전에 고구려를 먼저 알기 바란다.

책이 나오기 기다리다 지쳐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https://naver.me/5JJUYOyh
고구려7권이 나온 후, 김진명 작가를 인터뷰한 뉴시스 기사를 보면 2023년 완간이 목표이며 고구려8~10권은 광개토태왕의 이야기이고 쾌도난마식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7권 초판 발행 2021년6월14일, 1년2월28일 지난 지금, 고구려8권이 간행된다는 소식은 요원하기만하다. 김진명 작가님을 응원합니다. 고구려 부탁드립니다.
🙇‍♂️🙇‍♀️🙇🙇🙇‍♀️🙇‍♂️🙇‍♂️🙇‍♂️🙇‍♀️🙇🙇‍♂️🙇‍♀️🙇🙇‍♂️🙇‍♀️

https://naver.me/5IlP9Nq0
고구려 집필하다 말고 낸 에세이, 인터뷰
내년 상반기 고구려8권 출간, 2024년 여름까지 완결할 계획, 8권부터는 아들이 공동저자로 올라간다나 뭐라나

유비, 조조 너머에 을불과 창조리가 있었다!

김진명 소설은 재밌다. 어려움이 없고 빨리 읽힌다. 읽으면 애국심이 솟아오른다.

📚 📖 읽은 책
1. 고구려1~7
2. 살수1~2
3. 하늘이여 땅이여1~2
4. 1026 <== 한반도1~2
5. 카지노 <== 도박사1~2
6. 신의 죽음 <== 신의 죽음1~2
7. 삼성컨스피러시 <== 바이 코리아1~2
8.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 <== 황태자비 납치사건1~2
9. 최후의 경전 <== 코리아 닷컴1~2
10. 싸드
11. 제3의 시나리오1~2
13. 몽유도원1~2 <== 가즈오의 나라1~2
14.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2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3
15. 미중전쟁1~2
16. 예언
17. 글자전쟁
18. 바이러스X
19. 천년의 금서
20. 직지1~2, 아모르 마네트

📚 📖 안 읽은 책
21. 나비야 청산가자1~2
22. 킹 메이커
23.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24. 때로는 행복 대신 불행을 택하기도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9-12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정 2022-09-12 16:16   좋아요 1 | URL
ㅎㅎ 당연히 고구려죠. 젊은이들 뿐 아니라 老少를 불문허고 고구렵니다. 제 취향으로다요.

2022-09-13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정 2022-09-13 14:48   좋아요 1 | URL
ㅎㅎ 별말씀을요.재미있구(저한테는)자간 행간 넓어서 금방 읽을수 있어요. 특히 행간이 이책보다 넓은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공주 수영 보련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생각: 작가가 뭣도 모르고 그렇게 썼다.

이때 내아(內衙)에서 술상이 나오거늘 한 잔  먹은  후에  통인과 방자 물려 준다. 술기운이  도도하야 담배 피워 입에다 물고이리저리 거닐제, 충청도 공주수영(水營)  보련암(寶蓮菴)이 좋다 하나 이곳 경처 당할쏘냐.  붉을 단(丹) 푸를 청(靑) 흰 백.. ..
<춘향전, 21페이지>

충청도 공주 수영 보련암.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충청도에 수군절도사는 보령 오천에 있었다.
경상, 전라에는 좌, 우수사가 있었지만 충청엔 충청수사 하나.
충청수영성 영보정. 보령시 오천면 오천항에 있다.

충청수영 영보정

오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충청수영성 언덕에 위치하는 누정으로 1504년(연산군 11) 수사 이량이 지었으며 이후에 계속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많은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시문을 남겼다. 백사 이항복과 다산 정약용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 충청수영이 폐지되면서 1878년 영보정도 화재로 소실되고 터만 남아 있었는데 2015년에 영보정을 복원하여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http://m.viva100.com/view.php?key=20220708010001343

춘향전에 나온 ‘츙쳥도 고마수영 보련암’에 대하여, 공주대학교 강헌규

춘향전, 춘향수절가에는 전라도의 광한루와 오작교에 해당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고마 수영 보련암이라는 말이 있다. 충청도에 있는 [보련 암자] 물론 고마수영이나 보련암이 아름다운 곳이라 할지라도 광한루나 오작교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글쓴이의 관심사는 고마수영과 보련암 지명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저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마수영[고마해군본부]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다.
2. 보련암:기록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장소를 알 수 있다.
①경북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 옆에 있다.
① 동산의 가슴 우장동 마을 풍산리에 있다. 강원도 화천군 군내면. 그런데 이 두 보련암은 춘향전의 보련암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보련암‘은 ‘영보정‘의 옛 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변경에 대한 추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련암(보련)→영보(보련)정

이러한 변화는 불교의 지배를 받는 고려 사회에서 유교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회로의 이념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8-21 2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춘향전 무대가 공주 라면 실제 대화는 공주 방언으로 ?? ㅎㅎ

대장정 2022-08-22 00:18   좋아요 2 | URL
전라북도, 충청남부 사투리 비슷합니당~~^^.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