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나는 공고를 가야만했다. 둘째라서. 할머니께서는 큰형밖에 대학에 보낼수밖에 없다 하셨다. 중3 담임선생님께선 어머니를 학교에 네번 부르셨고 나는 중학교옆에 붙어있는 후졌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할수 있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서울에 있는 공립 4년제 대학에 갈수 있었고 ROTC장교를 나왔고, 지금은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닐수 있었다. 고마우신 그 선생님 덕분에, 그 분 말씀을 따라주신 어머님 덕분에!

내가 다니던 농림고등학교에 ‘영농학생‘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영농학생에 가입하면 학교에서 공부보다 농사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논과 밭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내기나 벼 베기, 묘포장에 풀베기 같은 일은 전교생이 나서야 했지만 자잘한 일은 영농학생들이 했다. - P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식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시는 어머니.
내 어머니도 새벽부터 석회 후레쉬를 들고 고동-우리 동네에선 다슬기를 고동이라 불렀다.-잡으러 냇가로 나가셨고 이른 아침이면 그 고동을 사러 고동장수가 트럭을 몰고 우리 동네에 왔다. 고동은 그 시절 7~80년대 우리 마을의 주 수입원이었다

어머니는 달 뜬 새벽 강을 건너가 밭을 매셨다.
호미 끝에 걸려 뽑히는 작은 돌멩이들이 돌아눕는 아픈 숨소리가 잠든 내 등에서 딸그락거렸다.
젖은 돌멩이 몸에 파인 호빗자국이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었다. 아프고도 선명한 그 다리를 건너 나는 세상으로 나갔다.
- P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펜하겐 시청사 앞에서 낮은 단상 위에 놓인 동상을 만났다. 왼쪽을 지긋이 바라보는 키 높은 모자를 쓴 남자의 눈매가 왠지 슬퍼 보였다. 바로 안데르센의 동상이었다. 이 동상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875년의 어느 날, 안데르센을 너무 사랑했던 코펜하겐 시민들은 덴마크의 위대한 동화작가를 위해 동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초기 디자인은 그를 둘러싼 주변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동상의 모형을 사전 제작하여 안데르센에게 미리 보여주었는데,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동상 주변에 아이들이 있는 것이 싫어요. 아이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해요."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