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도의 성지로 시작한 메릴랜드 식민지

1632년 메릴랜드 식민지는 최초의 가톨릭교도의 피난처로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세실 칼버트 남작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찰스 1 세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를 메릴랜드라고 불렀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Henriette Marie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볼티모어의 맥헨리 요새Fort McHenry가 영국군의 포화로 불에 타고 있을 때 메릴랜드의 변호사이며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맥헨리 요새의 방어〉라는 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미국 국가의 가사가 된 것이다. 국가의 1절은 불타는 맥헨리요새에 휘날리는 성조기를 그려 내고 있다.

흑인들은 볼티모어의 서쪽과 동쪽에 주로 거주하는데 이를 ‘검은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흑인들이 나비의 날개 모양으로 동서로 나눠져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백인들은 주로 중앙과 남동부에 거주해서 L자형 대형을 이루는데, 이를 ‘백인 L’이라고 한다.

1607년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세운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과 1630년에 세워진 요크타운, 그리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였던 윌리엄스버그, 이 세 곳을 버지니아의 ‘삼각 역사 유적지’라고 부른다. 이곳 어디든지 자동차로 채 30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의 역사적 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최고의 역사 관광지이다.

롤프와 포카혼타스 사이에 토머스 롤프라는 아들이 있었다. 토머스는 이후 많은 후손을 보았고, 그들은 버지니아 역사와 미국 역사에서 전설적인 롤프-포카혼타스의 혈통을 이어 갔다. 그중 한 명이 버지니아 정치인이자 대농장주였으며 버지니아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 랜돌프였다. 그는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장손으로, 그의 어머니가 제퍼슨 대통령의 장녀였다.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영부인 에디스 볼링 골트 윌슨은 포카혼타스의 9대 손이다. 1920년대 후반에 남극을 발견했던 리처드 에버린 버드도 롤프-포카혼타스의 후손이며, 그의 동생인 해리 플러드 버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떠올랐던 인물이다. 버드 상원의원은 민주당이었지만 흑백 분리주의자로서 의회 내에서 강력한 인종주의 세력을 주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선조가 최초로 인종 간 결혼을 했던 롤프-포카혼타스임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군은 찰스타운을 비롯해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내륙 지대에서 왕당파의 적극적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1781년 후반에 영국군이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패배함으로써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잭슨 대통령 이후 이렇다 할 강력한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에 미국은 세 명의 상원의원이 사실상 각 지역의 대표자 역할을 했다. 북부를 대표하는 대니얼 웹스터, 서부를 대표하는 헨리 클레이, 남부를 대표하는 존 캘훈, 이 세 명의 상원의원이 주도하는 이른바 ‘상원 삼두정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었다. 캘훈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찰스턴은 자연스럽게 남부 주들의 정치적 일번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늦게 설립된 식민지

미합중국의 토대가 되는 13개 식민지 중에서 가장 늦게 개척된 식민지가 조지아이다.

영국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사실상의 남부 경계로 보았고, 스페인은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을 그들의 북부 경계로 여겼으며,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인근의 내륙 지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조지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지 않았다. 이 틈새를 노려 오글소프는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했고, 영국 왕 조지 2세의 이름을 따서 조지아라고 명명했다.

셔먼은 남부연합의 군수 및 병참의 중심이었던 애틀랜타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는 남북전쟁이 쉽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무려 3,000여 개의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 불타는 애틀랜타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료인 코카콜라가 애틀랜타에서 상품화되었다. 1886년에 남북전쟁 중에 남부연합의 대령이었던 애틀랜타의 어느 약사가 조지아는 물론 남부, 그리고 미국 전체의 신화를 창출했다. 그가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이다.

코카콜라의 독특한 단맛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공산주의의 철의 장막도 녹일 만큼 그 영향은 지대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곧 이은 소련 연방의 해체의 보이지 않는 힘은 코카콜라가 갖는 자본주의의 단맛이라고 할 수 있다.

킹 목사는 1963년 8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인종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하고도 호소력 있게 외치며 감동을 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탤러해시는 텍사스주 오스틴과 함께 연방군에 포획되지 않은 단 2개의 남부연합의 수도였다.

새로운 쿠바
1949년 피델 카스트로 혁명이 발발하자 수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이애미는 그 지역적 인접성으로 인해 이후 15년 동안 약 50만 명의 쿠바인들이 마이애미에 정착했다. 1980년대와 그 이후에 쿠바인들은 꾸준히 마이애미로 이주했는데 이때 건너온 쿠바인들이 약 40만 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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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는 헬라어로 ‘형제애의 도시’이다.

델라웨어강과 스쿨킬강 사이에 위치한 그 땅을 반듯한 사각형 형태로 구획해서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유토피아의 삶을 살도록 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인 셈이다.

퀘이커교도들이 이주민들의 주류였지만, 종교적 차이가 정착의 방해 요소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종교적 다양성은 필라델피아가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배경이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중심지였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독립 전쟁으로 갈 것을 결정했고, 독립 기념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채택했다.

누구나 여유롭고 안전하게 자신의 유토피아를 만끽하도록 건립했던 윌리엄 펜의 이상향은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런던이나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이 되었고,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변해 버렸다.

미국인이기 전에 뉴요커로 불리길 좋아하는 뉴욕 사람들

뉴욕은 맨해튼,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스 및 스태튼섬의 5개 구boroughs로 구성되었다. 그 중심지는 맨해튼이다. 우리가 보통 뉴욕이라 함은 맨해튼을 지칭한다.

현재 뉴욕에는 텔아비브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고, 더블린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살고 있다. 나폴리보다 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살고 있으며, 산후안보다 더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살고 있다. 800개가 넘는 언어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는 도시이며, 세계에서 외국 태생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가 뉴욕이다.

1614년, 네덜란드인들이 모피 무역을 위해 맨해튼 남단에 식민지를 세웠고 그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 영국은 1664년 9월 8일 뉴암스테르담을 강제로 점령하고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된 요크 공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뉴욕으로 개칭했다.

1765년 인지세법 회의가 뉴욕에서 열렸고, 여기서 13개 식민지 대표자들은 ‘대표자 없는 곳에는 과세가 없다’라는 원칙을 천명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1789년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과 함께 미합중국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다음 해 최초의 의회 역시 뉴욕에서 개최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국가로 위용을 드러냈다. 1931년 완공된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2층(381미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그 위용을 대변하였다. 1973년에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417미터, 415미터)이 완공되기까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서 뉴욕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온갖 편견과 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며, 미국의 성조기에 예를 갖추기보다는 그 성조기가 추구하는 자유의 가치가 담겨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뉴요커일 것이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는 미국의 도시 혹은 지역 중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다. 1789년에 통과된 미국 헌법은 ‘특정한 주들의 양도에 의해 10평방마일의 연방 수도’를 만들도록 규정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땅을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로부터 제공받아 1790년 7월 16일에 수도 건설에 착수했다.

D.C.는 컬럼비아 지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념하기 위함인데, 콜럼버스의 여성형 명사를 써서 컬럼비아라고 했다. 여기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붙여 워싱턴 D.C.라는 공식 명칭이 채택되었다.

1814년 8월 24일 영국군은 워싱턴을 점령하고 수많은 공공시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국회의사당은 심각하게 전소되었으며, 의회 도서관에 소장 중이었던 3,000여 권의 문서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재무부와 전쟁부 건물도 불에 탔고, 백악관도 탔다.

1963년 8월 28일 흑인 민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시위에 25만 명이 참가했으며, 여기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행했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에 대한 반대 시위가 워싱턴 D.C.에서 수차례 열렸는데, 그중 1969년 11월 15일에 열린 가장 큰 시위에는 무려 50만 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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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장 ‘멀고도 가까운 나라’는 어디일까? 그 1순위는 단연 미국이다. 지리적 거리로 보면 먼 나라인 것은 사실이나, 미국은 현재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매우 가깝다.

오른쪽 세로의 13개 줄은 모태가 되는 13개 주를 상징하고, 왼쪽 위에 담긴 별들은 연방에 가입한 주의 숫자이다. 1959년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연방에 합병되면서 별의 숫자가 50개가 되었다. 별이 추가될 때마다 국기는 새로 만들어져야 했다.

만약 미국 북동부 도시들 중에서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으로 한 도시만을 선택해서 여행해야 한다면 어디를 선택할까? 바로 보스턴이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국의 보스턴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보스턴차사건Boston Tea Party은 북아메리카가 독립 전쟁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775년 6월 17일에는 보스턴 민병대가 벙커힐 전투에서 영국군에 일격을 가했다. 식민지인들이 막강 영국군에 대항해서 싸울 만하다는 자신감을 일깨워 준 중요한 전투였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1947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참가한 서윤복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워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고, 1950년에는 함기용 선수가, 그리고 2001년에 이봉주 선수가 우승했다.

미국의 문학과 철학 등 정신적인 면에서도 보스턴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 19세기에 랠프 월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너새니얼 호손,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등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과 철학자들이 보스턴에서 집필을 했다.

남북전쟁 동안 연방군이 애창했던 군가인 〈공화국의 전투 찬가〉의 작사자로 유명한 줄리아 하우Julia Ward Howe가 당시에 보스턴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스턴은 사막의 오아시스다.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사랑스럽고 이성적이며 행복하다." 이후 적어도 1세기 반이 지났지만, 보스턴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반항아들의 도피처로 시작한 로드아일랜드

결국 그는 청교도 공동체에서 추방되었다. 그가 새로 정착한 곳이 ‘신의 섭리’라는 뜻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였다.

로드아일랜드의 정신은 훗날 정교분리 원칙에 근거하는 미국의 헌법과 미합중국의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크기는 작을지 모르나 독립으로 가는 길에서 로드아일랜드는 작지 않는 역할을 했다. 미국의 역사는 로드아일랜드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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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이 여기도 있다.

"역사의 필연은 바꿀 수 없어. 말릴 수도 없어." 다카유키가 말했다. "그걸 뼛속 깊이 인식한 아버지는 자신과―자신의 명예와 나와 다마코에 대해 생각하셨겠지."

"터무니없는 전쟁의 길로 걸어가던 당시 일본 육군 안에도 이 정도로 앞을 내다보고 군부의 독재를 걱정하며 경고를 보냈던 인물이 있었다―그런 명예를 아버지는 얻으려 한 거지. 사후의 명예라 해도 이만한 명예가 어디 있겠나."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딱 한 방울이었지만 다카시의 뺨을 타고 흘렀다.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역사는 그 사실을 안다. 어쩌면 한두 명, 또는 열 명 정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미리 손에 얻은 결과를 토대로 처신할 길을 함께 고민한다 해도, 그건 역시 세부의 수정에 불과하다. 열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꼴이 된다.

"이제 전쟁이 온다고. 앞으로 군부에 의한 진짜 독재가 시작되고 테러나 또 다른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정치가와 의회는 명색뿐인 무기력한 존재로 영락하여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외쳐 볼까."

다카시는 아무 대답 않고 팔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난 무서워." 다카유키가 중얼거렸다. "무서워서 외치지 못해."

"아버지가 남긴 그 문장은 지저분한 새치기의 집대성이야."

"새치기?"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미래를 봤어. 결과를 알았다고. 미리 알고 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간 사람들이 앞으로 이룰 일들을 비판한 거야. 아버지 혼자만 변명거리를 준비한 거지. 이게 새치기가 아니라면 뭐가 새치기겠어?"

눈길을 요란하게 통과하는 전차와 군화의 울림, 기름 냄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그 광경을 떠올리며 다카시는 한 가지 커다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나도 가짜 신에 불과하다―.
2·26사건은 끝났다.

"가모 대장에게 미래를 보여 줬고, 대장의 생각이 바뀌었고, 대장이 후세를 위해 육군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다소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했어. 자신은 그 뒷마무리를 해야 한다더군. 그 일로 죽게 되겠지만 이미 살 만큼 살았다며 웃었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구로이는 약속대로 왔습니다. 도련님께 전해 주세요.
―아가씨, 행복하세요.

문득 히라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가짜 신의 어쩔 수 없는 업보지.

후키가 미소를 지으며 다카시의 팔을 잡더니 살며시 흔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원대原隊로 돌아가라."
"네?"
후키가 웃으며 말했다. "삐라에 씌어 있었죠?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다카시 씨는 나랑 다른 부대의 군인이에요. 게다가 신병이에요. 돌아가야죠."

시간은 지나며 흔적을 남긴다
타르코프스키 <희생>

"나 말이야, 과거를 보고 왔거든. 덕분에 알게 됐어. 과거는 고쳐 봐야 소용없고 미래는 고민해 봐야 쓸모없다는 걸 말이야.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나, 더욱 똑바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변명 같은 거 안 해도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아빠는 배우지 못했지만 지금껏 있는 힘을 다해 살아 왔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안녕히 주무세요―그렇게 말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다카시를 다이헤이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내일이 되면 방금 전 대화를 꿈이라 여기고 잊어버리겠지.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 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 차림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 웃는 후키. 차가운 손의 감촉. 눈에 뒤덮인 가모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 쉬는 장소.

거기에선 지금도, 오도카니 서 있는 후키의 머리카락에, 어깨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 쇼와 11년 2월 26일의 눈이 내리며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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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시내의 교차점에서 오사카 사단 군인이 적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려 했는데, 순사가 꾸짖으며 주의를 줬다네. 그 일로 인해 황군의 위신이 떨어졌다며 다툼이 일어났지."

"군과 경찰이 어중간한 꼴로 화해했지. 원래 ‘화해’할 만한 성질의 사건이 아닌데 말이야." 가쓰라기 선생이 얼굴을 찡그렸다.

"세상의 흐름이라는 거지."

그 흐름의 끝에 길고 비참한 태평양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이곳에 있는 게 끔찍해진다. 얼른 현대로 돌아가자고 떼라도 쓰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무리다―히라타가 쓰러져 버렸으니까. 게다가 후키도 구해야 한다. 그걸 잊어선 안 된다.

"‘중국일격론中国一撃論’이야."

"네?"

"쉽게 말하자면 중국 따위는 일격에 평정할 수 있다, 진짜 적은 북방의 소련이라는 의견일세. 가모 대장 각하도 병으로 쓰러지기 전엔 이 주장의 지지자였지만, 쓰러지시고 난 후 마음이 바뀐 모양이더군.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교관인 뒤쪽 저택 주인은 그런 각하를 변절자라며 호되게 비난해서 말이야."

"뭐야 그게……, 그럼……."

다카유키는 마리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집 안에 있다는 말이죠."

"총성이 들렸을 때, 우리는―나랑 요시타카 씨는 함께 방에 있었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난 모델이었고. 다카유키가 전하러 와서, 그래서 알게 된 거야."

"그럼 총성을 들었다는 거네요?" 다카시가 반문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여기지 않았나요?"

"지방인이란 게 뭔가요?"

"아, 결국 민간인이라는 얘기야. 군인 이외의 인간 말일세."

다소 낮춰 부르는 듯한 표현이다. 군인의 대단함에 비하자면 나머지 사람들은 바깥에 있다는 얘긴가. 그런 태도로 대장은 요시타카와 지냈고 요시타카는 형에 대해 굴절된 증오의 감정을 품었다―.

―죽을 때 죽지 못해 욕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군인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더군. 난, 경솔하게 자결이라는 길을 택하시면 안 된다, 그것만은 약속해 달라고 말씀드린 후에 대답했네."

자결할 게 분명한 인간을 일부러 죽일 바보는 없다.

다카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 쳤다. 역시 즉흥적인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구나―.

순간 거울 속 얼굴의 웃음이 지워진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결할 인간을 죽일 바보는 없다―정말 없을까. 그런 케이스는 전혀 가정할 수 없는 걸까.

다카시가 사는 ‘현대’에선 분명 가정하기 어렵다. 상당히 힘들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더 이상 ‘자결’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자살’은 있어도 ‘자결’은 없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지에가 딱 잘라 말했다. 노인의 얼굴에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면 좋지 않아’라며 타이르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다.

‘이 난로―?’

생각났다, 트립에 실패해서 쇼와 20년 5월 공습의 한가운데 떨어져 버렸을 때 일이.

그때 가모 저택은 불타고 있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인데도 안쪽에서 불을 내뿜고 있었다. 그로 인해 후키가 죽었다. 잊을 리가 없다. 새카맣게 눌어붙은 그녀의 손이 다카시를 향하던 그 순간을.

가모 대장의 유령 말이에요.

아니다. 유령이 아니다. 이젠 단언할 수 있다. 프런트맨이 본 건 살아 있는 가모 노리유키 대장이다. 살아 있는 가모 대장이 히라카와초이치반 호텔에 나타나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모님은 여기에 왔었어요. 그리고 이모님의 힘으로 가모 대장은 미래에―현대로 트립했죠. 그렇죠? 가모 대장은 미래를 봤죠?"

그래서 병을 앓고 난 뒤 사상이 일변하게 됐다. 요시타카가 감탄스럽다는 어조로 말하지 않았던가. 형님도 상당히 생각이 바뀌셨군. 그렇다. 바뀌고 말았다. 육군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과거에 자신을 숭앙하던 황도파 장교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한 결과 테러리스트에게까지 위협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미래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양상을, 전쟁의 결과를, 일본의 장래를, 일본군의 종말을 모두 알게 되어 사상도 사람도 바뀌고 만 것이다.

다카시를 바라보던 히라타의 눈꺼풀이 처지면서 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능한 한 크고 분명하게, 다카시가 충분히 알아볼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총을―."
다카시는 뒤돌아봤다. "네?"
"총을, 조심, 해." 히라타가 말했다.
"누군가, 가지고 있어. 조심, 해."
그의 얼굴에 웃음은 지워져 있다. 그는 진지했다.

"잘 들어 보게. 각하는 자결하셨어. 유해 옆에는 자결에 쓰인 권총이 나뒹굴었고. 목격자는 충격 속에서 그 권총이 다른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무기임을 깨달았겠지. 다시 말해, 각하의 자결로 충격을 받은 누군가가 마음속에 비수를 품고 자신의 결의를 달성하기 위해 현장에서 권총을 들고 사라진 거야. 가능한 얘기 아닌가?"

역사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가능한 건 세부의 수정뿐.

그렇다. 다카시가 태연스레 의사당으로 찾아가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결기 부대 앞에서 그런 얘기를 떠들어 봐야 헛일이다. 결국 총에 맞아 죽어 쇼와사史의 2·26사건 항목에 "사건이 한창인 가운데 민간인 사상자가 한 명 발생하였다"고 덧붙여질 뿐이다. 시간 여행이라는 건 실로 유쾌하지 않은가.

2·26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무력을 지닌 군부의 국정에 대한 발언권이 강해졌고, 이내 일본은 군부 독재에 의한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그렇다, 나는 지금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다. 전차가 팬터그래프를 바꾸듯, 쇼와 역사도 진행 방향을 결정하고 이제 전철기轉轍機를 바꾸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무리 분위기가 밝다 한들, 청년 장교를 응원하는 공기가 흐른다 한들, 쿠데타에 희망을 건 시민이 존재한다 한들, 역사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유럽과 아메리카는 지들은 실컷 제국주의적 침략을 해 온 주제에, 잘난 척 정의의 가면을 쓰고 아시아 문제에 개입하고 있네. 만몽滿蒙 문제도 그래. 리턴 보고서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에 우리 측 해명은 전혀 실리지 않았잖아? 시찰하기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났지. 지금 우리 나라와 독일은 전 세계의 악역을 떠맡은 듯한 느낌이 든다고."

"그런데 말이야, 전쟁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단 말일세. 전쟁이란 일종의 외교 수단 아니겠나? 제대로 된 목적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어야지 전쟁도 의미가 있는 걸세. 그러나 작금의 군인은 의미 따위 전혀 모르고 있어. 요시타카 씨가 그랬지. 군인은 주먹만 휘두르는 바보라고. 나름 이치에 맞는 얘기라 생각하네." 의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의 인품과는 별개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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