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이 여기도 있다.

"역사의 필연은 바꿀 수 없어. 말릴 수도 없어." 다카유키가 말했다. "그걸 뼛속 깊이 인식한 아버지는 자신과―자신의 명예와 나와 다마코에 대해 생각하셨겠지."

"터무니없는 전쟁의 길로 걸어가던 당시 일본 육군 안에도 이 정도로 앞을 내다보고 군부의 독재를 걱정하며 경고를 보냈던 인물이 있었다―그런 명예를 아버지는 얻으려 한 거지. 사후의 명예라 해도 이만한 명예가 어디 있겠나."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딱 한 방울이었지만 다카시의 뺨을 타고 흘렀다.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역사는 그 사실을 안다. 어쩌면 한두 명, 또는 열 명 정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미리 손에 얻은 결과를 토대로 처신할 길을 함께 고민한다 해도, 그건 역시 세부의 수정에 불과하다. 열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꼴이 된다.

"이제 전쟁이 온다고. 앞으로 군부에 의한 진짜 독재가 시작되고 테러나 또 다른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정치가와 의회는 명색뿐인 무기력한 존재로 영락하여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외쳐 볼까."

다카시는 아무 대답 않고 팔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난 무서워." 다카유키가 중얼거렸다. "무서워서 외치지 못해."

"아버지가 남긴 그 문장은 지저분한 새치기의 집대성이야."

"새치기?"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미래를 봤어. 결과를 알았다고. 미리 알고 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간 사람들이 앞으로 이룰 일들을 비판한 거야. 아버지 혼자만 변명거리를 준비한 거지. 이게 새치기가 아니라면 뭐가 새치기겠어?"

눈길을 요란하게 통과하는 전차와 군화의 울림, 기름 냄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그 광경을 떠올리며 다카시는 한 가지 커다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나도 가짜 신에 불과하다―.
2·26사건은 끝났다.

"가모 대장에게 미래를 보여 줬고, 대장의 생각이 바뀌었고, 대장이 후세를 위해 육군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다소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했어. 자신은 그 뒷마무리를 해야 한다더군. 그 일로 죽게 되겠지만 이미 살 만큼 살았다며 웃었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구로이는 약속대로 왔습니다. 도련님께 전해 주세요.
―아가씨, 행복하세요.

문득 히라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가짜 신의 어쩔 수 없는 업보지.

후키가 미소를 지으며 다카시의 팔을 잡더니 살며시 흔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원대原隊로 돌아가라."
"네?"
후키가 웃으며 말했다. "삐라에 씌어 있었죠?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다카시 씨는 나랑 다른 부대의 군인이에요. 게다가 신병이에요. 돌아가야죠."

시간은 지나며 흔적을 남긴다
타르코프스키 <희생>

"나 말이야, 과거를 보고 왔거든. 덕분에 알게 됐어. 과거는 고쳐 봐야 소용없고 미래는 고민해 봐야 쓸모없다는 걸 말이야.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나, 더욱 똑바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변명 같은 거 안 해도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아빠는 배우지 못했지만 지금껏 있는 힘을 다해 살아 왔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안녕히 주무세요―그렇게 말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다카시를 다이헤이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내일이 되면 방금 전 대화를 꿈이라 여기고 잊어버리겠지.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 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 차림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 웃는 후키. 차가운 손의 감촉. 눈에 뒤덮인 가모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 쉬는 장소.

거기에선 지금도, 오도카니 서 있는 후키의 머리카락에, 어깨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 쇼와 11년 2월 26일의 눈이 내리며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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