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 주위는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김제·만경의 곡창지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둠벙 파놓으면 개구리 뛰어든다‘는 옛날속담처럼 쌀이 있는 곳에는 문화가 발달하고 사람이 모이게 마련인가 보다.

화두...... 글자 그대로 말의 머리만 있지 꼬리는 감추고 없다. 머리만 힐끔 보고 몸통과 꼬리를 한눈에 파악해야 한다.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화두이다. 비논리를 가지고 논리를 깨는것이 화두이다. 원효가 역작 『기신론소起信論』에서 제시한 의언진여依言眞如(언어에 의지해 진리를 표현함)의 세계에서, 이언진여難言眞如(언어를 떠남으로써 진리를 표현함)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화두이다.

"달다.……………."
전강이 휘두른 이 한마디는 지혜 제일의 검객이 보여준 초식이다.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한칼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이 화두는 중생의 삶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가없이 너른 들녘은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사의 광야이니 그곳으로 사방에서 붙어오는 불길은 생로병사의 불이요, 우물은 황천이며,
미친 코끼리는 무상한 살귀鬼요, 나무는 사람의 몸이며, 칡넝쿨은사람의 목숨이고, 검은 쥐 흰 쥐는 해와 달이요, 세 마리의 이무기는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며, 네 마리의 뱀은 지·수·화·풍 사대이다. 꿀은 오·욕·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서산이 옳은 것인가, 진묵이 옳은 것인가? 동포가 왜놈의 칼날에 처참하게 살육당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진묵은 저 혼자 살자고 산속에 숨어버린 도피주의자란 말인가? <미션>에서 평화의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칼을 잡고 돌격하는로버트 드 니로.......

나의 머릿속에는 서산과 진묵의 극단적인 인생행로가 한꺼번에몰려들었다. 서산은 칼을 들고 산에서 내려온 셈이고, 진묵은 그냥청산에 머물렀다. 시뻘건 피를 튀게 하는 칼이 색이라면, 청산은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색과 공이 이처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전쟁이 일어날 때이다. 피와 칼과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다. 눈앞에 칼이 들어오는데 과연 이것이 환상이고 공인가. 칼이 들어오는현실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가, 아니면 도망갈 수밖에 없는가.

그래서 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겹쳐보았다. 그리고 진묵의 행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커다란 사건 하나를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3년 전, 그러니까 기축년(1589)에 김제 금구에서 발생한 ‘정여립 역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정여립과 관련돼 걸려든 사람이 수천 명이고, 그들 중 사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은 사람만 해도 대략 1천 명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누구의 표현대로 ‘조선의 광주민주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좌절은 종교적 천재를 낳았다. 진묵이라는 천재가 없었다면 상처받은 민초들은 어디로 가서 위안을 얻었을 것인가! 임금에게서 위안을 받을 것인가, 사또에게서 위안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미쳐 버려야 한단 말인가? ‘진묵 신앙‘은 상처 치유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승려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경상도는 정치인이 많이 나고,
전라도는 도인이 많이 나온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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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 물리지 않으려면 목 있는 등산화의 착용은 물론이고 보신탕이라는 음식은 멀리할 일이다. 뱀은 보신탕 좋아하는사람을 잘 문다고 한다. 왜냐하면 뱀이 개고기 냄새를 좋아하니까.

그러기에 산에 갈 때는 개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개는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신명계를 볼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걸 먹고 산에가면 산신령이 좋아하지 않는다. 아예 애초부터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이태가 쓴 남부군을 보면 회문산에서 내려오던 남부군의 일부가 변산으로 들어온 것으로 돼 있는데, 이때를 전후해 변산 일대는남부군과 군경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청림사·실상사·의상암·청련암·묘암사·도솔사 등 근방의 유서 깊은 명찰들이 모조리불타버리는 참화를 겪었다.

남부군이 들어왔다면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때 불사의방도 같이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한 젊은이가 불사의방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인근 사람들의 구전으로 미뤄,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는 있었다고봐야 하기 때문이다.

불사의방에서 변산 일대를 조망하면, 변산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들어온다. 그런가 하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의 풍경은 고만고만한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잘 다듬어놓은 녹색의 융단처럼 보여 황홀하다. 이 황홀함은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마비시키고 만다. 여기에서는모든 걸 잊고 ‘한번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사람을취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표율사는 실제로 불사의방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치의 아름다움에 매료돼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불사의방을 찾아올 때 진리를 위해서목숨도 버리겠다는 위법망구爲法忘의 각오를 하고 왔음이 틀림없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가 되어준 어머니의 산
모악산으로 간다. 어머니의 산이다. 오갈 데 없는 민초들이 몰려들었던 산. 민초들의 산이면서도 우리 역사의 전환기 때마다 중요한역할을 담당했던 산. 어머니 품같이 포근한 모악산에는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금산사는 599년 창건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사찰 아니면 남아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해마다 중장비로 산을 허물어 길을 내고 아파트를 짓는다. 전국의 산수 좋은 곳은 여관이나 가든이 들어서 있다. 어떻게 하다가 우리는 이렇게 천해지고 박해졌는가. 선인들은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라고 읊었지만, 최근의 몇십 년 사이에 ‘산천도 박살 나고 인걸도 간데없네‘가 돼버렸다.

금산사의 키워드는 바로 ‘뿌리‘이다. 정신의 뿌리이다.

이李자를 분석하면 나무 목木에다 아들 자子이다. 나무가들어간다. 그러므로 이씨는 목木에 해당한다. 이씨 왕조는 목에 해당하는 왕조라서 목을 극剋하는 금을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오행의상생상극 이치로 볼 때 금이 많으면 목 기운을 받은 이씨 왕조가 다치게 된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금체 형국의 마이산을 ‘금을 묶어놓는다‘는 뜻의 속금산으로 바꾸어놓았다. 지명도 그렇다. 원래 ‘금포
‘라고 읽던 것을 ‘김포‘로, ‘금해‘를 ‘김해‘로, 김씨 성을 ‘금‘에서 ‘김‘으로 바꾸어 발음하게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음양오행의 세계관에서 볼 때 이씨 왕조가 금을 싫어한 것은 당연했다.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말은 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인자한어머니처럼 잘난 자식뿐만 아니라 못난 자식도 가슴에 품는다. 품을수 있는 포용력이 오갈 데 없는 민초들을 받아들였다. 일제에 의해서 나라가 망했을 때도 전국의 민초들이 이 산에 모였다. 동학·증산교·원불교가 모두 모악산과 관련이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다.

참회하라, 그러면 미륵을 볼 것이다! 회개하라, 그러면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진표율사의 신령스런 권능이 어려 있는 곳이 금산사인 만큼, 이후로 금산사 미륵전은 한국에서 가장 영험한 미륵 도량으로 자리 잡는다. 미륵을 만나려면 금산사로 가야 한다.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에는 신비에 싸인 비결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비결을 꺼내는 순간 벼락을 맞는다는 금기가 서려 있어 아무도 꺼내보지 못했다. 세월은 흘렀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 1893년 가을, 동화도 3백여 명이 도솔암 마애블의 비결을 꺼내기 위해 도솔암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절실했다. 미륵 마애불에서 천고의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은 전라도 지역을 휩쓸었다. 3개월 뒤, 전주 감영으로 몰려간 양인의 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

출세란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는 뜻
‘출세‘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세간을 떠난다‘는 뜻이다. 국회의원 되고 판사 되는 것이 출세가 아니고, 세속을 떠나는 것이 출세의 원래 의미이다. 출세는 ‘출세간의 한가함‘을 지향하던 불교에서 온 말인데, 조선 시대의 입신양명 제일주의를 거치면서 본래의뜻이 왜곡돼버린 것이다.

‘출‘ 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뫼산자 위에 또 뫼 산 자가 겹쳐있다. 산 위에 산이라는 뜻이다.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출세이다. 그러나 입산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산으로 들어갈 수있는 자격은 자의든 타의든 세간의 업장이 소멸해야 주어진다. 실직자들이 산으로 모여드는 이치도 타의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지 직업이라고 하는 하나의 업이 소멸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검단 선사는 선운사 주변 민초들 사이에서칭송을 받았고, 그는 절벽에 미륵의 모습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애불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 비결이 세상에 출현하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그 비결과 함께 벼락살을 밀봉해놓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려고 손을 대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했다.

벼락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사실이 실제 드러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백 년 전 전라 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가 그것을 꺼냈을 때였다.

이 비결이 출현하는 날 한양이 망한다고 함은 곧 조선이 망하는것을 의미하는데, 갑오농민전쟁 때 이 설화가 난무했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이 도솔암 미륵불의 배꼽에서 손화중孫華仲이  비결을 꺼냄으로써 촉발되었다.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를 보면  도솔암 미륵불의 비결을 꺼내기위해서 손화중포包에 소속된 동학의 접주들은 참모 회의를 연다. 논의의 핵심은 벼락살이었다.

"이제 열어볼 때가 되었으니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때가 돼서 열어보는데 어떻게 벼락이 칠 수 있겠느냐는 비장한 시대 인식이었다. 여기서 ‘때‘는 비결을 꺼내서 한양이 망해도 좋을 만큼 당시 민중이 지배 체제의 폭정과 수탈에 극도로 시달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890년대를 살던 조선의 민중, 특히 전라도 민중은 지긋지긋한 세상을 그만 끝내고 좋은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는 ‘개벽‘의 희망을 도솔암 미륵불에게 걸었다. 잘못된 사회를 엎어버리는혁명의 비결은 도솔암의 미륵불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화중에 소속된 수백의 동학도들이 배꼽 비결을 꺼내러 간 때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가을이었다. 비결을 꺼낼때 동학도들은 청죽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가져가 미륵불전면에 사다리를 설치했다. 미륵불이 절벽의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대나무로 만든 임시 가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록에 보면 선운사승려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수십 명의 승려를 새끼로 묶어놨다고 했으니, 비결을 꺼내는 과정에서 동학도 측과 선운사 측의 충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몰려간 동학도는 3백여 명이었다.

도끼로 배꼽을 부순 뒤 과연 고대하던 비결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고는 하나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손화중포에서미륵불에 감춰져 있던 천고의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었다.

천지개벽의 비결을 동학도가 입수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전해졌다.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손화중포에는 수개월사이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갈 곳 없던 사람들이 희망을발견하고 그야말로 구름같이 몰려든 것이다. 그만큼 미륵 비결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대단했다.

위로와 치유의 기도처 도솔암 이야기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면 종교의 힘은 기도발에서 나온다. 기도에대한 하늘의 응답이 기도발이다. 사업 잘되고 승진하고 병 낫는 게기도발이다. 나는 기도발이 존재하는 한 종교는 유지될 수 있다고생각한다. 고등 종교이든 하등 종교이든 간에 모든 종교의 기초에는기도발이라는 게 깔려 있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지몽매한 관념주의를 없애버리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원인도기도발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화엄경』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만든 것"으로 보고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관념의 투사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죽어야 끝이 난다. 싫든 좋든 봐야만 한다. 스크린의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중생은 일희일비, 웃다가 울다가 병들면서 죽는다. 보다가 재미없다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다. 비상구마저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눈앞에서 전개되는현실에 붙잡혀 살 수밖에 없다. 오로지 현실에 붙잡혀 있다. 꼼짝도못 한다. 쥐덫에 걸린 것처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발광하는 고양이처럼. 그놈의 현실! 현실은 과연 진짜인가!

인생! 이것은 대몽大夢이다.  관념의 투사에서 비롯된 환상이라는것을 알아채기 전에는 말이다. 꿈을 깨고 난 뒤에는 꿈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깨기 전까지 꿈은 지독한 현실이다.

승려들이 자나 깨나 화두를 잡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신 집중의연습이다. 해인사 성철 스님이 생전에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고요할 때를 막론하고 화두가 생각남),
오매일여悟昧一如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화두가 생각남),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도 화두가 생각남)를  항상 강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만약 딴생각하면서천도재를 지낼 경우에는 귀신이 오히려 승려의 뺨을 때릴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귀신이 그 틈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키워드는 용이었다. 그리고 이를 고대사회의 신앙과 관련지어보았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용을 숭배해왔다. 요즘 사람들에게야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고대인들에게 용은 분명히 실존하는 영물이었다. 용을 숭배한 이유는 용이물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는 농경 사회이고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가뭄이 들면 농사를 망치기에 비를 내려주는 용이야말로 농사짓는사람들에게 절대의 신일 테다.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농사가 안되고농사가 안되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이니, 비와 물을 주재하는 용은 신으로 대접받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미륵사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하나는창건 당시부터 미륵사의 정문 앞에 연못을 조성해 용이 살 수 있는공간을 남겨놓은 점이고, 또 하나는 금당 밑으로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일부러 수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금당에는 미륵불을 대좌 위로 모셨고, 그 밑으로는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수로를 연결해놓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용미륵卽용은즉 미륵이다)을 상징한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용은인간이 수행해서 범인의 상태를 벗어나 사차원의 세계로 진입했을때 그때 비로소 맞닥뜨리게 되는 동물이라고 한다. 근래에 용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실감 나게 적은 것은, 현대에는 물질세계에만 급급해 정신세계에 들어간 고단자가 드물다는 방증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용을 쫓아내기 위해서이다. 용과 숯은 서로상극 관계라고 한다. 닭과 지네, 새우젓과 돼지고기, 지푸라기와 해삼이 서로 상극 관계이듯이, 제아무리 용이라 한들 시커먼 숯을 만나면 꼼짝 못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용은 물이 있어야 노는데, 숯은 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는 작용을 하니 숯을 싫어할 수밖에.

꿈틀거리는 용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선인들의 작명 솜씨에서 풍기는 미학과 경륜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나는 언제나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라는 소아병에서 벗어난 사람은 대자연 속에 자신을 넣어 동화시킬 수 있고, 그 동화는 거대한 풍경을 다시 자신의 손바닥 안에 축소시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대자연과 자신을 하나로 합일시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이와같은 시적인 작명을 할 수 있으리라. 비룡망해의 용머리에 올라타고있는 유선사. 그 오른쪽 날개에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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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게 도대체 왜 천지창조야? 천지창조 하는 데 사람이 저렇게 많이 필요했어?’

치유키가 딴지를 걸자,

‘저 정도면 사람 적은 거 아냐? 세상을 만드는 데 고작 저 정도로 되겠어? 저기도 업무 빡빡했겠다.’

"하지만 안타깝지 않은 죽음은 거의 없지. 이곳에서의 죽음은 더더욱. 도시의 유지를 위해 모두가 삶의 반을 노동에 쏟아. 삶을 위해 삶을 버리는 거야. 평생 쳇바퀴 속에서 달리는 거지.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죽음뿐이야. 원래는 지구의 유기체가 하던 일을 이제 인간이 하는 거란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계속 돌려야만 해. 그럼 죽음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니? 쳇바퀴를 벗어나 자유로 나가는 일. 어때? 좀 부러워지지 않니?"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강약 조절이 필요하지.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지낸다고 약속만 해주면 그만이야. 어때, 너그럽지?

그것이 망가질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거야. 어떤 이는 밤하늘과 숲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런 인간들이 모여 또다시 끔찍한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 행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지하 도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출구를 지키던 문지기였을까.

소마, 나는 우리가 이끼였으면 좋겠어.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바위틈에도 살고, 보도블록 사이에도 살고 멸망한 도시에서도 살 수 있으면 좋잖아. 고귀할 필요 없이, 특별하고 우아할 필요 없이 겨우 제 몸만한 영역만을 쓰면서 지상 어디에서든 살기만 했으면 좋겠어. 햇빛을 많이 보기 위해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물을 마시지 못해 메마를 일도 없게. 그렇게 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거야. 시시하겠지만 조금 시시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 애를 놓지 않는다.

절대로.

"우리 다시 다 함께 별을 볼 수 있는 거지?"

『이끼숲』을 통해 사실상 많은 것을 구했다. 「이끼숲」에서 그러했듯 유오와 소마를 구했다. 흩어질 사랑을 구하고, 슬픔에 잠길 한 사람을 구했다.

숙고를 거듭해 연작으로 이어 쓴 「바다눈」과 「우주늪」에서는 「이끼숲」에서 지하 도시에 남겨진 친구들을 구했다. .

같은 시간이 아님에도 그들이 나눈 어떤 행복한 순간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또한, 작가는 자신이 그려낸 세계 또한 위험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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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커커스는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돌아가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니."

"바다와 땅?"
"모험과 도망."
하나는 대범했고 하나는 조급했다.
"발견과 추방."
하나는 위대했고 하나는 초라했다.
"미지의 세계와 타락한 세계."
하나는 신비로웠고 하나는 두려웠다.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우리의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웠다.
"이런 걸 산송장이라고 한단다."

닫힌 세계라서 이길 수 없었다는 커커스의 말을 달리하자면,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가능했을 거란 말이었을까. 이곳에 하늘이 없고, 건너갈 바다가 없고, 숨을 동굴이 없어서 백기를 들어야 했다는 말이었을까.

저 위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하면 되는 세상이었나.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옮겨가고, 위험하다 싶으면 멈추고, 잘못됐다 싶으면 돌아갈 수 있는. 역시나 살아보지 못해 알 수 없었다.

그날 할라가 가져온 소식은 회사의 부도 소식이었다. 회사가 새로운 이름으로 재설립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썼던 계약서는 이전 회사의 계약서였으므로 필요 없는 종이 쪼가리이지만 새 회사는 하루아침에 회사를 잃은 근로자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 전부를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전 회사와 약속했던 임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다.

마르코에게는 일 년 전과 다를 것 없는 새 계약서만이 남았다. 항간에는 새 이사장이 이전 이사장과 아는 사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친척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새 회사에 불만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논리 앞에 굴복하지 않을 노동자는 없었다. 마르코도 그랬다.

하지만 노래가 끝난 뒤에도,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그친 뒤에도 마르코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았다. 패드 속 지상의 세계에선 눈이 내린다. 비인가, 먼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매번 문장을 쓸 때마다 건축하는 마음으로 해. 나는 건축도 뭔지 잘 모르지만, 이 지하 도시와 같은 거 아니겠어? 무너지지 않게, 헷갈리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내 자유는 보장받지 못했단다. 너는 네 자유를 당연하게 느끼겠지만, 아니야. 누군가가, 아마도 이곳의 통제와 정책이 너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을 뿐이야.

지상에는 두 종류의 동물이 있었대. 울타리 안에 사는 동물과 울타리 밖에 있는 동물. 그 둘은 절대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다고 해. 이해하지도 못하고, 섞일 수도 없는. 고작 울타리 하나뿐인데 그걸 둘 중 누구도 영원히 넘지 못했다더라.

그날, 내게 글을 가르쳐주던 치유키가 말하더라.
글을 알면 뭐가 생기는지 알아?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곧장 답을 알려줬어.
싸우는 힘.

내가 무엇과 싸울 수 있을까? 의주야, 너는 내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니? 내 순서가 있기는 할까? 싸운다는 건 말이야, 상대방의 힘이 나와 비슷할 때 가능한 거라 믿었거든. 근데 그때 치유키의 말을 들으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주 조금 설렜어. 내 소원 중 하나가 싸워보는 거거든.

그러니 이제 그 선물을 다시 뺏어갈까 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릴 거야. 의주야, 네가 선택된 것은 멍청한 부모 덕이겠지만 내가 바깥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내가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건 네 탓도, 부모 탓도 아니야. 머리에 칩이란 걸 심을 생각을 한 머저리들이 죄란다. 그러니 더는 눈치보지 마.

이제 이 글을 남기는 이유를 너에게 정확히 말해주어야겠지? 몇 달 전 나한테 신기한 일이 생겼어. 여느 때처럼 배관 통로를 지날 때였어.
여기로 가면 냉동실, 위험.
이라고 썼던 글자 아래 누군가 이렇게 써놨더라고.
고마워요.
나는 멍하니 그 글자를 보았어.

그토록 답답하고 억울해도 나오지 않던 울음이 그날 나왔어. 나 말고 누군가가,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누군가가, 세상의 늪에 빠져버린 누군가가 또 있구나. 나에게 해야 할 게 생겼어.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어. 가끔 통로에서 이전에 없던 바람의 흐름이 느껴져.

조심해. 어쩌면 이곳, 붕괴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진화에서 인간이 더 강했던 거야. 강해서 많아진 것뿐이고. 절대적인 숫자가 많아지니 자리를 더 차지하게 된 거지. 무엇이든 똑같아. 그게 이기적으로 보여?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게 인간뿐일까? 살기 위해 다른 식물의 몸을 휘감고 올라타서 광합성하기에 우위를 차지해 다른 식물을 천천히 말라죽이는 덩굴식물도 있대. 다른 식물을 죽이며 자란다고 해서 교살 식물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어. 식물도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라. 살기 위한 경쟁은 언제나 잔인할 수밖에 없어.’

이 년 넘게 그 무전을 들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다. 사고를 당해 죽은 노동자 중, 누구도 제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모두 얼른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뿐이니까.

이끼가 처음 등장하고 그로부터 일억 년 후, 관다발식물이 등장해 지표면에 붙어 퍼지는 이끼와 다르게 하늘로 솟아오르며 광합성을 시작했다.

고생대 데본기에 들어선 뒤에야 흩어져 있던 식물들이 군집을 이룬 숲이 등장했다. 고생대 초창기에는 커다란 고사리류가 이끼와 함께 지구를 뒤덮었다가, 고사리류는 버티지 못하고 멸종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침엽수 수목들이 대신하고 꽃은 더 나중에야 등장한다.

식물의 생태는 침묵 속에서 그 어떤 생태보다 소란스럽게 격변했다.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숱한 개체가 탄생과 멸종을 반복했고, 식물의 사체에서 또 다른 개체가 근본 없이 생겨나는 동안 이끼는 가장 낮은 곳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축축한 틈 곳곳에 머물고 있다. 멸종되지 않고.

실제로 그 팀원은 그런 취미 몇 개를 보유한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가 죽고 나서야 그것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용하게 뻗어나가는 나무의 뿌리를 떠올린다. 인간 몇십 명이 붙어 뚫는 땅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가르는 뿌리는 지구의 진정한 지배자답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나갈 구멍이 있긴 있다는 거구나. 너는 그걸 알고 있고."

모든 생명이 각자 자신만이 가진 방식으로 지구를 살고 있었어. 인간이 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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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생각을 할까 해. 소용이 없더라도 말이야.

만약 네 앞에 아몬드가 있어.
근데 이게 독이 있는 야생 아몬드인지,
독이 없는 아몬드인지 몰라.
그럼 너는 어떡할 거야?
그 아몬드를 먹어볼 거야?

노래가 들려온 건 제작실 서문 쪽에 있는 반 층짜리 계단 아래였다.

마르코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 순간 노랫소리는 멈췄고 미닫이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소녀가 있었다.

그것이 열다섯, 동갑내기인 소녀와 마르코의 첫 만남이었다.

계단 밑에 마련된, 다섯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세탁된 옷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제작된 클론이 입는 옷이라고 했다.

소녀는 마르코와 같은 용역업체에서 배정된 경비원이었다.

소녀는 마르코가 자신과 같은 업체 소속이고 심지어 입사일이 같다는 것에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고초를 토로했다. 소녀의 이름은 ‘으니’였다.

어리숙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마르코에게 ‘어렵지? 하다보면 노련해질 거야’라고 말이다. 마르코는 그 말이 참 힘이 되었는데, 으니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발바닥에 불나는 거, 아무나 할 수 있잖아."

그날 마르코는 으니의 목소리가 좋았다고, 노랫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으니’가 아니라 ‘은희’라는 건 한참 뒤에야 의주를 통해 알았다.

"스타일이. 평소보다 더 힘줬는데."

"똑같은데."

한때 음식이 인간에게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들었다. 인간이 지상에 살던 시절에 말이다. 배고프지 않아도 늘 무언가를 씹었고, 음식을 남기는 일이 있더라도 오로지 본인의 만족을 위해 식탁을 가득 채웠으며 음식에도 유행이 있었다는데 음식을 즐긴다는 것이, 그것이 행복이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마르코는 영 와닿지 않았다.

말을 더 얹으려던 은희는 숨을 차분히 내뱉더니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건 먹는다는 표현보다 넣는다는 표현에 더 잘 어울리는 행위였다.

보통 열다섯 살이 되면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마련된 집으로 갔다. 그 집이란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배정되는 집을 말했다. 지하 도시 특성상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주거용 건물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인구가 늘어 포화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십 년 간격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집을 배정했는데, 이는 부부의 출산 계획을 위원회에 전부 보고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쯤 아이를 가질 거라는 계획서에는 자산 규모 역시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는 자산 규모가 기준을 넘지 못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게 십 년 동안 태어날 아이의 숫자는 정해졌다. 그 정책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예정 없이 태어난 갓난아이를 데리고 가 어떻게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도망친 부부가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도.

"바다눈이야."
은희가 말했다.
"이 음료 이름."
음료의 푸른색을 가리키며.
"이건 바다."
그리고 그 안에 떠다니는 흰 점을 가리키며.
"이건 눈."
"바다에 눈이 왜 내려?"

"바다눈이라는 건, 커다란 바다 생물의 사체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나 미생물이 눈처럼 내려서 붙여진 이름이야. 죽음의 잔해라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먹는 건 고래의 똥?"

마르코는 은하수가 펼쳐진 지구의 밤하늘을 보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있었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스페이스 스카이에서 밤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모아 만든 하늘이 있으니까. 실제로 보면 실망할 것 같았다. 그럼 좋은 걸 잃게 되는 거니까.

하나의 감정만으로 삶 전체를 설명하는 건 마르코에게 어려웠다.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살고 싶게 했고, 어떤 순간은 마르코를 죽고 싶게 했다. 살아가는 건 징검다리 건너듯이 원치 않아도 어느 순서에는 반드시 불행의 디딤돌을 밟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근데 그 터널 끝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 엄마의 죽음. 나는 터널이 답답하고 싫지만 이 터널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 그래서 가끔 터널이 무너지는 상상을 해.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내 인생에 발생하는 거지. 같이 깔리거나 말도 안 되는 세상으로 뛰쳐나가거나.’

커커스를 보기 전까지. 자신이 커커스의 숨을 빼앗아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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