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는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커커스는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돌아가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니."

"바다와 땅?"
"모험과 도망."
하나는 대범했고 하나는 조급했다.
"발견과 추방."
하나는 위대했고 하나는 초라했다.
"미지의 세계와 타락한 세계."
하나는 신비로웠고 하나는 두려웠다.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우리의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웠다.
"이런 걸 산송장이라고 한단다."

닫힌 세계라서 이길 수 없었다는 커커스의 말을 달리하자면,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가능했을 거란 말이었을까. 이곳에 하늘이 없고, 건너갈 바다가 없고, 숨을 동굴이 없어서 백기를 들어야 했다는 말이었을까.

저 위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하면 되는 세상이었나.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옮겨가고, 위험하다 싶으면 멈추고, 잘못됐다 싶으면 돌아갈 수 있는. 역시나 살아보지 못해 알 수 없었다.

그날 할라가 가져온 소식은 회사의 부도 소식이었다. 회사가 새로운 이름으로 재설립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썼던 계약서는 이전 회사의 계약서였으므로 필요 없는 종이 쪼가리이지만 새 회사는 하루아침에 회사를 잃은 근로자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 전부를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전 회사와 약속했던 임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다.

마르코에게는 일 년 전과 다를 것 없는 새 계약서만이 남았다. 항간에는 새 이사장이 이전 이사장과 아는 사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친척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새 회사에 불만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논리 앞에 굴복하지 않을 노동자는 없었다. 마르코도 그랬다.

하지만 노래가 끝난 뒤에도,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그친 뒤에도 마르코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놓았다. 패드 속 지상의 세계에선 눈이 내린다. 비인가, 먼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매번 문장을 쓸 때마다 건축하는 마음으로 해. 나는 건축도 뭔지 잘 모르지만, 이 지하 도시와 같은 거 아니겠어? 무너지지 않게, 헷갈리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내 자유는 보장받지 못했단다. 너는 네 자유를 당연하게 느끼겠지만, 아니야. 누군가가, 아마도 이곳의 통제와 정책이 너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을 뿐이야.

지상에는 두 종류의 동물이 있었대. 울타리 안에 사는 동물과 울타리 밖에 있는 동물. 그 둘은 절대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다고 해. 이해하지도 못하고, 섞일 수도 없는. 고작 울타리 하나뿐인데 그걸 둘 중 누구도 영원히 넘지 못했다더라.

그날, 내게 글을 가르쳐주던 치유키가 말하더라.
글을 알면 뭐가 생기는지 알아?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곧장 답을 알려줬어.
싸우는 힘.

내가 무엇과 싸울 수 있을까? 의주야, 너는 내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니? 내 순서가 있기는 할까? 싸운다는 건 말이야, 상대방의 힘이 나와 비슷할 때 가능한 거라 믿었거든. 근데 그때 치유키의 말을 들으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주 조금 설렜어. 내 소원 중 하나가 싸워보는 거거든.

그러니 이제 그 선물을 다시 뺏어갈까 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릴 거야. 의주야, 네가 선택된 것은 멍청한 부모 덕이겠지만 내가 바깥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내가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건 네 탓도, 부모 탓도 아니야. 머리에 칩이란 걸 심을 생각을 한 머저리들이 죄란다. 그러니 더는 눈치보지 마.

이제 이 글을 남기는 이유를 너에게 정확히 말해주어야겠지? 몇 달 전 나한테 신기한 일이 생겼어. 여느 때처럼 배관 통로를 지날 때였어.
여기로 가면 냉동실, 위험.
이라고 썼던 글자 아래 누군가 이렇게 써놨더라고.
고마워요.
나는 멍하니 그 글자를 보았어.

그토록 답답하고 억울해도 나오지 않던 울음이 그날 나왔어. 나 말고 누군가가,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누군가가, 세상의 늪에 빠져버린 누군가가 또 있구나. 나에게 해야 할 게 생겼어.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어. 가끔 통로에서 이전에 없던 바람의 흐름이 느껴져.

조심해. 어쩌면 이곳, 붕괴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진화에서 인간이 더 강했던 거야. 강해서 많아진 것뿐이고. 절대적인 숫자가 많아지니 자리를 더 차지하게 된 거지. 무엇이든 똑같아. 그게 이기적으로 보여?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게 인간뿐일까? 살기 위해 다른 식물의 몸을 휘감고 올라타서 광합성하기에 우위를 차지해 다른 식물을 천천히 말라죽이는 덩굴식물도 있대. 다른 식물을 죽이며 자란다고 해서 교살 식물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어. 식물도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라. 살기 위한 경쟁은 언제나 잔인할 수밖에 없어.’

이 년 넘게 그 무전을 들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다. 사고를 당해 죽은 노동자 중, 누구도 제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 모두 얼른 끝내고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뿐이니까.

이끼가 처음 등장하고 그로부터 일억 년 후, 관다발식물이 등장해 지표면에 붙어 퍼지는 이끼와 다르게 하늘로 솟아오르며 광합성을 시작했다.

고생대 데본기에 들어선 뒤에야 흩어져 있던 식물들이 군집을 이룬 숲이 등장했다. 고생대 초창기에는 커다란 고사리류가 이끼와 함께 지구를 뒤덮었다가, 고사리류는 버티지 못하고 멸종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침엽수 수목들이 대신하고 꽃은 더 나중에야 등장한다.

식물의 생태는 침묵 속에서 그 어떤 생태보다 소란스럽게 격변했다.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숱한 개체가 탄생과 멸종을 반복했고, 식물의 사체에서 또 다른 개체가 근본 없이 생겨나는 동안 이끼는 가장 낮은 곳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축축한 틈 곳곳에 머물고 있다. 멸종되지 않고.

실제로 그 팀원은 그런 취미 몇 개를 보유한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가 죽고 나서야 그것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용하게 뻗어나가는 나무의 뿌리를 떠올린다. 인간 몇십 명이 붙어 뚫는 땅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가르는 뿌리는 지구의 진정한 지배자답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나갈 구멍이 있긴 있다는 거구나. 너는 그걸 알고 있고."

모든 생명이 각자 자신만이 가진 방식으로 지구를 살고 있었어. 인간이 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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