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 주위는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김제·만경의 곡창지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둠벙 파놓으면 개구리 뛰어든다‘는 옛날속담처럼 쌀이 있는 곳에는 문화가 발달하고 사람이 모이게 마련인가 보다.
화두...... 글자 그대로 말의 머리만 있지 꼬리는 감추고 없다. 머리만 힐끔 보고 몸통과 꼬리를 한눈에 파악해야 한다.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화두이다. 비논리를 가지고 논리를 깨는것이 화두이다. 원효가 역작 『기신론소起信論』에서 제시한 의언진여依言眞如(언어에 의지해 진리를 표현함)의 세계에서, 이언진여難言眞如(언어를 떠남으로써 진리를 표현함)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화두이다.
"달다.……………." 전강이 휘두른 이 한마디는 지혜 제일의 검객이 보여준 초식이다.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한칼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이 화두는 중생의 삶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가없이 너른 들녘은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사의 광야이니 그곳으로 사방에서 붙어오는 불길은 생로병사의 불이요, 우물은 황천이며, 미친 코끼리는 무상한 살귀鬼요, 나무는 사람의 몸이며, 칡넝쿨은사람의 목숨이고, 검은 쥐 흰 쥐는 해와 달이요, 세 마리의 이무기는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며, 네 마리의 뱀은 지·수·화·풍 사대이다. 꿀은 오·욕·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서산이 옳은 것인가, 진묵이 옳은 것인가? 동포가 왜놈의 칼날에 처참하게 살육당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진묵은 저 혼자 살자고 산속에 숨어버린 도피주의자란 말인가? <미션>에서 평화의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칼을 잡고 돌격하는로버트 드 니로.......
나의 머릿속에는 서산과 진묵의 극단적인 인생행로가 한꺼번에몰려들었다. 서산은 칼을 들고 산에서 내려온 셈이고, 진묵은 그냥청산에 머물렀다. 시뻘건 피를 튀게 하는 칼이 색이라면, 청산은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색과 공이 이처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전쟁이 일어날 때이다. 피와 칼과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다. 눈앞에 칼이 들어오는데 과연 이것이 환상이고 공인가. 칼이 들어오는현실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가, 아니면 도망갈 수밖에 없는가.
그래서 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겹쳐보았다. 그리고 진묵의 행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커다란 사건 하나를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3년 전, 그러니까 기축년(1589)에 김제 금구에서 발생한 ‘정여립 역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정여립과 관련돼 걸려든 사람이 수천 명이고, 그들 중 사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은 사람만 해도 대략 1천 명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누구의 표현대로 ‘조선의 광주민주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좌절은 종교적 천재를 낳았다. 진묵이라는 천재가 없었다면 상처받은 민초들은 어디로 가서 위안을 얻었을 것인가! 임금에게서 위안을 받을 것인가, 사또에게서 위안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미쳐 버려야 한단 말인가? ‘진묵 신앙‘은 상처 치유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승려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경상도는 정치인이 많이 나고, 전라도는 도인이 많이 나온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다.
불교는 정해진 지역구가 따로 없다. 마음에 드는 도량이 있으면방방곡곡 전국 어디라도 찾아간다. 불교의 사상이 무주공산 사상이라 어디 따로 임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자동차가 많이 보급되면서 이 현상은 더욱 강해졌다. 전국 어디에있는 사찰이라도 가고 싶으면 간다.
나는 외롭고 힘들 때마다 『맹자』 「진심장」에 나오는 "궁색할때는 홀로 자신을 돌보는 데 힘쓰고 잘 풀릴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 를 마음속에서 새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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