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삽화와 소묘를 그리는 것은 그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퇴 정도의 학력을 가진 빈센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가문의 사업이던 화랑에서 그림 파는 일을 하기도 했고, 서점에서도 일했으며,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도 했고, 벨기에 탄광촌의 전도사로도 일했다.
그는 파리에서 엄청난 소외와 고립을 맛보았고 금세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평소에 추구해 오던 이상향을 재빨리 불러냈고, 그곳이 바로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인생 자체가 노마드였던 그는 37년의 삶 속에서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의 스무 개가 넘는 도시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부모로부터 내쳐져 원하지 않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던 사건은 평생토록 지속될 빈센트의 정신적 방황에 단초를 제공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노마드적 삶은 그의 평생 동안 함께한 실존적 조건이 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타자로 소외되었던 그가 또 다른 타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다 객사한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나의 여정도 바로 이 마지막 3년, 그러니까 아를, 생레미,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집중되었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아를은 네덜란드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친숙한 동양의 일본을 투사한 장소였다. 이 시절의 빈센트에게 좋은 것, 멋진 곳, 이상적인 것, 훌륭한 것은 모두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아를의 거리<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까마귀가 나는 밀밭>, <꽃핀 아몬드나무> 등 오늘날의 반 고흐를 있게 한 대표 걸작들은 그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한 생의 마지막 3년에 탄생한 것이다. 그 마지막 여정의 시작점이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사진은 아를 시절 반 고흐가 즐겨 찾던 카페로, 코발트색의 하늘과노란색의 카페가 조화를 이룬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병세가 완화되어 자신을 치료해 줄 정신과 의사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보낸 1년 3개월 남짓 동안 그토록 꿈꾸던 화가 공동체는 폴 고갱과의 불화로 결렬되고,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를 시절은 끝이 났다. 그 후 근처작은 도시인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입원하여 또 약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일본의 선승들에게도 매료되었던 빈센트는 그들처럼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에 부풀었다. 물론 그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건조하고바람이 강한 아를의 기후는 일본의 습한 기후와 전혀 달랐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아포리즘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내 삶을 관통하는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단박에 빈센트를 떠올렸다.
<꽃핀 복숭아나무>1888년 2월, 반 고흐는 그가 존경한 선배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랬듯이 화가 공동체라는 새로운 꿈을 안고 시끄러운 파리를 떠나 최고의 밝음을 자랑하는 아를로 왔다. 이른 봄, 사방으로 꽃이 만개한 아를의 풍부한 색채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것을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 화사한 풍경은 마치 그의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약속처럼 보였을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60.2×80.9센티미터, 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사실 그는 일생 동안 기성세대의 보수적 이념과 구태의연한 체제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으로 경계하며 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빈센트와 만나 수년간 동거했다. 그 동거는 정주가 아닌 탈주의 동거였다.
지긋지긋했으나 지극히 투명한 지복의 시간이었다. 빈센트와 떠난 정신적인 여행, 그러니까 빈센트로 시작해 나에게 도달한 이 영적인 여행은 감히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레미의 광장에서평생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낯선 곳을 떠돌았던 반 고흐의 여정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고 한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의 망명자인 양 그의삶은 늘 고달프고 애처러웠지만, 그 탈주의 드라마는 영원으로 이어진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화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할 때 자연과 나는 조화되고 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빈센트는 광인인가? 빈센트에 대한 세간의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광기에 치달아 죽어 버렸다는 것, 그러니 너무나 불행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가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불행한 화가는 아니었다고.
죽기 1년 전, 갑작스럽게 습작 시절에나 하던 밀레 모사로 돌아간 것 역시 자기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를 두고 ‘신성한 불만족‘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 역시 신경증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빈센트는 단연코 행복했던 인간이다. 우울하기만 했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려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생명력을 오롯이 활기 있게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갱과 동료 화가들도 빈센트 안에 사랑스러운 면모와 참을 수 없는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은 빈센트의 성격이 얼마나 급작스럽고 격렬하게 바뀌었는지를 회상했다. 지나치게 떠들썩했다가 불길할 만큼 조용한 태도로 돌아왔다가는 다시 이전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빈센트에 관한 또 하나의 오해는 그가 세속적인 성공과 무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성공이라는 불가능한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감정적 욕구와 예술적 야심이 결합되어 부지런히 광적으로 작업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화가로 산 10년 동안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얼마간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인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초월적 상상력을 지닌 자로 간주되었다.
테오는 자주 형이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두 명의 인물이 한 존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하나는 놀랍도록 재능이 많고 섬세하고 훌륭하며, 다른하나는 이기적이고 무정하다는 것이다.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는 늘 부랑자 같은 모습이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비뚤어진 입, 무섭도록 반짝이는 가느다란 눈,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모습등 누구도 그를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신 파리 시절에 알게 된 존 피터 러셀이 그린 이 초상화만큼은 좋아해서 테오에게도 잘 관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러셀은 반 고흐의 옆모습을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모습으로 그렸는데, 반 고흐가 이 초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는 말도 된다. 캔버스에 유채, 45.6×60.1센티미터, 1886,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부모는 빈센트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유쾌하고 명랑하며 농담도 잘 던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뚱하고 신경질적이며 성질을 부리고 쉽사리 우울해한다며 그런 기질을 문제라고 여겼다.
절친인 에밀 베르나르 에 따르면 빈센트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토론은 지루하고 장황할 때가많았다. 이견을 참지 못했고, 이로 인해 성질을 부리고 예민해졌다.
정상은 아니지만 해가 되지는 않는오해를 받을 만한 여러 속성을 겸비한 빈센트는 예측 불허의 사람이었다. 한 내면에 두 개의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 고흐의 방아를시절의 반 고흐 방을 재현한 것이다. 반 고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감정과 드높은 예술적 열망으로 인해 늘 어딘지 불안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해보였다. 오직 자연과 그림만이 그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차단막이 되어 주었다.
빈센트의 인정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일종의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다시 말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스물여섯 살 때 그는 "나는 정열의 인간이고, 다소 무분별하고 지나친 행동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종종 후회하기도 해. 더욱 참고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때도 바로 말을 뱉거나 행동하는 경우도 자주 있어.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힘들어했다. 그로 인해 그에게 남은 것은 뼈저린 실망과 상처뿐이었다.
타자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일시의 투사라고 부른다. 상대방과 나, 나와 타자가 하나라는 생각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다는것이다.
<울고 있는 여인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남달랐던 반 고흐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예수가 그랬듯이 노동자, 창녀, 빈민, 정신병자 등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목회자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고 그림으로 세상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종이에 분필, 31.4×50.2센티미터, 1883, 시카고미술관, 시카고.
인내와 성실의 다른 이름, 천재그렇지만 유일하게 빈센트를 아프게 하지 않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덜 외롭게 했다. 그림에 몰입하는 것만이 그의 자존감을 세워 주었다.
부르주아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빈센트는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는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한 가운데 그들과 일체되고자 했다.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도 고통에 빠진 환자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했고 잘 동화했다. 이렇듯 그는 정신병자, 창녀, 빈자, 노동자, 농민, 탄광 인부, 어린아이 등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생활하고자 했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환경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함께할 때 고독감도 덜 느꼈다.
반 고흐가 쓰던 화구반 고흐는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제도권의 보수적이고 틀에 짜인 교육 방식은 그와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독학으로그림을 익힌 그는 약 10년이라는 화가로서의 짧은 경력이 무색할 만큼 특유의 거침없는 스타일로 엄청난 양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빈센트 역시 테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재능은 오랜 인내의 선물이고, 독창성은 강한 의지와 예리한 관찰을 통한 노력에 의해 얻어진다"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폴 발레리는 "천재! 오긴 인내여"라고 했고, 샤를 보들레르 역시 "영감은 일상적인 훈련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고 했다.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달아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 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 주어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흔히 천재성을 ‘일정한 훈련 없이도 생산적인 결과를 산출해 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빈센트에게 이 말은 일부만 옳다.
빈센트가 이런 천재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정규 미술 교육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로 출발하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화가가 되어 서른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 빈센트는 10년 동안 1000점의 작품을, 그중에서도 마지막 3년 동안은 300점을 그렸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것도 빨리 그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 짧은 시간에 작품성이 탁월한 수많은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일까?
반 고흐의 어머니반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생산성에는 왕실 제본사의 딸이자 아마추어 삽화가였던 어머니 아나 카르벤튀스의 영향이 컸다. 어린 빈센트는 어머니에게서 미술을 비롯하여 책 읽기와 음악 등을 배웠다. 또한 어머니는 늘 아이들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캔버스에 유채, 32.5×40.5센티미터, 1888, 노턴사이먼미술관, 패서디나.
이런 막대한 소비에 대해 그는 "많이 쓸수록 빨리 성공하고 많이 발전할 겁니다"라고 장담했다. 더군다나 유화를 시작하자 "번개처럼 빨리 그릴 것이며, 내 붓에 더많은 활력을 불어넣겠다"라고 다짐했다. 건강한 남자답게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저 없이 칠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매일을 분투하다빈센트에게 ‘예술가‘라는 의미는? 그것은 바로 ‘나는 탐구한다, 나는 분투한다, 나는 열중한다‘는 뜻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생기면 몰입의 강도가 막강한 존재였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성실했으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한 남자, 그의 지나친 노력과 헌신은 과도한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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