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시즌2 보았는데 각색이 과유불급이었다. 시즌1의 1-3,7을 담당한 코고나다와 4-6,8을 제작한 저스틴전은 연출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 스토리를 큰 굴곡 없이 잘 끌고 마무리했다. 시즌2는 오리지널 캐릭터인 솔로몬의 여자친구, 톰앤드류스, 요시이 이야기, 고한수, 노아, 모자수 등이 너무 얽혀서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버렸다. 스토리가 정돈되지 못하고 연출도 이랬다 저랬다 너무 많은 손을 탄 느낌이다.
소설과 영화 각자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매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달리 각본가는 활자 상태의 소설에 없는 시청각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다. 스크린 뒤에 잠깐 보이는 간판, 코스튬, 먼지가 묻은 정도, 사투리, 배우가 전달 가능한 대사량과 속도와 호흡 등, 소설에 없는 부분을 각본가는 상상한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소설 원작의 공학적 설명이 다 빠진 대신 퍼페티어가 움직이는 로키 캐릭터 디자인과 페트로바 라인의 영상미를 추가했다. 예스이십사
기고문에서 이다혜 기자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소설에 대한 각본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국보>도 요시다 슈이치 소설 원작은 발랄한 만담형 톤이나 영화는 이상일 감독의 연출을 따라 진중하다. 소설 2부와 영화 후반부는 많이 다르다.
파친코는 심지어 원작이 영어인데 한일에 대한 책이라, 영어 원작과 번역본도 다르다. 번역본은 영어에 없는 사투리나 고유명사를 재창조한 제2의 창작이다. 영화는 아이비출신 뉴욕 월스티르트 영어, 오사카 사투리, 고한수와 아버지의 제주도 사투리, 부산 사투리, 아쿠자의 거센 말씨까지 나온다.
드라마 한 시즌 8-9부작에서 대개 6회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며 분위기를 전환하고 스토리의 깊이를 만드는 것 같다. 경험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랬다. 예컨대 기리고에서도 6화에서 도혜령과 권시원의 과거사와 앱 개발 비화가 나온다. 오겜1 6화 2인1조 게임이다. 조상우의 감언이설로 알리가 죽고 탈북녀 지영의 희생으로 강새벽이 살아남는다.
파친코도 6화가 다르다. 그리고 매우 각색 정도가 좋다. 최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6화는 오사카를 배경으로 선자가 전당포에서 흥정해 320엔 빚을 갚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요셉이 전차 굴다리 밑 주점에서 술을 퍼마시며 평양 양반이었음을 밝히는 일화다. 요셉을 부르러 간 이삭이 없는 틈에 요셉의 기함으로 놀란 선자가 양수를 터뜨리고 노아가 태어나고 옆집 할매가 받아주는데, 원작과 차이가 크다. 요셉만 집을 나가 있고 이삭은 선자의 옆에 있으며 옆집 할매는 원래 빈민가에서 아이 받아주던 사람이지 영화의 대사처럼 돼지 많이 받아봐서 잘 안다고 들어 오는 사람은 아니다. 이 돼지 관련 대사는 일본인이 자이니치가 돼지와 함께 산다는 모욕적 트라우마를 환기하기 위해 들어갔고 시즌2에서도 노아에게 사용된다.
영화는 요셉과 이삭이 술을 마시며 양반 출신이었지만 이제 달라진 현실에 적응 정도가 얼마나 다른지 드러난다. 요셉은 여전히 인정을 바라고 옛 과거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며 조선인 사이에서
출신여부로 상대를 평가한다. 그래서 요셉은 일본인 사장에게 인정욕구가 있고, 평범한 노동자보다는 위계가 있는 작업반장을 할 때 만족해하며, 시즌2에서 나가사키 수류탄 공장에 동원되어 관리직이 아닌 노동을 할 때는 직업만족도가 없어 보인다.
이삭은 어렸을 땐 시중을 받았지만 세상이 바뀐 이제는 별 상관이 없다 생각한다. 이런 유연한 태도로 인해 전도사로서 노동자를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양복 입고 다니는 잰체하는 전도사라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각을 읽고, 양복을 벗고 노동자의 옷을 입는다. (양복과 양반은 ㅇㅂ이 반복되 재밌는 말이다) 이런 연출로 인해 캐릭터의 심경 변화가 관객에게 잘 설득되니,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담근 것이 순차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개화~일제강점기 평양이 기독교가 강했던 것도, 일본에 무정부주의자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놀랍게 섞여있던 것도 실제 역사적 연구에 의해 밝혀진 일이다.
또한 원작엔 없으나 일본순사의 불시검문도 삽입해 차별과 모욕의 상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전에 조선인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는 한 마음 한 뜻의 장면에 이어 불시검문으로 인해 분위기가 뚝 하고 끊겨 더더욱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조선인들의 감정의 고조는 아이의 탄생으로 인한 울음 장면과 교차편집되어 있다. 노아의 운명을 반영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요셉을 달래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는 이삭이 선자를 뒷담하는 요셉에게 당당하게 자기 표현하는 장면과 아이가 태어난 후 요셉에게 이름 지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가장 각색 수준이 좋고 배우의 연기도 일품이다.
선자씨 욕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조용히 그러나 당당히 자기 주장을 하는 이삭을 통해 더이상 요셉의 기억과는 달리 꼬맹이가 아님이 드러난다. 대개 한국영화에서 캐릭터 한 명이 분노하면 "그럴 뜻이 아니었어.."하고 꼬리 내리거나 "뭘 그렇게 화를 내"하면서 받아주는 척하며 감정 회피하기 마련인데 이 부분에서 이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소 생각이 그렇다는 거잖아"라고 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파고든다. 이 한 마디로 인해 깊이가 더해진다. 그리고 요셉의 볼멘소리 한 마디에 대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선자씨가 요셉의 생각과는 달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언가 할 수 있고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잇는다. 이로 인해 논의사항은 더이상 요셉차원의 악담이 아닌, 혹은 요셉이 말조심하면 되는 문제가 아닌, 선자라는 인간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이해로 넘어간다. 그럼 선자에 대한 품평이라는 해당 사안은 오히려 캐릭터의 고양이라는 큰 차원에서 승화된다. 이를 전달하는 배우 노상현의 연기도 좋다.
그리고 이 대화를 관객은 들었으나 선자는 듣지 못했는데도, 선자를 통해 요셉이라는 캐릭터를 대접해준다. 남 뒷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으로 떠받들어 준다. 아이 밴 엄마로서 9개월 동안 아이 이름을 생각해보지 않았을리 없다. 아빠인 이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요셉이 가장으로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름 붙일 권한을 넘겨주면서 당시처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가 밖에 나가 일처리해서 훼손되고 실추된 요셉의 명예를 높여준다. 이미 이방인으로서 돈도 없고 가부장으로서 권위가 상해있는 요셉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현명한 선택이다.



그리고 요셉은 조카의 이름을 아무도 믿지 않을 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냈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노아라고 짓는다. 네러티브 전체에서 노아의 의미를 상기했을 때, 그리고 조선인이 뿌리 없는 이역만리의 땅에서 발 딛고 살아간다는 걸 생각했을 때, 매우 적절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소설 원작에서는 없다. 요셉은 다음 날 들어오고 이삭은 "형 괜찮아? 아이가 태어났는데 남자 아이"라고만 전달한다. 이렇게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것은 영화의 보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1-3,6화를 연출한 코고나다는 비유컨대 이창동 감독의 스타일이다. 정적인 연출이 특징으로 어떤 모순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관객에게 비주얼라이징해 전달한다. 왜 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스릴러 연출에 능한 감독은 아니다. 사건의 이유를 찾아가는 추리극이 중요한 스릴러와는 달리, 사건은 일단 발생했고 이에 반응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태도를 응시하는 감독이다. <밀양>도 왜 어린이 웅변학원 원장이 아이를 유기했는지는 끝까지 불분명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올해 하반기에 넷플에서 나올 신작 <가능한 사랑>이 크쉬스토프 감독의 십계 미니드라마 <데칼로그>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데칼로그를 다 보았는데 이 시리즈도 왜? 보다는 여러 캐릭터들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다르게 접근하는지를 지켜보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 자체를 정적이고 느린 카메라로 응시하는 감독은 이번 칸 영화제에서 <미노타우로스>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도 있다. 그간 영화연출의 공통적 특징은 존경할 어른으로서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버려지는 과묵한 영화다.
파친코 4-6,8을 연출한 저스틴 전은 칸 황금종려상 두 번 수상한 크리스찬 문지우에 가깝다. 그리고
문지우는 역대 황금 종려상 수상작의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번 칸 영화제에서 문지우가 수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다. 칸 영화제 경쟁작 부분 감독을 잘 몰라 계속 보고 있었는데 문지우와 즈비아킨체프 둘 다 수상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5/15에 글을 올렸고 정말 5/23에 둘 다 수상했다.
그 황금 종려상 수상작의 공통적인 특징은 불편한 상황 속에서 풍자와 위선을 드러내는 정돈된 대사다. 이 불편함과 풍자에 이르기까지 초중반에 빌드업을 한다. 배우가 빠르게 뱉어내는 모순을 드러내는 결론격 문단이 있다. 결국 각본의 힘이다. 이번 칸에서 상영한 문지우의 피오르드는 보지 않았으나 이전 작품을 보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4개월.. 은 임신한 여대생에게 네가 잘못했다고 가스라이팅하는 돌팔이 의사, 좋은 집안 출신의 남친 집 저녁식사에서 가족의 대화가 다 불편하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허세와 허위의식이다. <신의 소녀들도> 정교회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풍자와 모순, 마지막에 의사와의 대화, 경찰에게 끌려가는 대화 등에서 각본이 다름이 느껴진다. RMN도 성당 안에서 스리랑카 노동자 차별하는 말 속에 루마니아-헝가리-독일계가 섞여있는 유럽 이민 사회의 이상한 위선이 드러난다.
2025년 자파르 파나히 감독 그저 사고였을 뿐도 마찬가지다. 이 남자를 죽일까 말까 어떻게 처분할까 아니 사실 그 고문인이 맞는가 하는 수많은 대사의 난무가 있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 등 각자 처한 위치와 태도가 드러난다.
2024년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도 비행기에서 마마보이 재벌2세 이반과 러시아 갑부엄마에게 쏘아붙이는 대사, 이고르와의 엔딩신에서 너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며 드러내는 남성성에 동화된
아노라 자신의 모순
2023년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에서는 재판정에서 아이가 듣는데 하는 대사, 실제로 남편을 못났다고 몰아붙일 때의 대사
2022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더치페이에 대한 관점이 다름을 보여주는 모델 둘의 대화, 무너지는 자본주의를 무너지는 함정에서 하는 대화 등이 생각난다.
파친코 6화도 드라마가 안 되었으면 아마 칸 영화제에서 수상할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한일관계, 자이니치, 디아스포라 등을 포함한 전근대에서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 현대화를 이룩한 동아시아의 역사는 풍부한 콘텐츠다. 아직도 영국은 서점의 한 코너가 1,2차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다큐와 영화를 본다. 2022년엔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영화도 있었고, 크리스토퍼 놀란도 덩케르크를 만들었다. 검증된 콘텐츠엔 진부함은 없다. 이미 유통이 많이 된 소재는 쓸만한 소재고 대중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문제는 각본과 연출일 뿐. <국제시장>도 <지옥에 떨어집니다>도 다 어떤 역사의 풍랑 앞에서 견디는 개인사가 얼개인 픽션으로, 퍼스널 히스토리가 곧 전체의 히스토리로 기능한다. <굿뉴스>도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이삭-요셉 주점 신에서 옛 신분사회-사회주의와 노동운동-기독교-일본인의 조선인차별 등이 암시되는 부분과, 칸 영화제 수상작이 보여주는 좋은 각본의 특징을 안고있는 이삭-요셉의 대화, 선자-요셉의 대화는 모두 좋았다. 이런 포인트를 살려서 같은 시대극에서 풍자, 위선을 많이 섞어 만들면 차기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감독인데 스타일을 반복하거나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장르의 문법을 기술적으로 완성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사회문화, 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감독이면 좋겠다.
가능한 젊은 감독은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세기말의 사랑의 임선애, 세주의 윤가은 정도가 생각나는데 윤가은 감독은 글로벌하지 않고
네러티브의 스코프가 좁은 편이다. 아직 한국의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양영희 감독 같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한 가족의 이야기면서 디아스포라 전체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청소년 배우를 잘 기용한다. 각본의 짜임새과 풍자적 연출은 좋다. 하마구치 류스케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외국배우를 기용하는 경험이 더해지면 좋을 것 같다.
김보라는 벌새 하나로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어 기대되는 감독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한 노선으로만 경도되어 있는 편이어서 조금 더 포용적이고 다채로운 시각을 품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인권뿐 아니라 위계와 이분법을 해체하고 몸에 대한 유동적이 시야를 도모하는 의미의 페미니즘으로 나아가거나.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동아시아적 소수자성을 셀링해야할 것이다. 이 이론 자체가 서구에 바탕을 둔 이론이고 이 네러티브를 추구하는 해외 감독은 너무 많다.
로컬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글로벌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재개발, 빈민, 고령화, 외국인노동 같은 소수자의 서사를 광범위하게 포섭할 수 있는 포용력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임선애 감독이 이중 가장 연출적으로는 스타일리시하다. 각본이나 문제의식은 딥하지는 않은 편이다. 내면으로 침잠하기보다는 외적으로 화려하다. 감독상은 조금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영화제의 연기상은 탈 수 있을 것이다.
셋 다 좋은 감독이라 생각한다. 나홍진의 곡성에서 보였던 한국 산맥의 자연신도 아이캐치로 넣고, 풍자와 위선과 아이러니를 보여주면서 이 모두 종합하는 잘 다듬은 속사포 각본이 관건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있는 모순, 이성적으로 건설된 사회에 대한 풍자를 포함하며 그것이 설득력있고 보편적으로 전달되어야한다.
그리고 배우 중 노재원, 노상원은 칸 남우주연상, 청룡과 백상의 남우주연상을 언젠가 탈 것 같다. 연기의 끝점, 단위시간당 표정변화, 캐릭터의 이해가 차별화된다. 맹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