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1 사계절 1318 문고 104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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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한 기분이다. 잠깐 책을 덮고 여기가 어딘지, 생각했다. 현실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고 몇 시간이나 꼼짝 않고 앉아 책을 읽은 평범한 주부지만 기분은 수남과 채령을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 뉴욕으로, 다시 충칭에서 서울로 돌아와 몇 십 년 동안이나 그녀들을 따라다니던 운명의 장난을 함께 한 동지 같다.

 

처음엔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 책 띠표지에는 "청소년문학의 아이콘, 이금이 작가의 첫 역사 장편소설"이라는 문구가 화려하게 붙어 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책 또한 그동안 작가님의 독자층인 초등 고학년에서 청소년 수준의 역사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지 않은 2권의 책이지만 난 이 책을 꼬박 2주일에 걸쳐 읽었다. 가독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번 잡으면 책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 불편함이 계속 따라다녀 단숨에 읽어내리진 못했다. 그리고 생각해냈다. 이금이 작가님 만이 가진, 심리 서술 방법. 가만히 아픈 상처를 다독여 주고 어루만져주기 보다는, 스스로 헤쳐 나가라는 듯이 인간의 양면성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이나 <신기루>에서처럼.

 

소설은, 윤채령이라는 인물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강작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자작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방송된 이 다큐멘터리는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작가는 조금 우쭐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에게 요양 병원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렇게 만난 한 노인은 자신이 인터뷰했던 윤채령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이 노인은 자신이 바로 "윤채령"이라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이 할머니와의 만남은, 윤채령과 김수남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수남은 너무나 가난한 삶을 이어가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자동차가 들어왔다. 땅의 주인 윤형만 자작과 그의 딸이다. 윤형만은 자신의 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나이가 비슷한 시중 들 아이를 데려가려 왔고 그렇게 낙점된 아이는 가기 싫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1권 62p

 

그렇게 시작되었다. 윤채령과 김수남의 만남은. 한 소녀는 번듯한 집안의 막내딸로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한 소녀는 단지 굶지 않기 위해 선택한 시녀의 삶에 충실하게 자라났다.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 같은 건, 배불리 먹고 등 따신 사람들에게나 걱정거리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채령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고 자신이 탐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남은 힘든 일과 속에 짬을 내 조선글을 배우고, 일본어를 배운다. 어쩌면 이런 그녀의 학습 호기심과 의욕이 그녀를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

 

채령을 위해 또다시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자작의 딸 윤채령"으로 살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리고 조금씩 성장한다.

 

"그동안 수남은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신분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한테, 무식한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한테,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2권 158p

"수많은 질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일곱 살 수남이 '거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강휘가 여기까지 온 널 존경한다고 했던, 바로 '여기'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수남이 품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열망 덕분이었다."...2권 213p

 

한 인간이 가진 배움의 목마름이 얼마나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을 거쳐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서 한 인간이 얼마나 휘둘릴 수 있는지, 혹은 얼마나 무관심할 수 있는지도 보았다. 아마도 그런 불편함일 것이다. 아무리 악한 이들이 득시글댄다 해도 누군가 한 명의 영웅이 나타나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데도 책은, 소설은 그저 현실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없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로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 누군든지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 앞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런 인간을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프레임에 가둬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7p 작가의 말 중에서

 

바이칼 호수에 가고 싶어졌다. 광활한 대지와 깊고 푸른 호수를 보며 깊은 심호흡을 하면 강휘와 수남이가 느꼈을 감정이 일어날까. 하루하루 살아가느라 급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넓어지고 여유로워질 것 같다. 이 책이 조선 만을 대변하거나 옳고 그름만을 따지지 않아서 좋다. 얼마나 많은 역사적 고증을 거쳤을지 상상할 수 있어 좋았다. 두 여자 주인공과 함께 그 삶이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전세계를 여행하듯 그녀들의 청춘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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