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가위바위보 문명론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 땐 "가위바위보"가 그저 비유인 줄 알았다. 아마도 은연중에 가위바위보가 아이들만 하는 놀이라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책을 들추고 이 "가위바위보"가 진짜 "가위바위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이들의 철학 책을 제외하곤 이어령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다만 한 일간지의 부록이었던 주간지에서 연재되던 그의 글을 접하고 이 놀랍고 풍부한 지식에 감탄하고 감탄했기에 "문명론"이라는 제목에 지체 없이 책을 집었던 것 같다.

 

책은 꽤나 두꺼운데 앞에는 한국어로, 뒤쪽엔 일본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원래 10년 전 일본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고 대입 시험에도 곧잘 출제되는 책이라고 한다. 그런 책을 한국에서도 번역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합본되었기에 일본어에 밝은 사람이라면 비교해서 읽어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이라고, 작가의 숱한 비유와 예시로 쉽게 설명되어 있다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예시들이 사실 중심으로 가는 길을 좀 산만하게 흐트려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위바위보"라는 누구나 할 줄 아는 놀이를 가지고 한, 중, 일 사이의 문명이 나아갈 길을 얘기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왜 지금 가위바위보인가"로 시작한 이야기는 가위바위보의 특성과 구조, 가위바위보의 문명과 아시아의 문명으로 이어져 한, 중, 일 세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 아이들은 동전을 던지지만 아시아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한다. 앞이냐 뒤냐 그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실체'이며 '독백'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이다."...9p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이미 서양 문화가 익숙하기 때문인지 혼자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동전을 던져서, 여럿이 순서를 정하거나 한 명을 골라야 할 때는 가위바위보를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하는지 생각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작가의 설명을 읽고 있자니 정말 동전 던지기는 사물을 통해 양자대립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중간은 없는. 하지만 가위바위보는 둥근 원이다. 가위가 보를 이기고, 보는 바위를 이기고, 바위는 가위를 이기는, 어느 누가 가장 우세한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또한 상대방이 무엇을 내밀지 의중을 살피며 늦게도, 빠르게도 아닌 동시에 내밀어야 결정이 나는 가위바위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동양, 아시아의 원류이자 문명이다.

 

"표면만 보면 비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경쟁이지만, 구령을 외치며 서로 호흡을 맞춰 하나가 되지 않으면 게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가위바위보는 경쟁과 협력이라는 대립 관계가 하나가 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시합이다."...109p

"반도성의 회복은 한민족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가 '삼파'의 역학관계를 회복하고 독특한 로컬리즘을 살리는 일이다. "...233p

 

작가는 바로 이 아시아의 문명 코드인 가위바위보 형태로 한, 중, 일이 아시아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인 대륙의 중국과 주먹인 섬의 일본 사이에 가위인 반도, 한국이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선택하며 서로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럴 때 혼란의 아시아가 아닌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아시아가 될 수 있다고.

 

요즘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만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시켰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 또한 가위바위보의 삼자대립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구 하나 가장 잘나지도 않고 뒤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연성에 의한 선택일 뿐이다. 이 놀이를 함께 한 다른 이들의 협력으로 인해 선택된. 새로운 경험이었다. 평소 별 생각없이 생각했던 무언가로 이렇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구나~ 하는.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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