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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펜과 비밀 쪽지 ㅣ 라임 어린이 문학 2
엘렌 리스 지음, 이세진 옮김, 앙투안 데프레 그림 / 라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100페이지가 안 되는 이 얇은 책을 읽고 마치 3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책을 읽고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양한 사건이 있고 캐릭터에
푹~ 빠져들었다가 모든 고민이 해결되어 한숨이 쉬어지는 그런 깊은 공감과 감동이 있었다. 오랫만이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책은.
아이들에게 전학생은 항상 설렘과 호기심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친구. 하지만 때론 그 친구의 태도에
따라 익숙한 우리 것이 아니라고 텃세를 부리기도 하고 그 친구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경계심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까만 펜과 비밀
쪽지> 속 파트릭에게 전학생은 유령처럼 흰 피부에 초점이 없는 듯한 눈빛이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 아이는 파트릭을 까만 펜과 비교하며
짝이 되기를 거부한다. 한 번도 자신의 피부 색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파트릭은 이 전학생의 돌발적인 행동에 너무너무 화가 난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파트릭의 가방에 들어있는 비밀 쪽지 속의 그림들과 항상 긴장한 듯한 에리파의 태도를 보고 파트릭은 조금씩 에리파를
인정하고 도와주고 싶어한다.
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책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생생히 살아있는 등장인물들 덕이다. 우리 반에 꼭 한 명 정도는
있을 것 같은 통통 튀는 장난꾸러기 톰이나 너무나 명석해서 속을 훤히 들여다볼 것 같은 아리안 같은 친구들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등장인물들을 받춰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1인칭 화자인 파트릭이다. 자신의 속마음이나 친구들을 설명하는 데 굉장히 솔직하고 거침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읽는 독자가 파트릭이나 톰의 친구인 듯 느껴지는 것이다.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친구는 나도 적대적으로 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리고 무척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법이다. 에리파의 악몽을 없애주고 싶어하는 파트릭처럼. 아직은 프랑스말을 할 수 없어 파트릭과
대화를 할 수 없지만 에리파도 그런 파트릭의 마음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불장난이, 에리파의 첫번째 말이, 눈물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체첸의 전쟁,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쓴다면 분명 무겁고 어려운 책이 될텐데, 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 전혀 무겁지
않게, 어렵지 않게 다가간다. 그 이유는 체체니아의 전쟁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에리파를 통해 파트릭과의 우정을 그리면서
책으로는 체체니아의 상황을 언급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은 에리파의 과거가 궁금해 한 번쯤 인터넷을 찾아 체체니아의
전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나 장난꾸러기였던 톰이 진지한 얼굴로 체체니아의 전쟁을 언급했을 때처럼 말이다.
좋은 책은 하나하나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감동 받고 공감되어 스스로 찾아보고 알아보게끔 하는 책이다. 오랫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