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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화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3월
평점 :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저 밑바닥에서는 알고 있으나 애써 부정하고 고개 돌리고 있던 것을 끄집어내어 눈앞에서 보여주는 거다. 그럼 피할 수 없다.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억지로 보게되니 약간의 괴리감을 느낀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 <<빨간 장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주인공 히와코의 심리 상태이자,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이다.
주부들이 가장 공감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에쿠니 가오리는 "결혼"을 주제로 한 글이 많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수도없이 들었지만 수동적이고 내성적이며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살짝 있는 나로선 결혼이 아주 좋은 탈출구였다. 내가 하기 싫고 귀찮고 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남편에게 미뤄버렸으니까. 히와코라는 주인공에게 심히 공감하는 이유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그 자리에 맞는 역할로 행동하고 그 역할이 무사히 끝나면 울어버릴 것 같은 감정을 쿡쿡..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그리고 다시 안전하고 변함없는 집으로 돌아와 안심한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너무 이상하다고. 히와코의 성격을 모두 받아주는 듯, 보호해주는 듯하던 남편의 캐릭터가 나타날 즈음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하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그 외에는 막을 치고 사는 쇼조. 그 남자와 히와코가 도대체 어떻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어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분출할 구멍은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두가 적이어도 딱 한 명 내 편이 되어줄 사람. 가끔 의견이 안맞아 툭탁거리다가도 의기투합하여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을 쌓을 수 있는 대상... 그런 대상이 배우자가 아닐까.
"히와코는 쇼조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사람인 쇼조에게 아낌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도 서글펐다. 쇼조와 마주하기보다 쇼조의 빨랫감을 마주하는 편이 행복하다는 것이, 쇼조와 함께 있을 때보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 더 쇼조를 좋아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97p
마치 이들 부부의 생활을 보듯, 장마다 다른 날이 적혀있다. 만약 쇼조 입장의 글이 하나도 없었다면 난 이 남자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낄 뻔했다. 같은 날의 상황에 따른 쇼조 입장의 글이 이 남자를 조금 이해하게 한다. 이들 부부는 닮았다. 나 이외의 사람에게서 거리를 느끼는 점이. 과연 이들은 행복할까. 너무나 적나라한 이들 부부의 삶이 묘하게 거부감을 일으켜 독자인 나로서도 쇼조처럼 조금의 막을 치고 읽었다. 참으로 사소하고 섬세한 감정을 알아채 이렇게 풀어놓는 구나... 에쿠니 가오리는.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은 서로의 단점은 어느정도 체념했을 때이고 조금은 서로에게 무덤덤하며 기대치조차 줄어든 상태이다. 조금의 애정이 없다면 결혼 생활은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계속해서 소통이 어긋나도 히와코가 집에서 안정을 찾고 힘들 때마다 문득문득 쇼조를 떠올리는 것이, 어쩌면 이들 결혼 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이었을지도. 그래도 많이 안타깝다. 각자가 원하는 행복이 모두 다르다고 하여도 히와코가 너무 많이 체념하고 울음 대신 웃음으로 넘어가는 일이 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