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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 <<숨그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선정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책. 아름다운 시적 언어와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잘 그려냈다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전혀 몰랐다. "숨 쉬다"의 "숨"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은 맞는걸까, 내가 모르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여러가지 상상을 해보지만 책에서는 정확한 의미를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과 함께 느낄 뿐이다.
소설이라고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산문 형식의 글에 당황했다. 소설 속 산문이 아닌, 진짜 작가의 수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설의 첫부분에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주인공의 성별은 물론, 공원에서 벌어지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그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럼에도 그는 일단 희망을 안고 떠난다. "너는 돌아올 거야."...17p
수용소...하면 생각나는 것은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독일이 세웠던 것이 가장 먼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갔는지 많은 매체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것들. 그런데 <<숨그네>>에선 낯설다. 같은 시대에 유대인이 아닌,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준다. 한 쪽에선 독일인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독일인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다른 가해자들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지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배고프고...배고프고... 배가 고프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희망과 자존심은 있다. 누군가에겐 손수건이 될 수도 있고, 할머니의 말 한 마디나 미래에 대한 끝없는 상상력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을 바꿨음을. 나는 손수건이야말로 수용소에서 나를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90p
내가 살기 위해선 부도덕하다고 여겨지는 일도 수용소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그런 일들에 단련이 되면서 점점 현실과는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은 단 5년이었지만, 젊은이에게는 청춘을 앗아갔다. 바깥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재능을, 희망을 빼앗아갔다. 때문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에겐 바로 설 자리가 없다. 집에서는 대리 동생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고, 가족에겐 자신을 추모했던 시간을 배신한 것 같은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들은 인생을 강탈당했다.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마음에 휘둘리지 않도록 애썼다. 희망이 좌절될 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귀향에 대한 희망은 놓을 수 없었지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이곳에 영원히 잡아두더라도 그 역시 내 삶이라고. 러시아 사람들도 살지 않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도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반쯤은 밀봉한 병 안의 수프가 된 셈치고 나도 이곳에 머물 것이다. "...184p
헤르타 뮐러만의 독특한 표현법이 많다. 제목인 '숨그네'를 비롯하여 '배고픈 천사', '심장삽', '볼빵' 같은 단어들. 처음엔 좀처럼 낯선 이 단어들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헤르타 뮐러 식의 이 표현법은 레오의 철저한 단절과 배고픔, 고립 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책을 읽는내내 무척이나 힘들었다. 사건을 서사적 묘사로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레오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이 산문식 글이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뒤늦게야 여운이 맴돈다. 그의 배고픔이, 단 5년이지만 평생과 같았을 수동적 삶이 그에게 미쳤을 영향이 얼마나 컸을 지를. 차라리 수용소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았을 그의 삶이 왠지 이해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