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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반어법 ㅣ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러시아어 번역, 통역가인 요네하라 마리는 그녀만의 번득이는 재치와 창의적인 소재가 가득한 에세이로 유명하다. 이미 마리 여사의 수필에 빠져버린 독자라면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소설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하고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미 그녀의 수필 여러 편을 섭렵했기에 이 소설에 그다지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고, 읽는내내 생각했다. 첫 수필을 읽고 그 독특한 문체와 표현에 빠져버렸고 몇 편의 수필을 거치며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그리고 펼친 <<올가의 반어법>>의 주인공인 시마는 이미 내게 있어 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요네하라 마리 여사 본인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올가의 반어법>>은 픽션이다. 마리 여사님께서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 사실 20%와 허구 80%가 합쳐진... 분명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동안 자꾸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어쨌든 마리 여사님의 소녀 시절이 소설 속에 녹아있고, 올가 선생님은 실존하시는 분이었으며 그들이 겪은 러시아의 역사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릴 적 체코의 프라하에서 소비에트 연방 학교에 재직했던 시마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다음해인 1992년 가을, 러시아를 방문한다.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 묻혀있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어려웠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프라하의 소녀 시절은 시마에게 언제나 그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잊을 수 없는 친구 카챠와 꿈을 심어준 올가 선생님, 선생님의 콤비인 엘레오노라 프랑스어 선생님에 대한 수수께끼를 러시아 방문 기간동안 풀어낼 수 있을지.
소설은 러시아 방문의 현재와 프라하 시절을 시도때도 없이 오고가며 두 상황을 모두 이해하게끔 몰아가고 있다. 프라하 시절의 시마는 너무나 자유로운 교육을 받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이 보여서 올가 선생님의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 시절 당시에는 그저 독특한 차림새와 말투(아이들에게 비난을 엄청난 칭찬으로 둘러서 표현하던 그녀만의 반어법)로만 기억되었을 올가 선생님의 비밀스런 행동이 조금씩 아이들의 눈에 띄면서, 특히 시마와 카차에게는 오랜 궁금증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오랜 시간이 흘러 이 두 소녀들에 의해 선생님의 비밀이 밝혀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도 마리 여사님의 뛰어난 사회 비판은 계속되는 듯하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의 교육(체코 프라하)보다 오히려 일본에서의 입시 교육이 더욱 말도 안되게 보였던 그녀의 시선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소 그녀의 재치와 창의성은 어린 시절 받은 체코의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소박한 생활을 갑자기 짓밟히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잡혀가서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얼마나 무서웠을까, 원통했을까 하고......"...161p
올가와 엘레오노라 선생님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던 시마와 카차는 라게리 강제수용소와 맞딱뜨리게 된다.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고통받고 사라져갔는지를. 나 또한 이들의 여정을 쫓아가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몰랐고 알았어도 함구했었을 그 수많은 상황들이 스쳐 지나간다. 냉전체제의 러시아 상황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스탈린이 생존했던 공포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청하는 사람, 숙청되는 사람, 숙청을 면하는 사람이라는 세 범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숙청하는 사람도 숙청을 면한 사람도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덕에 숙청을 면한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해빙 후에는 성가신 양심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다."...278p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미하일로프스키와 엘레오노라와의 관계가 그렇게 깨닫게 한다. 그저 버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또 살아가기 위해 여러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올가의 모든 것이 반어법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희극을 연기하는 것 같은 의상과 화장, 그리고 언동은 그 뒷면에 있는 참혹한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던 걸까."...429p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소재를 이 소설에 모두 쏟아부었다고 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렇기에 이리 완성도 높은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과 체코의 이야기가, 소녀 시절과 이혼녀로서의 시마의 현재 이야기가, 적절히 버무려졌다. 이야기는 이리저리 튀고 돌아오고 구분없이 계속되지만 독자가 길을 잃는 법이 없다. 그저 다음 궁금증이 풀리기를 기다릴 뿐이고 계속해서 읽어내릴 뿐이다.
아직도 나는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랴. 그 시절 그들이 그렇게 살아냈음을 알았고,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할 수 있다. 누구 한 사람이나 지도부의 잘못이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저 이 소설이 마리여사님의 마지막 소설임이 안타까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