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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충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 순간, 소름이 끼치며 어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진짜 벌레였던 적도 있고, 아니었던 적도 있다.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 무언가가 기어간 것 같은 느낌! 내가 그렇게 느꼈을 때... 어떤 행동이나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꼭 그 기억을 되살려봐야할 것 같다. 내가 나도 모르는 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수은충"이란 인간의 영혼에 침투하여 기어 다니다가 결국은 무수히 많은 구멍을 뚫어버린다는 벌레를 말한다고 한다.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찼을 때,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엄습한다면 그때가 바로 수은충이 기어가는 순간인 것이라고.
"작은 글자로 달아놓은 해설을 읽어보니 그것이 바로 수은충이라는 곤충으로, 사람의 영혼으로 파고들어 여기저기 기어 다니며 무수한 구멍을 뚫어놓는다고 합니다. 물론 실재하는 생물일 수는 없겠지요."...116p
어쩌면 수은충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이 몸으로 표출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죄를 알고있으나 인정하려들지 않을 때, 무의식적인 우리의 죄책감이 다른 수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내를 죽였거나<고엽의 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결실을 안았을 때<겨울비의 날>, 한 인간에게 원초적인 미움이 생겼을 때<잔설의 날>, 손자의 깨끗한 영혼이 더럽혀진 것을 함께하기 위해 인육을 먹고 나서나<대울타리의 날> 왕따시킨 아이가 10년동안 자신 앞에 나타날 때에도<박빙의 날>, 약에 취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도<미열의 날>, 우울증에 빠진 아내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아내의 옛 애인에게 넘겨줄 때에도<병묘의 날> 어김없이 수은충은 주인공들을 괴롭힌다.
<<수은충>>은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하지만 이 7개의 단편은 모두 "수은충"이라는 죄의식으로 묶여 있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아주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사소한 사건이나 아주 작은 원인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거나 인생이 바뀐다.
"세상 모든 일이 변하게 마련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사나운 커브길을 만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까지 틀림없이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환상이었다. 어제가 아무 변화 없이 오늘이 되었다고 해서 오늘이 당연히 내일이 되어줄 거라는 보장은 어디도 없다. 다만 있을 것처럼 생각했을 뿐."...33p
슈카와 미나토의 전작은 딱 한 편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 전의 작품에 비해 훨씬 정돈된 느낌이다. 훨씬 무섭고 섬칫하지만 주제는 오히려 무척 또렷하다고나 할까.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잖아.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믿어. 법률로는 처벌하지 못하는 악행이라도 틀림없이 심판을 받는다고 믿어. 그렇지 않다면 너무 억울하잖아."...193p
세상의 심판보다 더욱 괴롭고 힘든 것이 죄책감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해야 하지 않겠는가. 스산한 겨울비가 내리면... 앞으로는 수은충이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