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과학수사 이야기
마크 베네케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저 CSI의 그 어떤 시리즈보다 가장 좋아하는 라스베가스 시리즈의 길 그리섬 반장이 "법의곤충학자"이고 같은 법의곤충학자인 마르크 베네케가 실제 범죄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여기서 함정은 "곤충"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곤충이래봤자 개미, 파리, 모기..정도이고 화면(정확하게는 CSI 안에서)에서  보아왔던 곤충들도 만든 것이려니...하는 생각에 별로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책장을 넘기고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는 사진들과 그림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온통 징그럽기 그지없는 구더기떼(한 마리가 아니다.), 시체, 그리고 해골들까지... 비위가 강한 편이라 이런 것들을 잘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곤충들 사진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 이렇게 보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사진과 그림들을 굳이 실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는 단순한 범죄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법의곤충학자가 겪은 사건들을 풀어내어  해결하는 과정을 많은 사례들을 통해 밝히고 있지만, 저자는 흥미 위주의 서술이 아닌 다양한 시점의 관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곤충들(특히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와 파리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종과 수를 자랑하는 곤충들 중에는 죽은 동물이나 시신을 갉아먹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곤충에 의해 빚어지는 신체의 부패는 물론 보기에 좋지 않다. "하지만 구더기의 기생으로 인한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생명의 순환과정은 멈추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 생명을 빚을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24~26p )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죽은 자의 신체를 이루고 있던 물질이 다시 생명의 순환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구성 물질로 해체되기 위해 곤충들에 의해 먹힌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과학자로서의 임무.... "법의곤충학자"로서 마르크 베네케는 개인적으로 죄의 유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임무가 현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과학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므로 유죄냐 무죄냐에 관심을 갖게 되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시키는 것 같다. 또한 유죄냐 무죄냐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다 보면 전체 진실을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학자이기 때문에 피의자의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 상황에 맞는 진실은 무엇인가!를 가장 최우선에 두는 것이다. 때로는 진실이 죄인을 풀어주게 되는 일이 있거나, 죄가 없어도 당시 상황의 진실에 따라 근무 태만 등으로 기소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과학자는 판사가 아니므로 "진실"을  밝히는 데만 집중할 뿐이다. 

낡은 범죄생물학에 대한 생각.... 그가 독일인이기에 진실에 가감없이, 오히려 더욱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 같다. '인종학'과 '범죄생물학'의 이름을 쓰고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으로 요리된 나치즘.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인지를 그 당시의 여러 과학자들이 내놓은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책들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오류들에 대하여 말하고 왜 그들은 양심도 없이 그렇게 정치와 손을 잡았는지 비판한다. 과학을 잘못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미끼로 얼마나 큰 잘못들이 정당화되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런 저항의 목소리가 묻힐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학자라면 유행 이론에 휩쓸릴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철저히 검증하고 불편할지라도 사실적으로 정확한 연구 성과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양심은 가져야 한다.

이런 양심은 현대의 범죄생물학자도 꼭 갖추어야만 한다. 깔끔하게 증명된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 항상 점검하고 태도를 분명히 하라. 최후의 보루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사실이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의견과 이해관계에 빠지다 보면 우리가 그토록 자부하는 과학이라는 게 정치 논리에 의해 훼손당하는 지극히 불편한 상황을 자초하게 된다. 진리가 아닌 것은 불편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치욕까지 불러온다. "    ...397p

단순한 과학 수사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만의 철학이 가득하다. 내가 그동안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많은 것들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엔 비록 역겨울 정도로 징그러운 사진들에 기겁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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