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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벤 길마 - 하버드 로스쿨을 정복한 최초의 중복장애인
하벤 길마 지음, 윤희기 옮김 / 알파미디어 / 2020년 7월
평점 :
전신에 50% 이상 3도 화상을 입고 14번에 걸쳐 수술을 하고도 이겨냈던 이지선 작가는, 한국에서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지만 유학을 갔던 미국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무너진 얼굴에 신경쓰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사회 복지에 대해 공부했다고. 미국은 물론 차별이 심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문화 개방성도 높은 나라이다. <하벨 길마>라는 책을 읽고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은 에리트레아의 언어인 티그리냐어로 "자긍심"이라고 한다.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나라의 자긍심을 중복장애인 딸에게 심어준 것이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집안일에 소홀하게 하거나 도전이나 용기를 잃지 않게 키웠다. 조금의 걱정은 됐지만 스스로 독립하려는 딸을 끝까지 막지는 않았다. 그래서 비록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는 중복장애인이었지만 하벤 길마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찾아 한 발, 한 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 부류의 사람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회는 편협한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이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어요. "...13p
앞부분 하벤 길마의 어린 시절을 읽다 보면 많은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참 운이 좋아서 이 여인은 많은 것들을 누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장애 학생들을 돕는 선생님이 곁에서 많은 것들을 챙겨주고 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센터와 교육 프로그램이 있고 집에서는 어느 정도 지원이 된 듯하니 말이다. 사회와 가정의 완벽한 도움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하벤 길마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자신만의 세상에 쉽게 갇힐 수 있었고 비장애인에겐 쉬운 일도 많은 생각과 걱정을 통해 용기를 내야만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자신감은 자기 내면에서 나온다는 말. 안내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지팡이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배나 비행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자신감은 자기 내면에서 나온다."...190p
하벤 길마의 진정한 도전은 대학 입학 후에 나온다. 진정한 독립을 한 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아직까지 중복장애인을 받아보지 않았던 각 사회 단체 안에서. 많은 편견과 오해 속에서 하벤은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그제서야 하벤이 걸어온 길이 그저 운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다시금 우리나라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장애가 없어도 장애를 가진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살아가기 힘들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직접 겪은 것이 아니니 그분들의 고통은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시각장애 거지의 이미지가 깊게 박혀 있어 시각장애인도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221p)하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