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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나의 딸 그리고 나
로릴리 크레이커, 강영선 / 경원북스 / 2018년 3월
평점 :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너무나 좋아하던 <빨강머리 앤>이 한국 최초로 완역되었다. 그때 당시 한손에 쏙 들어오는
판본으로 10권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꼭 갖고 싶었다. 같은 생각이었던 친구 몇몇이 함께 반 여자아이들을 10명
모아 팀을 꾸렸다. 한 명씩 각 1권을 사고 돌려읽자고 모의했다. 같이 몰려다니지 않았던 친구도 있었는데 그때를 시작으로 다함께 친해졌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도 난 뒷번호를 뽑아 10권 모두를 읽지는 못했다. 그 전에 졸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친정엔 그때 당시 읽었던 한 권(8권)과
뒤늦게 받은 한 권(9권)이 아주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다. 주말마다 보았던 <빨강머리 앤>애니메이션의 내용이 나오는 1권도
좋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부분은 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분이었다. 우리 엄마는 갖지 못한 모습의 엄마, 내가 바라던 엄마의
모습을 엄마가 된 앤에게 투영한 것이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빨강머리 앤> 완역 책은 언제나 내게 로망이다. 내 어린 시절 풍부한 감성을 심어주고, 미래를 꿈꾸게 하고, 나와는 너무나
다른 앤을 통해 나도 성장할 수 있었다. 엄마가 되면 딸과 함께 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내게 인생 책이었던 <빨강머리
앤>이 우리 딸에겐 인생 책이 되지 않아 함께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도 내겐 소중한 책이다.
<빨강머리 앤 나의 딸 그리고 나>는 그렇게 선택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딸의
이야기와 함께 썼다고 해서. 내가 함께 공유하지 못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고 싶었나 보다. 막상 읽어보니 그들 사이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었고 그래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타깝게 바라보며 읽었다.
이 책의 작가 로릴리 크레이커는 이른바 '고아'이다. 제목의 앤, 나, 나의 딸의 공통점도 '고아'이다. 고아가 아닌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결핍과 사랑이 존재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이 함께 한다. <빨강머리 앤>을 집필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 또한
'고아'이다. 책을 읽으면 이 네 명의 이야기가 혼재한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들의 이야기는 때론 감동으로, 때론 교훈으로 다가온다.
"그때 나는 균열들에 집중했다. 알다시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균열을 갖고 태어난다. 거기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가 더 있었다. 원래의 가족을 잃으면서 생긴 균열."...59p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있고 그럴 거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평생 가느 그들의 균열과 상처는 아마 우리가 상상하는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일텐데, 태어날 때부터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지축이 흔들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가며 <빨강머리 앤> 완역책을 얼마나 다시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작가가 설명하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너무나 선명히
떠오름과 동시에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싶은 욕망이 꾸물꾸물 계속해서 피어오른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땅으로 여행할 수
있는 작가의 처지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내게 있어 앤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당당할 수 있는 힘, 우물거리거나
멈칫거리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힘, 마음 먹은 것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의 결핍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의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그녀의 삶도 궁금해졌다.
누군가의 삶은 항상 깨달음을 준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네 명의 인물들
삶을 따라가며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이들에게 일상 속에서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행복하자고, 서로 힘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