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책을 선택할때에는 몇가지 지키는 수칙들이 있다.  

되도록 주관적으로 선택할 것. 그리고 관심사에 충실하여 선택할 것.

책을 읽을 때 만큼은 커피전문점에서 내 취향에 맞는 나만의 커피를 주문하듯, 철저하게 취향에 근거하여 선택해야만 후회도 없고 읽을 때 조금 더 몰입이 된다는 나의 개인적인 특성을 고려한 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그냥 막연하게 눈길이 가게 되는 책들이 있기도 한데 바로 몇몇 유명한 상을 수상했다는 광고를 보았을때가 바로 그러한 때가 아닐까 싶다. 

울프 홀은 맨부커 상이라는 상을 수상하였다고 하여 출간시에 꽤 여기저기 광고가 되었던 책이기도 했거니와 여기에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 중 하나인 역사적 배경을 아주 중요한 이야기의 요소로 다루고 있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조금은 음습하고 은밀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나의 취향에도 딱 맞는 책이기도 하다. 꼭 읽어보고 싶은 위시리스트! 

 

 

올해도 노벨문학상의 수상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고은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들이 꽤 많이 쏟아졌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풍부한 어휘가 가지는 감성을 번역으로는 100%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로 인해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엔 한번~이라는 기대가 컸었던지 조금은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고은시인 대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라틴문학의 거장. 노벨문학상을 수상할만큼 대단한 작가이지만 아직은 미국이나 영국문학들이 대세를 이루는 국내 세계문학에서 익숙하지 않은 작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염소의 축제는 바로 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토마토가 전래되던 시절의 이탈리아 마을 어딘가에서 벌어진 일화를 다루고 있다는 토마토 랩소디. 토마토가 전래되면서 이탈리아에서 피자와 파스타등의 이제는 대표적인 이탈리아 요리가 된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당시의 젊은이들이 가졌떤 꿈과 이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뭔가 새롭게 펼쳐진다고 하니, 하늘에 둥둥 떠있는 토마토를 매게로 그 이야기들이 어떤 맛있는 조화를 이룰지 궁금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그 이야기 속에 녹아있을 이탈리아의 시골 곳 여러 모습들도 궁금증을 더하는 이야기. 

  

 학창시절 조정래라는 작가의 이름은 언제나 위대하게만 느껴지곤 했다. 읽기에도 숨에 가쁜 대작들을 연이어 내어놓고, 대한민국의 문학사에 그 이름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더하는 대단한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거니와, 그가 보여주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나 살아 숨쉬는 것 처럼 생생했으니 말이다. 그저 작가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읽고 싶은 이유가 설명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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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절판


저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너무도 유명해 데카르트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따라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인간의 사유가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가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말에는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의 의미가 담겨 있고, 그 안에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필요도 없다는 말. 그 안에는 사람이 존재하는 시작점 또한 사유에 있으며, 변화하고 생동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조금 더 큰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 하지만 이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는 책 한 권을 나는 손에 들고 있다. 바로 <생각버리기 연습>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도 없다고 했던 말이 너무도 유명한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형물이 학문과 지성의 상징처럼 표현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생각을 버리는 연습을 강조하는 한 권의 책. 세상이 강요하는 지적이고 학문적인 인간상에 완벽하게 역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늘 또 다시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경박함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려 애쓰며,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라고 생각하던 나에게 이 책은 그저 제목만으로도 살짝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이 말하는 <생각버리기 연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왜 <생각버리기 연습>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걸까? 책의 첫장을 펼치기 전 내 머릿속에는 궁금증 가득한 물음표가 한 다발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책 장을 펼치고 난 다음 내가 책을 읽기 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생각안하기 연습>이 아니었다. 제목 그대로 <생각버리기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통스럽고 갈등하게 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효용이 없는 아무 쓸데없는 생각들을 간추리고 잘라내어 생각의 공간을 더욱 넓히고 그 깊이를 깊게 하는 방법을 다루는 책이었던 것이다. '생각하라'라는 명제와 강요등에 짓눌려 어느새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어버린 사람들, 강박처럼 잠시도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갈등에 눌려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각들 중 쓸데 없는 생각들은 모두 버리고, 정말 가치 있는 생각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라라는 바로 그런 내용말이다. 순간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은 끊임없는, 그러나 가치 없는 잡다한 생각들로 인해 정말 필요한 생각의 공간을 남겨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수를 짚어내고,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생각들을 위해 생각을 버리는 연습. 이 책은 생각을 버림으로써 생각을 채울 공간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효율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의 저자가 스님이라서 일까? 사실 <생각버리기 연습>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표현들이 꽤 존재한다. 뭐랄까.. 말 꼬리를 물고 물다가 어느 순간 ....응??...하게 하는, 난해함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우리가 평소 저지르는 생각의 과도함을 짚어내 살짝 찔리게 하는 의미심장함도 있고, 현실에서 우리가 자주 범하는 생각의 충돌이나 그로 인한 불필요한 갈등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와 효과적으로 생각을 다루고 불필요한 생각들을 잘라내는 방법들도 이야기 해준다.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까지 생각을 하며 사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말 필요한 생각을 위해 필요한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내어보고 싶다면, 진짜 생각을 위해 쓸데 없는 생각들을 몰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싶다면, 한번 쯤 읽어볼만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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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e 2010-10-2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지나다가...
좋은 리뷰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7기 문학A조 마지막 도서 <퀴르발남작의 성>
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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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책장을 한참 열중하여 넘기다가 다시 책 표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퀴르발남작의 성>, 최제훈 소설집.....???? 아...소설집.... 단편집이었구나...
어쩐지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드는 부분이었다. 무언가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는데..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이제 막 펼쳐지는가 싶었는데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보통은 책 표지부터 뒷쪽의 추천글까지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읽고서야 첫 장을 펼쳐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퀴르발남작의 성>만은 무심코 소설집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 소설집이라는 단어보다는 단편집이라는 단어에 더욱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퀴르발남작의 성>은 그렇게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책의 제목과 동일한 <퀴르발남작의 성>이라는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만큼 이 이야기는 참 흥미로웠다. 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더 펼쳐지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짧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쓴 작가의 단편집에는 무슨 이야기가 더 실려 있을까? 충분히 이야기를 끌어내려 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소재를 이렇게 단박에 잘라내고 단편으로 정리해버린 강단있는 작가의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퀴르발남작의 성>은 그렇게 <퀴르발남작의 성>이라는 제목과 동일한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하게 하는 시작을 열고 있었다.

<퀴르발남작의 성>에는 총 8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소재도 모두 다르고, 주인공들의 국적도 다른 이야기들, 때로는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한번쯤 들어보았던 것 같은 주인공이 출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로 나의 이야기처럼 어딘지 모르게 데자뷰현상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이기도 한 이 8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제각각인듯 보았지만 모두 하나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기도 한, 그래서 끝을 알 수 없고 끝이라는 것이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알 수 없이 얽히고 섥힌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 8편의 이야기 중 특히나 맘에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첫 장을 장식한 <퀴르발 남작의 성>과 그리고 영화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을 앉혀놓고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자 박제>이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놓고, 영화사적인 측면을 주로 다루는 강단의 대학교수와, 영화를 만들었던 제작자와 배우, 또 이 영화를 리메이크 했던 또 다른 작품을 놓고 서로 비교하는 블로거와 실제 이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었던 실존인물이라는 각자 다른 인물들을 놓고 그들이 말하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이야기의 실제와 그들이 각자 내리는 평가에 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하나의 매게를 놓고 모여있는 이들이지만 각자 다른 세상에서 각자 다른 위치를 가지고 하나의 대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이들의 말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이게 과연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하는 평가와 회상이 맞는지 의심을 할만큼 서로 상이하다. 결국 <퀴르발 남작의 성>은 때로는 모두 같은 대상을 높고 관찰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 비추어 모든 것들을 평가하고 각자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또 그래서 결국엔 그 대상의 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림자 박제>는 살짝 언급했던대로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다중인격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이 실제로는 다중인격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멍키스패너로 사람을 죽이고 잡혀온 후 상담실에서 자신이 다중인격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중인격이 아니라며 자신이 여러 사람들의 인격을 가지게 된 과정들을 설명한다. 각자 다른 인격들이 공존하지만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해리성장애가 아니라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실제로 제어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만들어낸 인격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하고, 자신이 그토록 믿고 있던 다른 인격에 대한 제어능력 또한 상실되어 해리성장애를 자신 사람들처럼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인격의 존재까지도 만들어내는 환자가 되어간다. 또 이 모든 이야기조차 뒤집을 수 있는 하나의 반전까지도 품은 채 말이다. <그림자박제>는 그래서 돌고 도는, 이야기의 순환, 진짜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자꾸만 혼돈하게 하는 재미를 보여주고, 이런 이야기의 흐름은 영화 아이덴티티를 연상하게 한다.

그 외에도 <그녀의 매듭>이라든지 <마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찰>등, <퀴르발 남작의 성>에 실려있는 8편의 이야기는 각자 다른 소재를 가지고 독특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라는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작가의 유머를 엿볼 수 있는 기지와 위트까지 곁들여 말이다.

모두 다른 주인공과 조금씩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퀴르발 남작의 성>에 실린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에는 한가지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점들도 있긴 하다. 바로 시선의 변환이다. 남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고정적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시선에서 투영된 결론을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사람들이 각자 만들어낼 수 있는 시선. 그 시선이 이야기를 조금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만든다는 바로 그 점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바로 당신 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들리는 현실성을 곁들여 만들어낸 이 이야기들을 통해 단순한 읽는 즐거움 이외에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시선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또한 <퀴르발 남작의 성>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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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헤르타 뮐러의 글들은 쉽지 않다. 숨그네와 마음짐승이라는 두 권의 책들을 읽으며, 이미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은 나를 편안하게 이야기 속에 잡아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앞에서도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만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앞서 경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를 마주하던 순간에도 나는 어느 정도의 각오를 해야만했다. 이 책이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써내려간 그 많은 단어들과 문장들은 여느 글들과는 다르게 무거운 저 깊은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을 것이며, 나는 또 그 말들과 의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을 들여,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미 내가 먼저 읽었던 헤르타 뮐러의 다른 작품인 <숨그네>와 <마음짐승>보다 훨씬 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만큼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깊고 깊은 이야기였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혹은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아디나와 클라라라는 이름의 두 여인이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을 하고 있는 아디나와 비밀경찰의 일을 하고 있는 애인을 두고 있는 친구 클라라. 친구이기도 한 이 두여인은 서로 각자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디나는 체제의 억압과 힘에 정면으로 맞설수는 없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클라라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힘을 몰래 업어서라도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쪽을 선택한다. 절친한 친구인 아디나에게조차 비밀로 해야할 만큼 당당하지 못한 비밀을 가진채 말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다른 모습은 억압과 감시라는 당시 루마니아의 모습과 더해져 이들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노동영웅이 추앙받는 그들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고된 노동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압박은 아디나가 가르치는 아이들조차도 피해가지 않는다. 국가가 힘으로 시대를 억누르고 무작정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라고 그 힘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아디나는 노동의 대상으로 간주되어버린 아이들에게 그저 착취만을 당하지 않도록 나름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작은 저항을 하고, 자신만의 한 조각 양심을 지켜간다. 그리고 대신 체제에 저항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더욱 치밀하지만 더욱 공포스러운 감시의 대상으로 선택되고야 만다. 은밀하고도 공포스러운, 그러나 숨기려 하지 않은 거대한 힘 앞에서 점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국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매일매일 쫓기며 살아야 하는 힘없는 여우를, 사냥꾼의 덫에 걸린채 몸부림 칠 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그 시대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 클라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그녀가 얻고자 하는 아주 작은 혜택을 위해 절친한 아디나에게조차 비밀로 해야할만큼 은밀한 비밀을 등에 업는 쪽을 선택한다. 비밀경찰인 애인을 얻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몇가지 혜택을 얻는 것으로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선택한 클라라.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은밀한 애인의 관계가 아디나에게 알려졌을 때 그녀들에게는 '우정'이라 불리우는 관계마저도 허락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끝없는 감시의 공포에 시달리는 자와 감시를 하는 자의 연인 사이에 우정이란 그 누가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클라라와 아디나의 모습은 그래서 친구라 말하는 이들에게조차 믿음을 남겨주지 않는 시대의 잔인함이기도 하다. 또한, 비록 미비하고 연약한 저항이라 할지라도 나름의 방법으로 체제에 저항하려 움직인 아디나와 비밀경찰인 애인을 둔 클라라의 사이는 그렇게 당시 루마니아에 존재했던 수 없이 많은 군중의 모습과, 그 시대에 존재했던 억압과 감시, 그리고 가난이 인간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들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양심을 버리고 무릎꿇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모습이기도 하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안에서 그녀들이 살아갔던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들 뿐만이 아니다. 그녀들과 함께 같은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강압과 감시, 가난과 허기가 사람들을 얼마나 처참하게 몰고가는지를 끝없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보다, 그의 목을 걸고 있는 한 가닥의 줄이 자신에게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가늠한다. 또, 힘을 가진자의 잘못은 언제든 무슨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전가될 수 있으며, 그 힘으로 그 어떤 것이든 손쉽고 당당하게 얻을 수 있음을,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제나 위태롭게 한 순간 한 순간을 버티며 살아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장 곳곳에는 노동자와 같은 수의 절도범들이 존재한다 결론짓고, 감시와 압박을 정당화 한 세상. 자유와 의지보다는 타인에 대한 압력과 복종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들이 한때에는 지녔을지도 모를 희망과 열망 대신 무기력만을 채워넣고 시대가 강요하는 대로 가난의 고통과 감시의 공포에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그 무기력과 무감각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가난은 피할 수 없고, 허기는 익숙해졌지만,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지 않기 위해 그들은 훔치고 숨긴다. 다른 이들이 모두 훔치기에 자신도 훔친다. 또, 그들보다 조금 더 힘을 가지기 위해 훔치는 타인을 감시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모두가 훔치고 모두가 감시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다. 권력이라는 힘 앞에서 힘없이 늘어진 여우였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서로를 감시하는 더욱 거대한 사냥꾼이 되어 서로를 향한 덫을 놓고, 서로가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 하기를 기다리는 공포스러우리만치 무감각해진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마치 그것만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도 된다는 듯이 망원경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서서 숲을 보는 사냥꾼처럼...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익숙해진 상태로 시간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달라져도 다시 힘을 얻지 못했다. 분명, 여우의 머리가 잘리기 전 도망한 아디나는 시골로 숨은 뒤 TV를 통해 그들을 억압하고 감시한 세상이 종결되었음을 알게 되지만, 세상의 변화를 느끼지는 못한다. 여전히 세상은 억압당하고 감시당했던 그 때처럼 흙색이다. 벽의 사진들은 사라지고, 벽보는 더 이상 붙지 않지만, 억압과 감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여전히 그 세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욕조 위에 떨어진 해바라기 씨 껍질이 이제는 차창 밖으로 내뱉어질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없다. 이미 아디나와 클라라가 살았던 세상에서 억압과 감시는 사냥꾼이 아닌 여우 그 자신들이 서로를 향해 하고 있었기에, 사냥꾼이 사라진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여우의 모습을 한 사냥꾼만이 남아있을 뿐이니 말이다. 

 

아마도 헤르타 뮐러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잘못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또, 그렇게 흘러가 오랜 시간 굳어져버린 잘못된 시대의 모습에는, 이미 돌아갈 제자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수 없이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강인함을 퍼트리지만, 실제로 그녀가 경험한 고국 루마니아가 겪은 시대의 고통은 그렇게 한 순간 사라지지 않았음을.. 현실은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한번 잘못 들어선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단언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더욱 시대가 강요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잘못되어서는 안되는 시대의 흐름을 역설하고자 한 것일테다. 그녀 자신이 그 잘못된 시대와 공포의 시간들을 버티며 살아온 산증인으로 옹이진 상처를 끌어안은 채 여전히 그 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헤르타 뮐러 그녀의 시대를 아디나로써 살아왔다. 또한 그녀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의 클라라처럼 비밀을 간직한 채 자신에게 왔던 친구를 두고 있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경험했던 배신과 의심, 공포와 두려움을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속에서 보여주고 잘못된 시대가 인간을 얼마나 바닥으로 끌어내리는지를 보여주면서도, 한 켠에는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속의 클라라가 아디나에게 집단체포에 대해 알려주는 것으로  마지막 신의를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은, 여우와 사냥꾼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치졸해졌던 인간에게도 그 어딘가에 희망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그녀의 바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경험한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잔인했다 하더라도, 그 현실을 벗어날 방법 또한 사람에게서 밖에는 찾을 수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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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  

화제가 되었던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의 작품 고은시인이 노벨 문학상에서 다시 고배를 들게 된 것은 아깝지만 그 대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 작가의 글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 - 

KBS 책 읽는 밤에 소개되었던 책으로 편지 글로 이루어진 책의 형식이나 한 마을의 사람들이 책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궁금했던 책.

꿀과 연기 냄새가 나는 소녀 - 

사실 꿀과 연기 냄새가 나는 소녀에 대한 사전정보는 거의 없지만, 어딘지 꿈속에서 나오는 듯한 몽환적인 모습의 소녀가 그려진 책의 표지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위시 리스트에 담겨 있는 책이기도...

빵과 장미- 

많은 명사들이 추천한 책이라는 점에서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사실 감은 잘 잡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은 이야기이니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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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15: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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