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의 작가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2015년 작품 모음집이다. 인터넷에 사전 공개한 시들 중 나름 손길을 탄 것들만 모았다고 저자를 밝히고 있다. 정말 그래서일까? 시들이 가슴에 와닿고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중 특히 나를 찌른 것은 ‘화살기도‘라는 시다.나태주의 시는 어렵지 않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이 나열된 시집은 내게 쥐약이다. 벽에 던지고 싶던... 나태주의 시는 내게 읽고 감상할 시간을 준다. 한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게 한다. 이 인간미 넘치는 시에 감동하다 마음이 먹먹해졌다.30대 초반까지 읽던 시를 어느 순간 접었었다. 전공 분야의 책에 매몰되 시나 소설 따위(?)에 눈길을 줄 수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슬슬 시가 읽힌다. 다행이다. 녹슨 감성에 부드런 기름칠을 할 때가 됐다.
이 책의 부제는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III‘이다. 전작인 <국보순례>와 <명작순례>를 잇는다. 표지와 지면만 보면 전문학술서적일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술사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대중서 서술에 일가견이 있는 저자인지라 독자 편에서도 어려움이 없다. 안목眼目은 사전적 의미로 ‘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그러한 눈을 가지고 산 전문가들과 그런 눈으로 미술을 향유한 이들을 이 책에서 소개한다. 전자로서는 강세황, 김정희, 최순우 같은 이들을, 후자로는 안평대군, 손재형, 전형필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물론 책에는 더 많은 사례들이 나오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유명한 저자답게 유홍준의 글에는 재미가 있다. 그의 글이 좋은 것은 모든 내용이 다 읽을만해서라기 보다는 독자의 눈을 끄는 주제를 잘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 역시도 읽노라면 도자기 한 점, 건물 한 채가 저기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착각에 빠진다. 멀어 보이던 화가들도 어느새 곁에 있는 듯하다. 과거의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주변인들에게 종종 말한다. 중학교 부적응 몇 년째라고. 이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인들에게 위안을 받으려는 심리에서 이러지 않았나 싶다. 한편 이런 모습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퇴행적인 자신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인사이동에서 또 중학교 발령을 받았다. 이제 중학교 5년차. 급변하는 학생들을 내 스타일로 바꿀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게 낫고 쉬운 것임을 절감한다.2월의 방학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여러 선후배 선생님들의 자료와 수업을 참고하고 학급 경영과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권순현 선생님의 <강의하지 말고 참여시켜라>라는 책이다. 2015년에 산 책을 이제사 펼치게 된 것이다.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절감했다. 다행히 2018년 한 연수원에서 권순현 선생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강의하지 말고 참여시키라‘는 말은 참 울림이 크다. 학생참여수업을 준비하는 내게 강한 지침이 된다. 생동감 있는 오프닝의 세계, 효과적인 복습법, 학습 동기 부여로 풍성한 수업하기 등 그의 수업은 학생이 중심이 되어 교실을 춤추게 한다. 물론 내가 그의 수업을 그대로 따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와 나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다만 그의 도전과 제안은 이제 막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내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그간 내가 얼마나 교육철학이나 교수법 없이 막 수업을 해왔는지 심각히 반성하게 되었다. 아마도 오는 3월이면 나는 도전과 실패의 연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것이다. 어여 3월 첫 수업이 오길 고대한다.
직업적인 문제로 준비할 것이 많은 2월은 여유로운 독서가 어렵다. 시간을 내려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으나 마음은 이미 3월 준비에 가 있으니 독서가 아니라 그저 책장 넘기기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어렵게 읽은 문고본 하나.기독교인으로서, 언제나 약자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의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예민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강소국 이스라엘과 땅의 전쟁>의 저자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 출발하여 해당 지역에서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며 경험한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성, 종교성, 정치성, 외교성 등의 색깔을 약하게나마 두루 가지고 있다. 저자의 강한 주관도 군데군데 드러난다.익히 알다시피 기독교와 이슬람은 이란성 쌍생아다. 이름만 다른 같은 신을 공유하며 자기네들의 신앙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꼽는다. 다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중 어느 노선을 따르느냐에 따라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입장은 큰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문제는 다음부터이다.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점유권을 주장할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성경이라는 등기부등본이다. 그들은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강하게 주장한다. 반면 아랍인들은 비잔틴 시대 이후 이슬람이 통치를 시작한 AD638년부터 1917년 오스만튀르크 시대까지 1,000년 넘게 팔레스타인에 살며 땅의 권리를 주장한다. 누구의 말이 옳으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지점이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위와 같은 문제를 만든 장본인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이다. 양측을 적절히 이용한 영국은 서로에게 유리한 나라를 세워주기로 약속했지만 지켜질리 만무했다. 결국 자신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국제연합에 이 문제를 넘겨버린다. 제국주의 국가의 무책임한 행동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유대인들의 강열한 바람대로 세워진 현재의 이스라엘은 5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 끝에 영토 확장, 인구 증가,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특히 작년(2018)에는 그들의 오랜 염원이던 예루살렘의 수도화도 미국의 지지 속에 완수했다. 그만큼 주변 아랍권 국가들과의 관계는 틀어졌다. 이 책은 얇지만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일까 중동 지역의 근현대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제법 있다. 적지 않고 생소한 지명과 인명은 책 이해를 더디게 한다. 또한 저자의 이스라엘 편향도 군데군데 드러난다. ‘깡패국가‘라는 용어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고대 제국를 싸잡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 점령을 불법 강점이라 표현한다. 제국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가지는 문제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이는 역으로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공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반도 고대 국가인 고구려의 영토 확장 역시도 불법 강점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저자의 이스라엘 유학 경험은 이스라엘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지 몰라도 주변 아랍국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은 듯하다. 책 속에 드러나는 저자의 편향성에 읽는 동안 적잖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시대나 사회든 역사 속의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이상향을 꿈꿨다. 그 이상향이 머리 속에서 끝나기도 하고, 그런 곳을 직접 만들기 위해 실천을 했던 이도 있다. 왜 사람들은 가기 힘든(정확히 말해 갈 수 없는) 이상향을 상상했을까? 의외로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의 고단함이 지금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런 곳을 그리게 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이나 극심한 수탈을 당하던 하층민들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증거를 저자는 각종 ‘야담집‘에서 찾았다. 야담집에서는 정부의 공식 문서에는 실릴 수 없는 민간의 구전 이야기 거리가 잘 녹아 있어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준다. 한편 가장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중국에서 넘어온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을 우리 선조들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양반이 아닌 평민들의 이상향까지 대변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 든다. 중국의 것을 절대시한 조선의 양반들이기에 이상향 역시도 배웠겠지만, 평민들은 그와 달리 당장의 현실을 벗어난 자신들만의 이상세계를 꿈꾸지 않았을까?또한 조선인들이 추구하던 이상세계의 으뜸은 <정감록>세계일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책이 대부분 <몽유도원도>와 야담집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정감록>을 읽고 실천했던 이들의 노력을 그냥 넘어간 점은 아쉽다. 어쩌면 문고본이라는 지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이이‘의 해주향약을 ‘이익‘의 해주향약으로 오타를 낸 점은 좀 결정적이다. 한 끝 차이지만 두 사람이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다른 데 저자가좀 더 면밀히 살폈어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로 읽기에 좋다. 몇 해 전에 읽은 <처녀귀신>처럼 얇은 지면에 작은 주제로 재밌게 한국문화를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동네 출판사의 이런 시도를 적극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