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남자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
톰 데이비스.태미 몰트비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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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남자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

아주 예전에 아내의 지인이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매를 맞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를 당혹케 한 것은 둘 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이다. 그냥 주일 교회만 나가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한다. 나는 남편이 진짜 크리스천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화가 나서 분에 못이겨 실수로 때릴 수는 있어도 크리스천이 어떻게 상습적으로 폭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냥 종교적 열심으로 교회에 다니는 무늬만 크리스천, 혹은 가라지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내심 단정했다. 그러나 [신실한 남자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보고 그 때의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도 마약과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아간 적이 있었다는 ‘데이비스’의 고백에 적지 않게 놀랐다. ‘자레드’의 이야기는 내가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와 비슷한 사례이다. 그가 유치장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회복했다고 한다.

어~, 그럴 수도 있구나, 이 책은 내 편견을 깨뜨렸다.



이 책은 신실한 남자의 비밀이라기 보다는 연약한 크리스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사례들은 극단적이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행동인데, 그런 죄들을 반복해서 짓는 이에게 ‘신실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보아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함에도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되는 죄를 반복해서 짓는 신자(남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점은 “우리는 그 누구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비록 심각하고 파렴치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 돌이켜 보면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도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고 그들은 크고 심각한 죄를 짓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차이가 크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와 그들이나 오십보백보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은혜가 필요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책을 덮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 편견없이 대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만약 내가 그런 사례들을 대할 때 과연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든다.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 신실한 삶은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해 보다 신실한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 책 속의 한 줄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나도 저꼴이 됐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는 한 길을 가고 있어 가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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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
존 스토트.데이비드 에드워즈 지음, 김일우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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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신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학’이 사회학, 철학과 같은 학문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학문의 정의로 볼 때,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선은 학문적으로 ‘신’을 ‘탐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이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탐구하는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유한의 잣대로 무한을 어떻게 잴 수 있고 어떻게 평가하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신을 연구의 대상으로 탐구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어머니를 연구의 대상으로 탐구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어머니를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연구한다면, 그 어머니는 더 이상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나와 애정과 나누며 감정을 교류하는 인격적 앎의 대상이지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를 신학자로 명명하는데 일종의 거부감이 있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신에 대한 분석을 내놓지만 실제로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그들의 관념과 이성에서 비롯된 만들어진 신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나의 이 생각은 보다 확고해 졌다.

존스토트가 이 책의 말미에서 결론적으로 잘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자는 이성을 최종 권위로 삼고 있다. 데이비드 에드워즈의 모든 논쟁점은 결국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해’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존 스토트의 답변은 자유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두 성경적인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근본주의자들을 비합리적인 광신자로 생각한다(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실제로 그러하다). 그래서 존 스토트를 향해서도 근본주의자와 유사한 주장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공격하며, 자유주의자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합리적일 때에는 칭찬을 한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자에게는 조금의 답도 주지 못한다. 기독교는 결코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거듭남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 책의 논쟁은 기독교에 대해 가장 호의적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에드워즈의 주장은 아주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그의 이해는 기껏해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철학일 뿐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책은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유사품과 진품은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두 제품을 진열해놓고 세밀하게 차이점을 보여주고 설명할 때 이 둘의 차이를 보다 쉽게 식별할 수 있으며 진품의 진면목과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의 논쟁점은 기독교가 어떤 점에서 세상의 종교나 철학과 괘를 달리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부각시켜주고 있다. 아직 기독교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미성숙한 성도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평신도가 보기에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평소에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보다 깊게 알고 싶어하는 성도들에게는 아주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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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미덕
톰 라이트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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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원제 “after you believe”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다는 뜻인가? 그것이 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또 한가지는 엄격한 도덕적 덕목(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포용과 사랑의 태도를 앞세워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 주제를 요약하자면,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가?” 옳고 그름을 어떻게 하는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로 환원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미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덕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단지 고매한 인품을 형성하는 것과는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판이하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이 훈련해야할 미덕의 본질과 내용,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심도있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저자의 주요 논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already but not yet)과 그리스도의 직설법과 명령법(Indicative and Imperative) 그리고 성화론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어려운 신학 내용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잘 녹여내면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소위 성화라 부르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에서는(저자는 서구권 교인을 염두해 두고 있지만, 우리나라 현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성화에 대해 잘 다루고 있지 않다. 성화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도 추상적이고 단회적으로 그칠 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를 성화라는 신학적인 개념대신에 미덕이라는 보다 익숙하고 현실적인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업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훈련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성령께서 이끄시고 계시는 우리의 본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서 제 2의 천성으로 나타나도록 우리가 계속해서 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급격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나아갈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초신자가 보기에는 조금 버거운 내용들이 있지만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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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앤드류 머레이 지음 / 총신대학교출판부 / 197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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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 그대로 겸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록 소책자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의 깊이에 볼 때 결코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아마도 겸손에 대해 이 책만큼의 통찰력을 가진 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겸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비결이 바로 겸손이며, 겸손은 그 자체가 영광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임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미덕이 바로 겸손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적 역시 겸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겸손은 겸양지덕이 아니다. 참으로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자로 여기는 자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자로의 좌절감이나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과는 다르다. 참된 겸손은 나 자신은 비록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고백하지만, 주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를 의지할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역으로 가장 작은 일조차도 주를 의지해야만 할 수 있다는 고백이 바로 겸손이다. 그래서 겸손의 자기비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반해 모든 교만은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다. 가장 거룩한 사역을 행할 때에도 교만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잠식해 들어오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겸손의 자리에 있는지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겸손은 나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의 임재의식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겸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겸손조차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할 것이다.

겸손은 하나의 사상이나 관념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앞에 무례히, 혹은 교만하게 행동한다면 그 겸손은 위선에 불과하다. 진정한 겸손은 사람 앞에서, 삶에서 드러나게 된다. 사람 앞에서 자신의 낮아짐을 참지 못한다면, 아직 겸손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린 사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고백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나보다 낫게여길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한가지 단점은 역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옛날 번역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에 꼼꼼히 읽게 되고 내용을 곱씹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간을 흘러도 그 가치가 흐려지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할 때, 이 책은 고전에 들기에 넉넉한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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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딸이라 행복해요
마이클 패리스 지음, 이윤혜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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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버지가 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떻게 딸의 삶을 지도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본인의 체험을 덧붙혀 이야기를 꾸려나가고 있기에 보다 더 현실감있고 생생하게 와 닿는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아들과는 관계를 잘 맺는 반면 딸과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거나 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은 많지만 딸과 아들을 구분해서 딸에 초점을 맞춘 책도 처음이었거나와, 아버지가 딸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는 말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미국의 일반적 분위기가 그런가보다 추측할 따름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딸보다는 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어렵다. 딸은 8살이고 아들은 10살인데, 둘째에다 딸이라서 똘망똘망한데다 애교다 잘 부려서 딸과의 관계에서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오히려 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다. 첫째에다 남자라서 그런지 덜렁거릴 때가 많고 서투르게 행동해서 나한테 혼날 때가 많다. 꾸지람보다는 칭찬과 격려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잔소리하게 되고 혼을 낼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딸에 비해 아들은 나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고 나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문제는 아들이냐 딸이냐라기보다는 자녀들을 대하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측면보다는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를 관점에서 읽어 보았다. 몇몇 특수한 경우(남녀의 차이로 인한)를 제외한다면, 혹은 딸을 대하는 방식 속에 녹아져 있는 원리를 끌어내어서 본다면, 딸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저자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고,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전을 받았다. 자녀들과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면 과연 누구와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자녀와 스스럼없이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와 자녀의 관계의 상당부분은 해결될 것이라 생각된다.

책의 후반부는 주로 장성한 딸(10대 후반)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금 당장 나에게는 필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딸을 양육할 때 어떤 방향과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조언해주고 있다.

저자가 말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결국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앞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자장 중요한 자세라 생각된다. 나의 꿈과 계획과 목표만을 추구하며 살 때, 가정을 소홀히 하고 딸을 방치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상원의원을 출마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저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가정과 자녀를 소중하게 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신앙인으로 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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