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로 삼일째 임시휴교를 맞고 있는 딸아이는 하루종일 손톱보다 작은 무언가를 만든다며 오물딱거리는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그리고 10월의 마지막 날 하루종일 비가 내려 외출은 생각도 못하고 펼쳐든 <밤나무정의 기판이>은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아니 오히려 심란한 마음을 무색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읍에서 북쪽으로 오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밤나무정 마을의 어느 겨울밤 금순이네 집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읍에서 돌아오던 덕재에게 발견된 눈 위에 쓰러져 있던 기판이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란이 일고 어느새 기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오래전 영안촌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판이의 조부모와 아버지 남섭이 형 장섭과 동생 평섭이 살던 영안촌 이야기는 사실상 밤나무정 기판이 이야기의 시발인셈이다. 원래는 착실한 사람이었던 기판의 할아버지가 뼈가 썩는 병으로 말미암아 심신은 물론 생활까지 피폐해지고 마침내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후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집안의 가장(家長)의 갑작스런 부재는 집안구성원에게 그 어떤 충격보다 크지 않을까..... 비록 살아생전 가장의 역할이 있으나마나한 정도로 미미하거나 있으니만 못하다고 여길지라도 말이다. 그후 가장없이 홀로된 장자동댁과 세 아들의 고단하고 애잔한 삶이 잔잔한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며, 성실한 가족들은 어느덧 나락같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기판의 아버지 남섭과 어머니 안골댁의 결혼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혼례식장에서의 한바탕 소란이며 눈발속에서 길을 잃은 신부가 유령처럼 남섭의 집으로 찾아든 것이며.... 책장을 넘길수록 감칠나게 전해져오는 사투리에 각 인물들의 목소리며 성격이 고스란히 들려오는듯해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안골댁의 집요한 욕심(?)은 마침내 귀하디귀한 아들 기판을 낳기에 이르지만 그녀의 왜곡된 자식사랑은 결코 기판의 삶을 평탄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는듯하다. 그저 하나뿐인 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한 안골댁의 일방적인 울타리 속에 갇혀 있던 기판의 어린시절의 추억들은 그시절 시골의 흙내음 풀내음을 폴폴~ 담아내고 있었다. 스물도 채 안 된 기판의 죽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되짚어보며 안타까움을 달래보지만 기판은 결국 그렇게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결코 기판의 이야기가 마냥 허구임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작가의 말>은 그림을 그려내듯 기판이 철없이 뛰어다니며 놀았던 밤나무정 마을을 보여주고 있다. 애잔한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하여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 깊숙이 담겨있던 어린시절 할머니를 따라 걷던 밭둑길이며 논둑길, 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가 떠올라 콧날마저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