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지는 새 - 서태지 컴퍼니 DVD BOOK
서태지 컴퍼니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1990년대 대중음악계와 대중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사람이 있다.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서태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부터였다. 당시는 댄스가수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때였다. 그렇기에 ‘난 알아요’를 들고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낯선 이름의 그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춤을 추었고 빠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 서태지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는데 그 방법이 노래가 아닌 글이다. 침묵하기로 유명한 그가 말을 걸어왔다는 건 의아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노래라면 모를까 글이라는 것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는 서태지컴퍼니의 <낙엽지는 새>를 통해 대중들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통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노래로 못 다한 이야기들을 하려는 것일까?


새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새장 속에 있다. 그 중에는 ‘작은 새’도 있다. 작은 새는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들에 비하면 볼품없는 모양새다. 또한 나이 많은 새에 비하면 아는 것도 적다. 그래서 새장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팔려갈 가능성도 없다. 그런 작은 새의 예정된 운명이란 확고하다. 그저 하루하루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으며 꾸벅꾸벅 졸며 늙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새는 운명을 거부한다. ‘숙명’을 만나려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숙명이란 당연하다. 날고 싶어 하는 것, 새장 밖으로 날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야생의 동물들이 초원 위를 달리고 싶어 하듯이, 인간이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듯이 새는 새장 밖 하늘로 훨훨 날고 싶어 한다.


운명은 가혹하다. 새장뿐만 아니라 주위 새들의 놀림과 만류, 그리고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감옥’들은 작은 새의 날개 짓을 무겁게 만든다. 작은 새는 날지 못한다. 날고 싶어도 날지 못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 느껴야 하는 그 가혹감은 절망감 그 자체이다. 작은 새에게도 그 절망감이 찾아온다.


그러나 ‘열망’을 지닌 존재,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이들은 해내고야 만다.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알고 도전할 줄 안다. 작은 새도 그러하다. 그에게는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온갖 장애물이 도처에 깔려있지만 기어코 작은 새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하늘에 점점이 자신의 흔적들을 남기며 날개 짓을 시작한다.


물론 그 새는 더 큰 어려움을 봉착할 것이고 때로는 절망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장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총을 든 포수가 사방에서 노리고 있는 세상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또한 언제나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새는 돌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안전’하다는 이유로 가능성을 저버리고 남들과 똑같아 지기 위해서, 실패할 경우 그 대가가 참혹하기에 삶에서 아예 가능성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없애야만 하는 것일까? <낙엽지는 새>는 그것을 묻고 있다. ‘넌 어떻게 생각해?’라고.


그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모해 보여도 적지만 분명한 가능성이 있다면, 설사 가능성이 없더라도 도전해내고 기어코 성취해내려 했던 그의 삶은 기억하는 이라면 <낙엽지는 새>에서 서태지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를 추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낙엽지는 새>가 서태지가 말을 건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서태지의 행적이 보여준 것들을 떠올린다면 이 물음은 서태지를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태지와 소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서태지 정신’이라는 것을 이어받는 과정일 테다.


‘문화대통령’이라고 수식어보다 하나의 상징이자 도전,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서태지. 그가 말을 걸어왔다. 미운 오리새끼가 노력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백조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누구도 노력하지 않으면 가운데가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고 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낙엽지는 새가 될 것인가, 새장 속의 새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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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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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라는 표현을 써도 아깝지 않다. 예측할 수 없는 엉뚱한 소설가 박민규의 첫 소설집을 두고 ‘마침내 나왔다’라고 말한다 해도 아까울 것이 하등 없다. 그렇다. 마침내 박민규의 첫 소설집 <카스테라>가 나왔다. 문학동네작가상과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상문학상 후보에도 연달아 올랐던 박민규가 마침내 첫 소설집을 낸 것이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었던 소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갑을고시원 체류기」) 등 10개의 소설을 담고 있는 이번 소설집은 한마디로 ‘엉뚱함’의 결정체다. 제목으로 사용된 카스테라, 너구리, 기린, 개복치,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등만 해도 참으로 엉뚱하다. 저자에 대한 기본정보 없이 <카스테라>의 차례를 살폈다면 꽁트 모음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소설의 제목들만 그러한가. 내용에 비하면 제목들은 얌전한 편이다. 작품집의 미학 중 하나를 ‘난데없음’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웅웅 소리를 내는 냉장고의 전생이 훌리건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카스테라」, 지구 밖으로 나가보고 싶은 이유를 그렇고 그래서라고 말하는 ‘나’와 순전히 홍키통크맨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듀란’이 등장하는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유원지 같지 않은 유원지의 어느 날 밤 외국인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나가보니 ‘오리배세계시민연합’의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다는 「아, 하세요 펠리컨」등 난데없음의 미학은 어느 작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더군다나 끊어야 할 때 끊어야 하는 소설이 잘난 소설의 규칙 중 하나라고 한다는데 <카스테라>는 아예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있다. ‘무규칙’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소설들을 찾으라면 그 또한 저자의 작품들이 갖는 몫일 테다. ‘변비’를 가지고 사뭇 진지한 이야기를 꺼낼 듯하고 그에 걸 맞는 끝을 보여줄 법하다가 난데없이 야쿠르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게 만드는 그 재주는 저자가 아니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손재주일 테다.


하지만 <카스테라>가 엉뚱하기만 할 것일까? 아닐 테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소설집이 나온 것을 두고 ‘마침내’라고 반길 이유가 없다. 그럼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반기게 되는 것인가. 일류를 우선시하는 일등만능주의를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유유자적한 태도는 둘째치고라도 세상의 진지함에 깔려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해 가벼움을 위장한 치료약을 건네는 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 일 테다.


저자는 일등보다 꼴찌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이미 그것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또한 예리한 칼날로 비대해진 덩어리들의 거품을 뺄 줄 안다. 그것은 이미 <지구영웅전설>과 이상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에서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 저자는 따스한 양지보다 차가운 음지의 사람들을 보듬어줄 줄 알고 그들을 대신해 할 말을 하고 있다.


저자의 엉뚱함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테다. 오히려 진지한 일장연설보다 농담 같은 말에 숨겨진 날카로운 한마디가 더 인상적일 수도 있다. 「코리언 스텐더즈」만 해도 그렇다. 소설은 농촌에서 농사짓는 ‘기하 형’의 도와달라는 말에 화자가 농촌에 내려가 겪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정치인이 될 수도 있었던 운동권 출신 기하 형은 농촌에서 나름대로의 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외계인이 타고 있다고 추정되는 원반이 등장해 보물들은 절망감으로 바뀌게 된다.


처음에 화자는 기하 형의 말에 반신반의하다가 결국 실체를 확인하곤 세상에 도움을 요청하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외계인이 농작물과 가축들을 ‘절망’과 바꾸어놓았다고 말해도 세상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던 중에 기하 형과 화자는 원반이 남긴 ‘크롭 서클’을 보게 된다. 그것에는 대항할 수 없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는데 그 메시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저자의 ‘농담 속 칼날’의 위력을 확인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류, 삼류를 쳐다보는 그 시선은 또 어떠한가. 아버지를 밀어야 하고 ‘세상의 산수’를 깨우쳐 가는 푸시맨의 이야기를 다룬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취업준비생과 사장, 그리고 세계의 이류와 삼류들을 이야기를 다룬 「아, 하세요. 펠리컨」만 해도 저자의 글이 단순히 엉뚱하기만 해서 주목받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오히려 엉뚱함 속에서 따스한 것을 털어놓을 줄 아는 사연은 저자이기에 가능한 일 일 테고 <카스테라>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일 테다.


‘대형신인’으로 불리던 저자의 첫 소설집 <카스테라>. 난데없는 엉뚱함과 허를 찌르는 엉뚱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글픔과 애틋함, 그리고 즐거움이 샘솟는 이 작품을 말하는 데는 모 영화 홍보 문구가 적당해 보인다.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 그것은 <카스테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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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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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의 명성만 놓고 본다면 한국에 알려진 활동하는 외국 작가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연 최고로 뽑힌다. 그런 그가 돌아왔다. <해변의 카프카> 이후 2년여 만에 장편소설 <어둠의 저편>으로 돌아온 것인데 특히 이번 작품은 저자의 데뷔 25주년 작품이라는 타이틀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어둠의 저편>은 ‘마리’와 ‘에리’라는, 너무나 다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자정에서 오전 7시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중국 마피아, 창녀, 러브호텔의 직원들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도시의 삭막한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또한 <해변의 카프카>에서부터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관계’에 대한 것을 여전히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억’을 언급하며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두 주인공 마리와 에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자매다. 언니 에리는 ‘백설공주’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미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잡지 모델을 했을 정도다. 반면에 마리는 ‘숲 속의 대장장이’로 머리가 좋은 수재다. 또한 주위에 걱정도 끼치지 않는 믿음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알레르기 때문에 가족과 달리 혼자 밥을 먹어야 했던 에리에 비하면 마리는 그야말로 손이 가지 않는 자식이다.


형제나 혹은 자매가 이런 설정으로 등장한다면 보통 둘 중 하나로 내용을 예측할 수가 있다. ‘갈등’이나 ‘화해’하는 것이 그것일 텐데 <어둠의 저편>에서 이들의 관계는 그것을 크게 비껴나지 않는다. 마리와 에리는 한 집에서 살지만 한 집에 사는 것 같지 않은 관계다. 갈등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가족애라는 것이 없는 가족,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테다.


<어둠의 저편>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줄거리는 마리와 에리의 ‘화해’다. 비록 눈에 띄는 갈등은 없었다 할지라도 이들은 화해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가슴 속은 더욱 황폐해질 테니 말이다. 마리와 에리가 화해하는 장면은 마리가 밤사이에 만난 에리의 친구 다카하시를 만나는 것에서 비롯된다. 또한 다카하시와의 관계 덕분에 알게 된 호텔 ‘알파빌’ 사람들도 마리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한몫한다.


다카하시와 사람들 덕분에 마리가 에리와 화해하게 되는데 얻는 용기는 ‘기억’이다. 아마도 저자가 <달의 저편>에서 던지려고 했던 희망적이 메시지도 이것일 텐데 보이지 않는 서로의 끈을 이어주는 기억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의 ‘연료’로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밤의 시간 동안 이 같은 메시지를 얻은 마리는 잠만 자는 에리에게 간다. 그리고 가슴에 기억을 앉은 채, 에리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자매는 서로의 품을 나누게 되고 그 동안의 갈등 없이 벌어졌던 틈새를 단단히 조이게 된다. 기억을 연료로 삼아 관계는 더욱 탄탄해지는 것이다.


<어둠의 저편>에서 ‘보이는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며 또한 새로움을 찾기가 어렵다. 특히 백설공주 언니와 수재 동생이라는 자매의 이야기라고 것도 이제껏 많이 봐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보이는 이야기’는 실망스러울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저자는 ‘상징’적인 것들을 그림퍼즐 맞추듯 작품 곳곳에 배치하는데 노력하기 시작했고 <어둠의 저편>도 그렇다. 오히려 이 작품은 그 동안의 어느 작품에 비해서 그런 면이 더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에리와 마리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것일 텐데 그것은 에리와 마리가 밤 시간 동안 무엇을 했었는가 하는 것에서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잠만 잤고, 누군가에게 관찰 당했고, 텔레비전 속에서 비명을 질렀던 에리는 누군가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욕망 대상일 뿐이다. 물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런 류의 사람들은 쉽게 만족스러운 ‘행복’을 얻을 수 없다.


반면에 마리는 어떠한가. ‘숲 속의 대장장이’는 스스로 만들고, 돌아다니기를 겁내지 않는다. 에리의 경우에 비하자면 마리는 욕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또한 타인의 욕망 대상이 되는 걸 거부할 줄 안다. 이런 류의 사람은 에리와 같은 사람들보다 행복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 있고 작품에서도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자매 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의 소유물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의미’들을 갖고 있다. ‘보이는 이야기’만 본 뒤에 <어둠의 저편>을 덮는다면 그건 작품의 반도 읽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은 세밀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데뷔한지 25주년. 그 동안 다양한 작품들로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저자는 데뷔한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변화해 나가고 있다. <어둠의 저편>은 생생한 그 증거이다. 덕분에 ‘하루키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저자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 ‘하루키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됐으니 <어둠의 저편>이 찾아온 것은 반갑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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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부 - 2004 제11회 실천문학 신인상 장편 수상작
한성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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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평반쯤 되는 비좁은 공간에 열두 명이 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변 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나아가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이곳은 어디인가? 부랑인수용소다. 이곳은 ‘선진적인 거리질서 정화’를 위해 정부가 만든 합법적인 공간으로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술 취해 잠들어 있으면 마치 ‘삼천교육대’에 데려가듯 마구잡이로 잡아오는 곳이다.


두 평반쯤 되는 공간에서 열두 명이 생활한다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화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늘 피곤한 인간들’이다. 더군다나 희극적이게도 이곳에서 ‘권력’이라는 게 있어 군대의 계급처럼 절대적인 서열이 있다. ‘대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피곤할 수 밖에 없다.


부랑인수용소에서 ‘대빵’은 무엇을 하는가. 권력을 음미한다. 그가 지닌 권력의 상징은 ‘전화번호부’다.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난 전화번호부를 갖고 독서를 하는 것이다. 휴지 대신 사용하라고 준 전화번호부를 들고 독서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아니, 전화번호부를 보며 ‘독서’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대빵은 독서를 한다. 전화번호부에 담긴 여자이름을 보는 것이 그의 독서다. 그러면서 그는 사색이다. 여자 이름이 이른바 ‘필에 꽂히면’ 과대망상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여자가 대학교수니 재벌 집 2세니 하며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소위 ‘지랄을 떠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다들 대빵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대빵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대빵은 전화번호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빵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11회 실천문학 신인상 장편 부문 수상작이기도 한 한성탁의 <전화번호부>는 ‘부랑인수용소’를 통해 부조리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변을 처리하기 위한 전화번호부가 권력의 상징으로 통한다는 점이나 군대에서 타인의 자유를 억압했던 이가 이곳에서 자유를 억압당한다고 설정한 것들은 신인이라고 보기에 놀랍다. 더군다나 부랑인수용소의 작은 공간을 통해 권력에 안달하는 이들의 행태와 초라한 권력의 이면을 보여주는 솜씨 또한 수준급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부랑인수용소를 무대로 선택했을까?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또한 불합리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합법’이라는 단어 아래 맞고, 죽고, 신음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시대가 변했어도 그랬다. 법의 틈새 사이로 혹은 법이 외면하는 사이에 살기 좋은 시대에도 ‘지옥’은 만들어진다.


서열 2위 중국 돼지의 표현에 따르면 부랑인수용소의 이들은 ‘살아 있는 시체’다. 서열 3위 개백정의 표현에 따르면 ‘사육되고 있는 개새끼’들이다. 이들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저자가 그려낸 부랑인수용소의 삶은 참으로 처참하다. 교도소의 죄인들보다 더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과장은 아닐 테다.


그나마 교도소의 죄인들은 죄 값을 치른다고 명목으로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부랑인수용소의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인가. 죄진 것 없이 단지 행색이 초라하고 돈이 없으며 권력이 없고, 갈 곳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길 거리에서 잠자다가 인간 버러지가 되고 인간 기생충이 됐다.


대빵, 중국 돼지, 개백정, 아프리카 메기, 로마의 쥐새끼 등 이곳에 온 누구의 사연을 들어봐도 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단지 ‘가진 것이 없어서’ 들어왔다. 그래서 이들은 자유를 박탈당했다. 그래서 이들은 개돼지 같은 취급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들은 살아있는 시체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탈출’을 꿈꾼다. 그것은 본능적인 욕구다. 자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소유하고 싶은 건 당연지사다. 그래서 이들은 탈출하기로 한다. ‘자유 만세’를 불러보려 한다. 그러나 쉬울 리가 없다. 오히려 맞아죽어도 할 말 없는 명목을 제공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이들의 처지는 안쓰럽기만 하다.


합법적인 공간이자 지옥 같은 곳, 부랑인수용소. 그리고 권력과 동일시되면서도 뒷일 처리하는데 쓰이기도 하는 전화번호부. 저자는 이 두 가지를 갖고 인간의 밑바닥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비겁하고, 비굴하며, 처참하고 무능력하면서 나약한 인간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또한 그곳으로 세상을 비꼬며 풍자적인 언어들을 쏟아내는데도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신인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 반갑다. 또 한 명의 기대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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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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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에서 ‘창녀’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길거리의 여자라고 하지만 현실과 달리 그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 최근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도 등장했고 스테디셀러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에서도 등장했다. 특히 최근에 창녀를 보는 데는 <11분>의 역할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성(性)을 통해 성(聖)을 이야기했던 <11분>의 창녀 마리아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창녀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사회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음을 생생이 보여준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할까?


발표되면서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넬리 아르캉의 <창녀>를 보고 있노라면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창녀는 창녀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은 창녀의 고백록이다. 창녀의 이름은 신시아. 물론 어느 창녀가 그러하듯이 본명은 아니다. 작품에서 화자는 신시아가 죽은 누이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것 또한 믿을 수는 없다.


물론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창녀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건 ‘창녀는 창녀다’라는 사실이다. 창녀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창녀의 존재를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있을까. 언젠가 자신의 손님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창녀의 감정을,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에게 ‘자매애’는커녕 동지감조차 품을 수 없는 그 현실을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사회 권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 인권이 신장되었다고 하며 농담조로 여성 상위 시대라고 하지만 그건 농담에 불과하다. 아직도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미비한 권력을 움켜질 뿐이다. 창녀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터이다.


창녀는 백 명의 여성이 있어도 존재할 수 없다. 단 한 명이라도 남성이 있어야만, 남성의 요구대로 성행위를 한 뒤에 지폐를 받아야만 연명할 수 있는 존재다. <창녀>의 신시아도 그러하다. 그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학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시아는 다르다. 더 많은 스머프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단 한 명의 ‘스머페트’가 되기를 바라던 그녀는 창녀 노릇 한번 번듯하게 하기 위해 대학에 간다. 그리고 문학도가 된다. 창녀를 다루는 많은 작품들이 대학생이 돈을 벌기 위해 ‘갈보짓’을 하기 시작한다고 설정했다. 그러면서 비정한 사회를 욕했다.


그러나 <창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것을 두고 고고한 이들이나 최근의 창녀 소설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저자를 향해 ‘억지스럽다’고 쓴 소리를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을 테다. 이 소설은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상상이나 희망이 아니라 ‘실제’를 다뤘다. 그래서인가. 어디에서도 창녀에 대한 희망적인 시선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작품은 시종일관 고된 노동을 마친 섹스노동자(창녀)가 지쳐도 계속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의 모습과 같은 음울한 언어들로 가득하다. 언어도 그렇거니와 언어들이 만드는 장면들도 그렇다. 창녀를 찾는 남성들의 모습, 창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모습, 창녀를 향해 성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창녀들의 모습은 결단코 즐겁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은 아니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통해 창녀들의 존재에 관한 것들을 토로하는 언어들은 숨을 막히게 한다. 이토록 집요한 작품이 있을까? 아니 에르노처럼 한 가지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글쓰기로 유명한 이들의 작품도 <창녀>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질 정도다. 더군다나 그 세밀함과 현실적인 그림들은 비명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할 정도다.


그러나 <창녀>는 단순한 고백록은 아니다. 또한 새 삶을 살아보기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비명 속에 간혹 드러나는, 신시아의 조롱하는 모습들이 심상치 않다. 그렇다. 신시아는 다르기에 말한다. 스머프들이 스머페트를 만들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만들었지만 여자는 성을 창조해냈다고 말한다. 인생에 속은 데 대한 분풀이로 창녀가 되는 것보다 나은 게 어디있냐고 덧붙이면서 그 말을 하고 있다.


<창녀>는 도발하고 있다. 연민으로 혹은 동정으로 바라보던 이들을 향해 한껏 조롱하는 그 태도, 그것을 어찌 도발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몰론 이 도발이 남성과 여성의 권력까지 뒤엎을 정도의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오디세우스를 유혹하지 않은 세이렌을 등장시켜 오디세우스를 우습게 만들었던 카프카의 글쓰기처럼 저자의 글쓰기는 분명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창녀>는 ‘문제작’이다. 창녀 노릇 한번 번듯하게 하기 위해 대학을 갔다는 사실이나 고객으로서의 아버지를 언급하는 작품의 장면 장면부터 그 상징성까지 생각한다면 문제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해서 아예 ‘무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낼 정도의 보기 드문 ‘진정한’ 문제작이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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