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휴강하게 된 한가로운 금요일.
친절한 금자씨를 보기위해 3시에 집을 나서는 나의 모습.
현관문앞에서 하는 셀카질이 제일 안전하다. ㅋㅋ
누군가에게 목격당한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난 현관문 앞에서 셀카찍기를 즐긴다.
내가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영화리뷰를 쓰면서 나의 사진을 올리는 이유는 영화를 보고 떠올리는 많은 생각들이 결코 내 자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며 내 자신의 많은 것들을 투영시키면서 영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철한 금자씨를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과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래서 유난히도 더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많이 흘려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울어야했다.

이영애. 그녀 만큼 금자의 역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영화배우가 있었을까? 난 영화를 보면서 정말 이영애와 극중배역인 금자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청순함과 아름다운 외모,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지나가다가도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금자의 외모에 걸맞았으며 감옥에서는 친절한 금자씨로 통했을 만큼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금자의 모습은 이영애의 상냥한 미소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눈웃음을 치는 모습으로 아주 잘 묘사되었다.
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무표정 속에서 아주 조용히 대사를 내뱉을 때 우리는 극중 배우 금자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그 무표정한 얼굴로 무서운 대사를 내뱉을 때는 그녀안에 숨겨있는 무서운 복수심과 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엉뚱하고, 생각없어 보이는 금자의 모습은 그녀의 특유의 백치미로 잘 표현되었다. 정말 그녀의 다중적인 모습과 베일에 쌓인듯한 매력이 주인공 금자의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 주었다고 생각된다.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결코 간단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스토리 이면에 깔려 있는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심리를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감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분석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지나치게 그 이면의 것들을 파고드는 나의 생각에 나 자신조차도 괴로움을 느껴야 하기에 그것이 결코 바람직한 영화감상의 태도는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영화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분석을 피하고싶다. 그것은 영화를 감상하는 개인의 몫이 아닌가?!

금자. 그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 그정도는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 그녀가 선행을 베풀때의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녀가 누명을 쓰고 이렇게 감옥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사람또한 자신이 직접 나서서 벌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 오랜시간 기도를 해왔던 것일까? 단지, 남들앞에서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수 많은 시간동안 시도를 해 온 것이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 이유를 그녀 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20세의 어리고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그것들을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13년동안 자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위해, 자신의 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기위해 그녀 자신에게 기도를 한다. 물론 그런 과정속에서 그녀가 한 실수와 다른사람을 이용하려 했던 마음이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었음을 알고 있기에 속죄를 시도한다. 그리고 감옥에 온 수 많은 다른 죄인들에게 선행을 베푼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주 큰 선행이 되기도 했지만 그 중 하나는 자신과 동료들을 괴롭히는 '마녀'를 죽이는 일로써 아주 큰 죄악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을 명백히 하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이 있다면 냉정하고 독하게 처리해 버리겠다는 대단한 결심을 해온것이다. 13년동안.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그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것 뿐이다.
이 모습은 같은 감독이 만들었던 <올드보이> 에서 최민식이 밀폐된 공간에 갇혀있는 동안 벽에 그려진 그림에 주먹을 날리면서 자신의 내면과 주먹을 단련시켜왔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은 온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모아 아주 긴 시간동안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되어간다. 아주 강하고 독하고 냉정하고 지능적이며 솔직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금자는 위의 사진처럼 자신의 원하는 강한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특히 자신의 눈을 빨간 쉐도우로 진하게 화장하여 남들에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한다.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즉, 그녀가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외모의 후광효과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다. 특히 여성의 경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 그녀의 외모가 주는 光 에 가려서 내면의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남들에게 더이상 그런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13년동안 어떤 생각와 어떤 마음을 가져왔는지 남들은 모르겠지만 그녀 자신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결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외면적인 모습도 내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것이다. 즉, 자신의 가면을 내던져 버린것이다.
# "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그러나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거야. 알아? "
그것이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다. 그녀는 자신의 딸의 목숨을 담보로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최민식에게 그렇게 말한다. 죄없는 어린이를 상습적으로 유괴하여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죽여왔던 백선생.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영어선생님이다. 그녀가 그의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 그는 3명의 어린이를 더 죽였다. 그것은 영화 중반부에서 밝혀지므로 나에게도 아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은 비디오테잎에 녹음되어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것 만큼 곤욕은 없었다. 내가 자녀를 가진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아이들을 매일 접하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충격적인 장면 하나하나가 아주 큰 아픔으로 전해져왔다. 솔직히 난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께는 이 영화를 권해주고 싶지 않다. 정서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4명의 희생자가 되었던 어린이들의 부모님과 금자가 죄인으로 오판되었던 사건을 맡았던 형사, 그리고 금자, 그들은 살아있는 백선생을 묶어놓고 복수극을 펼친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수 많은 아픔과 상처와 죄의식과 원망감을 떨쳐내기 위해 살아있는 백선생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간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속죄를 하지 않는 백선생같은 인간은 똑같이 응징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야만했다. 그들이 백선생을 죽여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과연 똑같은 살인극을 펼쳤을 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었는지의 여부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단, 죽은 아이들을 대신해서 복수를 해주었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설정, 그리고 아이들이 이제는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딸랑거리는 방울소리,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난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수 많은 아픔과 자책과 슬픔을 모두 백선생에게 돌렸다. 사실 그것이 맞다. 백선생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살아있는 자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해서 죽은 아이들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모든것들이 없던일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 그들은 그를 없애므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죄를 지은 사람만이 벌을 받는 것으므로 앞으로 세상을 착하게 살아간다면 자신들에게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금자씨가 두부처럼 하얀 케이크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이제는 하얗게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을 명확하게 들어내준다.
마치, 이제는 다 갚았어. 이제는 다 제자리로 돌아왔어. 이제부터만 착하게 살면돼. 그럼 행복할 수 있을꺼야. 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이다. 영화 마지막부분에 금자는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 라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신도 아닌 타인도 아닌 금자. 자신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게될 것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 선과 악의 기준, 죄와 벌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영화를 다 보고나서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은 이 부분이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양면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 그러나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것이 바로 선한면과 악한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성설을 믿는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선한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수 많은 환경과 수 많은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인간의 모습은 양면성을 가질 수 밖에 없게된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도 일정의 학습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어떤 행위가 착한 행위이며 어떤 행위가 나쁜 행위인지를 학습하게 되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되면서 착한 행위를 강화받기 때문에 인간은 착한행위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그렇게 학습된 것을 초자아(superego)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부모의 모습을 동일시 시키는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학습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만약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영화속 인물인 백선생은 아주 부도덕한 부모에게서 양육된 사람이된다. 영화속에서 백선생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렇게만은 생각할 수 없는 것같다. 백선생은 정상인이 아닌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무 죄없는 아이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4명이나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을 잘 소화해왔으므로 미치광이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의 경계선이 정상인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만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다른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시간동안 어떤 인지적판단과정을 가져왔는지의 여부이며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의 여부이다.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은 없고, 같은 환경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모두 다른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범주안에서 행위를 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양심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성격이 충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할 수 있다. 즉 예전에는 큰 죄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생각이 달라지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는 죄가 되는 것처럼 그 경계가 불투명하여 모양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없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정해놓은 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 선을 지키는 것은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간섭과 통제 혹은 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자극이 없다고해도 우리 내면에는 항상 양심이 눈뜨고 있기에. 자신을 감시하는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제제를 받을 때 마음의 평형상태는 깨지게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속죄를 하기도 하고,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상황을 탓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해서든지 자신의 마음을 평형상태로 되돌려놓으려고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는 백선생이라는 한 사람을 타겟으로 하여 모든 죄를 그에게 돌려놓고 그를 응징함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속에서 또 다른 죄를 지어야 했으므로 그들은 결코 목적을 달정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 착하게 살면 벌을 받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은 간절한 소망의 메세지를 전한다. 하얀눈처럼 하얀 케이크처럼.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금자와 금자의 딸의 모습을 통해 착하게 살면 이젠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끔한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희생된 많은 어린이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영화에서도 사회와 삶이 지닌 명백한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백선생님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으니 그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것이 당연할까? 하는 생각과 대치되는 것은 아무죄없이 죽은 어린이들이다. 죄를 지은 사람만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왜 아무죄없는 어린이들은 그렇게 살해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그 모순을 가지고 있는 우리네 인생사에서 우리는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행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감독이 영화에서 전해주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는 것을 명백한 명제로 여기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죄를 짓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 나는 나의 죄를 생각한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도 살아오면서 수 많은 죄를 지었으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다. 그리고 또 많은 상처와 아픔을 받아왔다. 그것은 내가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타인이 의도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냥 살아오다보니 그런 일이 수 없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나에게 닥친 아픔과 나에게 닥친 시련을 경험할 때, 한번도 남을 탓하거나 타인을 탓해본적이 없었다. 솔직히 누구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웃기다고 생각했다. 복잡미묘하게 얽히고 얽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다 보면 누구나 다 사연은 있고 누구나 다 속사정은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난 항상 내 자신을 탓했다. 다른 사람이나 외부 상황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 내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성향에 귀인하여 내 자신을 탓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그런 식의 논리를 펼치게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죄가 많은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인지의 오류이다. 즉 비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내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이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든다. 나에게 닥친 아픔과 슬픔이 모두 나의 잘못이고 언젠가 내가 남에게 주었던 아픔과 슬픔이 나에게 돌아온 것 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서 내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일은 그만두고싶다. 단, 앞으로 내가 가진 신념과 내가 가진 소신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선과악의 경계에 대치될 때는 냉정하고 혹독하게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는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평가: ★★★★★ 아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