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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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풀리지 않는 숙제를 마주한다. 그 난제 속에서 문득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카뮈는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말한다.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것은 리유의 어머니의 '침묵'과 리유의 인생 스승인 '가난'이다. 여기서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이며, 침묵 또한 차가움이 아니라 다사로움이었다. 어떻게 침묵이 따스함이 되고, 가난이 풍요가 되는가. 그것은 침묵과 가난의 세계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조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은 어머니이며, 어머니는 가난하고 침묵하는 존재다. 그리고 가난하고 침묵하는 존재는 곧 자연이다.

자연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달았던 고대인들처럼, 의사 리유는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 오랑 너머의 바다와 하늘을 향한다. 바다를 등진 채 서 있는 도시 오랑과 그 시민들은, 결국 자연을 등진 현대 문명과 현대인을 상징한다. 페스트는 오랑 시민들에게 늘 가까이 있다고 믿었던 바다와 사랑하는 이들과의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져왔다. 그 고통은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격리와 거리두기를 경험한 우리는 그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를 변화시켰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며 나는 줌을 통해 독서와 토론 모임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부업을 중단했고, 함께 읽은 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이면서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침묵'과 '가난'이 의미하는 따스한 지혜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 인생 후반기를 밝혀 줄 등불이 될 것이다. 부산스럽던 삶의 궤적들이 결국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같이 괴로운 휴가, 도리 없는 귀양살이, 결코 채울 길 없는 갈증으로 다 함께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운명이라고 불러 마땅한 경고, 공포에 떨면서 맴도는 제자리걸음, 그들의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던 무서운 반항, 이러한 모든 것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결코 그치지 않은 채 누비고 다니면서 공포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경고하듯이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진정한 조국은 그 질식해 있는 시가의 담 저 너머에 있었다. 그 조국은 언덕 위의 그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다 속에, 자유로운 고장들과 따뜻한 사랑의 무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조국을 향해서, 그 행복을 향해서 돌아가고 싶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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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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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철학은 태양과 바다, 돌과 바람 속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그의 철학은 필연적으로 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계의 본질과 교감하며 자라난 사유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철학은 역사의 테두리를 넘어서 세계 그 자체를 바라본다. 역사는 세계에 비하면 허약하고, 덧없는 한 순간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를 역사에 맞서도록 만들었다. 카뮈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 예술가의 몫임을 확신했다. 예술가는 세계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성을 넘어선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만들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결박당한 영웅은 세계를 사랑했기 때문에 고통을 감내했다. 카뮈는 자신을 그 종족의 후예로 여겼다. 아름다움이 모욕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던 그는 끝까지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철학은 단지 견디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버틴다는 것은 단순한 인내를 넘어선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고, 세계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정오의 태양과 여름의 대지를 가슴에 품은 카뮈는 대지와 바다와 결혼한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은 초인적 의지에서 태어났다. 초인은 돌을 깎아 길을 내고, 바람 속에서 우뚝 서는 존재다. 그것은 투쟁과 아름다움의 결합이며, 세계의 얼굴을 응시하는 인간의 최후의 모습이다.

이 에세이는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 마치 세계가 읽히기 위해 존재하듯이, 이 글은 세계를 향한 사랑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카뮈가 세계를 읽었듯이, 이 글은 독자를 세계의 본질로 이끈다. 세계의 얼굴이 이 글에 스며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담아낸 선언이다.

무지의 인정, 광신의 거부, 세계와 인간의 한계, 사랑받는 얼굴, 그리고 아름다움,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 합류하는 진영이다. 어떤 면으로는, 미래 역사의 의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와 종교재판 간의 투쟁 속에 있다. 맨손의 예술가들이 치러야 할 대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어둠의 철학은 빛나는 바다 저 너머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오, 정오의 사상이여, 트로이 전쟁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 다시 한번, 현대 도시의 끔찍한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며 ‘바다의 고요처럼 평온한 영혼’, 헬레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리라.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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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난드로스 희극
메난드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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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희극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 메난드로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고희극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다. 메난드로스의 신희극은 단순히 웃음과 풍자를 넘어 인간의 일상과 보편적 감정을 탐구하며, 이후 서양 문학 전반과 현대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그리스 문학이 호메로스 이후 비극과 희극의 장르를 통해 인류사에 남긴 깊은 족적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메난드로스의 희극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문명이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며 나타난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스 사회는 농경과 상업, 나아가 약탈 경제를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를 영위했다. 전쟁과 평화는 이들의 주요한 주제였고, 이는 초기 그리스 문학에 깊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제국으로 향하던 그리스가 좌절을 겪고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학과 예술의 중심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신희극은 폴리스의 공동체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과 감정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새로운 경향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며, 그의 유려한 문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은 당대 사회적, 문화적 전환을 문학적으로 구현해낸다.

메난드로스는 폴리스의 공동체주의 문화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의 개인주의 문화로의 변천을 희극 속에 반영했다. 그의 희극은 정치적 참여를 강조하던 고희극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인간 보편적 정서와 일상의 고민을 담아낸다. 이는 당시 독자들에게 신선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적 전환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동체와의 연결은 점차 희미해지고, 넓어진 세계 속에서 개개인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난드로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메난드로스의 작품은 일상의 인물들과 그들의 감정을 희극의 중심으로 소환한다. 이를 통해 그는 단순히 웃음을 넘어,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탐구하며 일상 세계를 확장하는 문학적 과업을 수행한다. 그의 희극 속 인물들은 영웅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메난드로스는 왜소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가진 나약함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며, 그리스 희극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메난드로스의 신희극은 단순한 시대적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학적 혁신이다. 정치적 풍자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과 보편적 감정에 다가선 그의 작품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탐구를 통해 희극의 지평을 넓혔다. 메난드로스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찾으라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가진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 멋진 주연을 벌여야 해요, 아버지.
그리고 여자들은 밤새도록 시중을 들어야 해요.
-그 반대로 해야지. 여자들은 마시고 우리가
밤새도록 일해야 해. 내가 지금 가서
너희들을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겠다.
-그렇게 하세요. (관객에게) 현명한 사람은
어떤 일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돼요.
끈기와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바로 그 진리의 살아있는 증거라오.
세상에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던 결혼을
나는 하루 만에 이루어냈으니 말이오. (‘심술쟁이‘中에서)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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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2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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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8-241212

이 책은 여인들을 중심으로 한 세 편과 신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인들의 연대를 통해 당시 사회를 풍자한 세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여인들의 성 파업으로 종전을 이끌어내는 <뤼시스트라테>, 남자들의 감시와 구속을 불러온 에우리피데스를 처벌하기 위한 여인들의 비밀 회동을 다룬 <데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그리고 여성들이 주권을 차지하여 그리스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는 <여인들의 민회>. 이들 작품은 모두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 그리스 사회의 현실과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디오뉘소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가상 경연을 벌이는 <개구리>와, 부의 신과 가난의 신이 논쟁을 벌이며 인간 사회의 문제를 조명하는 <부의 신>, 이들 작품은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들 희극은 하나같이 기발한 상상력과 논쟁을 통해 현실을 희극적인 방식으로 냉철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비극과 희극의 경연을 통해 폴리스를 이끌어간 대중지성의 향연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희극에서는 코로스나 배우가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고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공감대를 크게 형성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극이라는 공연 예술은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집단지성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 장담하건대, 너희에게 조금도 덕이 안 돼. 부의 신이 시력을 회복하여 자신을 똑같이 분배한다면, 세상에 예술과 기술에 종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부의 신> 中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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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17 : 동남아시아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17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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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역사 복습 겸해서 역시 만화로 된 동남아시아 편을 읽었다. 지명이나 인명 등의 표기가 좀 다르기는 해도 내용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몇십만 명씩 학살되는 건 보통인 듯한 동남아시아 역사가 가슴 아팠지만, 지리적 이점을 살리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민족이 공존하는 실험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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