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23시 교육방송

 

히치콕 감독의 명불허전이라는 이 영화를 이제서야 보았다.

히치콕 감독의 <새>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비슷한 서스펜스가 흐르는 영화였다.

물 흐르는 듯 유려하고 몰입의 강도를 높여가는 연출력이 대단했다.

뻔한 스토리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랄까.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존이 사랑한 앨스터 부인은 사실은 주디 버튼이고 주디는 진정 존을 사랑했다.

그러나 존은 왜 주디를 사랑하지 못할까.

물론 주디는 존을 속였고 앨스터 부인의 살인 공모자다.

그 사실을 알고도 주디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은 과연 누굴 사랑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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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월.14시 VOD

 

 

시간에 관한 영화가 최근에 대세인가 보다.
시간이동을 하는 헨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산다.

자신이 어린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순간으로 수없이 되돌아와서 사고를 막아보려 하지만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

시간이동을 할 때는 몸만 이동하기 때문에 옷을 현장에 남겨두고 이동한 공간에서는 알몸이다.

언제 시간이동할 지, 언제로 이동할지 선택할 수는 없다.

이동을 하기 직전의 느낌만 알 뿐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이동할 뿐이다.

수없이 되돌아오는 순간은 그만큼 중요한 순간인 것이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클레어를 처음 만난 건 클레어가 여섯 살 때다.

시간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는 모양이다.

클레어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스물 여덟 살의 젊은 헨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한다.

28살의 헨리는 클레어를 처음 만났지만 곧 사랑에 빠진다.

클레어가 살아가는 시간은 헨리가 살아가는 여러 개의 시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의 시점만은 모든 시간대가 다 똑같다.

클레어의 시간에서 헨리가 사라진 순간 헨리는 클레어의 정원에서 장인의 사냥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헨리는 자신이 언제 죽는지를 역시 시간여행자인 자신의 딸한테서 미리 듣고 알고 있다.

죽은 헨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헨리가 마지막 순간 죽으러 간 곳이 클레어의 정원이라니!

클레어의 정원에 헨리는 다시 돌아온다.

클레어와 딸은 늙고 자라지만 헨리는 죽기 전의 나이로 언제든지 되돌아온다.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죽은 남편을 계속 만날 수 있다.

시간이라는 소재를 색다르게 풀어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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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일.14시. 교육방송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자연과학>과 비슷한 느낌의 성장영화였다.

이렇게 깔끔한 연출을 우리나라 영화에선 잘 보기 힘들다.

시릴은 아빠가 맡긴 보육원을 자꾸만 탈출해서 선생님들이 애를 먹는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온다고 했던 아빠가 연락도 안되고 오지 않아서 아빠 아파트에 찾아간다.

거기서 아빠가 한 달 전에 이사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 만난 사만다가 시릴의 자전거를 가지고 보육원에 찾아 온다.

아빠가 자신의 자전거를 팔아서 되사가지고 왔다는 사만다의 말을 시릴은 믿지 않는다.

아무 대가없이 시릴을 도와준 사만다에게 자신의 위탁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미용실을 하는 사만다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주말에 사만다와 함께 지내게 된 시릴은 자전거를 타고 아빠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이곳저곳 다디다 아빠가 붙여놓은 자전거를 판다는 광고를 보게 되고 시릴은 사만다와 함께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아빠를 만나러 간다.

아빠는 결국 앞으로 시릴을 만나고 싶지 않으며 부양할 수 없다고 한다.

아빠에게 버림받은 시릴은 사만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보육원에서 나온 형과 어울린다.

사만다는 시릴을 돌보기로 하고 남자친구인 질과 헤어지지만 시릴은 형과 어울리기 위해 거짓말하고 도망가며 엇나가기만 한다.

형을 위해서 서점주인의 돈을 훔쳤지만, 자신이 주는 돈을 형도 아빠도 받지 않고 화를 낼 뿐이다.

시릴은 사만다에게 사과하고 같이 살게 해달라고 한다.

사만다는 서점주인 부자의 치료비를 배상하고 시릴은 주인에게 사과한다.

그런데 주인 아들이 주유소에서 시릴을 보고는 달려드는 바람에 도망가던 시릴은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버린다.

시릴이 죽은 줄 알고 주인과 아들은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릴은 일어나 구급차를 불러 주겠다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가던 길을 간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팽팽한 연출이 아주 인상적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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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성서초등학교 5학년 1학기 동안 실험한 슬로리딩 취재 보고다.

한 학기 동안 국어시간에 교과서 대신 박완서 작 <그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을까>를 가지고 수업한다.

조금씩 읽으면서 갖가지 활동을 해 나간다.

모르는 단어는 일일이 찾고, 주제를 정해서 조사도 하고 토론도 한다.

소리내서 읽는 낭독 체험도 하고, 작가의 딸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관련 영화도 보고, 소설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가 보고, 피난 음식도 만들어보고, 직접 영상물 제작도 해 본다.

천천히 읽으면서 사실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깊이있고 넓게 읽음으로써 자신의 관심분야가 생기고 표현방식도 찾아간다.

3편은 아직 보지 않았지만 무척 흥미있었다.

결국 책읽기가 모든 공부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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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토.10시 롯데산본

 

3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쿠퍼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과학이 과연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하게 되는 영화였다.

브랜든 박사가 인류를 저버리고 딸마저 속이고 실행하고자 했던 것.

만 박사가 아무 것도 없는 행성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사악하고 지질해지는 것.

그런 선택들은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과학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지적 모험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식의 최전선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3차원의 한계내에서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할 필요도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은 결코 과학의 합리적 이성이 아니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은 인간생명의 최전선에 있는 무엇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건 인간성에 대한 최종 희망일수도 최종 절망일수도 있다.

죽음을 마주하여 선택하는 순간 순간의 결정이 결국 사랑이라면 숱한 오류를 범할지라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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