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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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그 제목 덕에(제목에 언급된 사상가들 덕에) 쉽게 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을 이 얇은 책에서 뭐 얼마나 제대로 다루겠어?'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게되는 것은 결국 '쉽게 읽기'라는 저 말 때문 아닌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흔히 구조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는 이 사상가들의 저서는 하나같이 두껍고(때론 얇기도 하지만), 난해하며(가끔 쉽게 읽히는 것도 있으나), 몹시도 재미없다.(물론 흥미로운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입문서나 해설서를 자처하면서 나온 책들 역시 하나같이 어렵다. 이 위대한 사상가를 쉽게 설명하는 것은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그동안 부실한 입문서들로 인해 시간과 돈만 버리고 내용은 잘 이해하지도 못했던 경험이 있었던 나로서는 입문서라고 딱지를 붙이고 나온 책들에 대해 선입견이 있다. 조금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원저는 아니라 하더라도)해설서나 연구서를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쉽게 읽을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을 읽기도 전에 나는 '들어가는 말'에서부터 눈이 번쩍 띄고 메모를 해가며 읽게 됐다. 정말 참으로 반갑고 기쁜 마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이해 받지 못해 외롭게 외톨이처럼 살던 아이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할아버지를 만난 그런 기분이랄까. 이 책의 모든 본문 내용보다도 가장 감명 깊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가 '들어가는 말'에서 담담히 기술한 '좋은 입문서'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전문가의 '말' - 비전문가와 구별짓기

전문가용 책은 안다는 전제하에 구성되어 있다. 그런 책은 '알고 있는 것'을 쌓아 올려간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그들만의 파티나 마찬가지이다. 초보자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함을 느끼기 마련"(5쪽)이다. 그들에게는 공유된 것들('이 정도는 다 아는 거지')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백날 읽는다고 절대 그들과 동등해질 수는 없다. 의사가 환자에게 아무리 병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도 그 말(전문가의 말)에는 그들을 전문가로 만들어온 결정적 과정에 대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변호사, 과학자, 의사, 교수 등등 대부분의 전문가의 말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이런 과정과 전제에 대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전문가의 '말'은 그 내용이 참되고 고귀하며 훌륭하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발화자가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하고(시키고), 동시에 청자가 결코 전문가가 될 수도 없으며 그 '말'의 참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는 비전문가라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입문서, 그 근본적인 지적 탐구

반면 입문서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말에 따르면 입문서의 의미는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이다. 

첫째는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좋은 입문서는 먼저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는다고 한다. 저자 말대로 이는 참으로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지란 단순히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태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면의 성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더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인지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탐구의 본질적인 의미 아니겠는가. 

둘째는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룬다는 것이다. 

전문서에서 전문가가 무언가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이미 당연한 것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당연히 옳은 것이라 말해지지 않는 것인지, 말해지지 않아서 옳은 것이 되는 것인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다. 전문가가 그렇게 말하니 그렇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반면 입문서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말한다. 그것이 실제로 옳든 그르든, 이 행위 자체가 이미 은폐된 전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면책특권이 있는 독재자에게 '당신이 정말 떳떳하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법정에 한번 서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독재자가 아무리 결백하여도 그 자체가 이미 독재자를 독재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린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는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입문서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 물음 아래에 밑줄을 그어"준다.  

"입문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서비스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독자들 개개인에게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천히 곱씹어보고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문서가 갖는 중요한 의미들은, 반대로 좋은 입문서와 나쁜 입문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입문서란 이름을 달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의 전문가적 지식을 뽐낼 뿐인 사이비 입문서는 물론이고, 그저 쉽기만 한 책 역시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말과, 전문가가 한 어려운 말을 쉽게 고쳐 쓴 말로 구성된 입문서는 설사 쉽게 읽힌다고 하더라도 좋은 입문서는 아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질문도 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입문서의 길

이 책의 본문도 지금껏 여느 입문서보다도 훌륭하고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저자는 자신이 책 서두에 밝힌 입문서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어려운 구조주의 이론과 맑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 같은 구조주의의 창시자들에 대해서까지 쉽게 그려주고 있다. 내친김에 저자가 구조주의 이론에 접근하는 방식까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이 리뷰를 '좋은 입문서'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의 철학에 관한 것으로 한정하고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구조주의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책 뒷표지의 광고문구)여서가 '훌륭한 입문서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한국의 많은 지식인, 저자, 학자들에게 자극이 되어, 우리에게도 우리 글로 쓰인 훌륭한 입문서가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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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다른 사람처럼 열정적인 독서가도 아니고, 성실하게 서재를 가꿔온 것도 아닌데, '이제 열심히 책 읽기로 한 것 나도 한번 신청해볼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9기 신간평가단에 지원했다가 덜컥 뽑히고 말았다.  첫 번째 미션, 3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 만한 신간도서를 선정하는 과제조차도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이러다 또 망칠라.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주목 신간도서를 선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3월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책들이 많이 발간된 달도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넘쳐나는 법이다. 그 중에서 5권만 추려내는 것은, 유난히 우유부단한 나로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읽고 싶은 책의 목록에서 한 권, 한 권 지워나가려 했지만 차마 잘 지워지지 않는 책들로 목록은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작업은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과감하게 기준을 세웠다. '내가 추천한 도서가 선정될 수도 있는데 괜히 욕심에 내가 감당하지 못할 책들을 골랐다가 낭패를 볼라'하는 걱정에 내 능력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만 고르기로 했다.  

  그래도 어렵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겨우 선정한 도서는 이렇다. 

 

1. 언어의 감옥에서-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서경식, 돌베개, 2011.3.28.)  

  서경식의 책들은 제목으로 사로잡는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제 목에 이끌려 책을 훑어보면 그제야 서경식의 책인지 알게 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감옥에서>... 대체 무엇이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언어를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며, 무엇이 그를, 그리고 우리를 언어라는 감옥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나,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았고, 그러나 조선어를 박탈당하고 일본어를 모어로 부여받음으로 모든  사고와 표현을 일본어로 해야 하는...  

  그는 자발적인 '경계인'이 아니라, 강제된 디아스포라, 말 그대로 '추방당한 이'다. 언어는 벽이 아니라, 감옥이며, 단절이 아니라 은폐다. 따라서 그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우리는 그의 독자가 되어야만 한다. 

 

2. 문자와 국가-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8(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b, 2011.3.30.) 

  첫째 도서에 이어 공교롭게도 둘째 역시 일본어로 쓰여진 책이다. 위 책이 소수자임을 자처하는 재일조선인이 쓴 것이라면, 이 <문자와 국가>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사상가가 쓴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원서 제목은 <전전의 사고>였으나 국내에는 전전(戰前)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에 저자가 직접 <문자와 국가>로 제목을 변경했다고 한다. 네이션, 국가, 문자(서경식에는 문자가 아니라 언어이지만) 등 공교롭게도 앞서 고른 서경식의 책과 상당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특히, 책 소개에 나와 있듯이 고진은 강연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니 강연집이란 형식에 특히 기대가 되기도 한다. 

 

3. 꾸리찌바 에필로그(박용남, 서해문집, 2011.3.30) 

  대학 시절, 후배들과 생태주의 세미나를 해보자고 무작정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정치철학이나 경제학, 역사 같은 것은 잘 기획된 커리큘럼이 공유되고 있었지만, 생태주의 세미나는 당시 아무것도 없이 막연히 시작한 것이었다. 난 자료를 만들려고 도서관에서 책 수십권을 쌓아놓고 뒤졌다. 좋은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무언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를 논하며 회귀적 혹은 역행적 주장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런 자료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찾지 못한 것이었지만) 

  현 세계체계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생태적 전환이 시급히 요구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감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관점에서 수행되는 비판은 때때로 너무도 무기력해 보이곤 한다. 지금 더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희망'이다.  

 

4. 현대자본주의와 장기불황-새움 총서 2(김성구 엮음, 그린비, 2011.3.15)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이은 새움 총서 두 번째 책이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의 충격 이후에 많은 출판사들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진단하는 책들을 앞다투어 출판했었다. 물론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여 성급히 내놓은 책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의 문제의식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출판계는 학술과 언론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떤 학술계, 언론계보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경제위기 붐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당시의 충격, 공포, 열광 등을 포괄하여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역할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출판사와 저자에 대한 믿음 아래, 자본주의 공황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받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5.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전경옥, 책세상, 2011.3.20.) 

  우리나라 같은 경우 출판계에서 철학 분야 서적에 대한 편식, 내지는 편향이 유난히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인기 있는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번역 및 소개는 활발한 반면, 고대, 중세 철학에 대한 국내 연구의 업적은 외면받는 경향이 있다. 출판도 사업인 만큼 시장 논리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책이 엄청난 수익을 내는 것도 아닌 만큼 꼭 시장 논리로 설명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양의 고대, 중세철학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 그 시기 나름의 다양한 사상사적 맥락들이 모두 '죽은 과거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비록 엄밀한 의미의 철학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 연구자가 우리말로 쓴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가 쓰였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이번 신간평가 도서로 선정되지 않더라도 꼼꼼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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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이제 곧 사회진출을 앞둔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을 만나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우울의 기운에 견디기 힘들 정도이다. 가끔 만나서 소소한 잡담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 보면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없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 출신들이니 그나마 유리한 위치가 아닌가 싶어서 괜한 엄살이라고 치부해버리려 하다가도, 그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문제가 좀 복잡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자기들도 배울 만큼 배웠고, 책도 꽤 읽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자기의 진로가 서로 모순되니 그게 또 은근히 스트레스인 것이다. 책에서, 세미나에서, 가끔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때로는 술자리에서, 그리고 어떨 때에는 거리에서, 권력을 비판하고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 했건만, 이제는 그런 권력에 편입되어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괜히 술잔을 부딪치며 위로를 주고받지만, 뻔한 말들뿐이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곤 한다. 지금 당장 자기 앞에 닥친 이 우울에 대해 대답을 내놓으며, 나도 그들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위안에는 깊은 체념과 허무주의의 정서가 있다. 친구를 막 위로하다가도, 막상 친구 입에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런 자기 위안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스스로 자기를 납득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한번은 체념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것이 마치 하나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 이제 앞으로 닥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 역시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뻔한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 곳인지, 불의가 판치는 곳인지,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감추고 있는지. 그런 불의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난날 백신을 접종했었기에 더욱 쉽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다. 하고 더욱 쉽게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체념과 허무주의라는 이 정서, 그러니까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세대를 광폭하게 휩쓸고 있는 이 정서가 불의와 부정의, 부패, 기득권, 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밀착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재생산의 한 미시적 과정이다. 체념과 허무주의, 그리고 냉소 없이는 결코 지금의 지배적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횡포를 부릴 때, 온갖 편법을 통해 지배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할 때, 국가가 극심한 불평등과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외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교한 논리로 무장하여 대중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언론을 통제하여 사실을 감추거나, 혹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기보다는(물론 그렇게 한다) ‘뭐 어쩌겠어’, ‘원래 그런 것 아니냐’ 같은 대중들의 폭넓은 체념과 냉소, 허무주의에 의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무주의에 맞서지 않고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할 수 없다. ‘뭐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주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허무주의가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체념과 냉소, 허무의 정서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고,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용인하게 만드는지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 못 찾는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허무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을 경계하게 해야 한다.  

  올해 초 나온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최근 다시 읽으면서, 다름 아닌 바로 이 진리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외친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과거 어떤 짓을 저질렀든, 그의 사람됨이 어떻든, 이 책은 오직 하나, 그가 삼성이라는 거대한 산 권력 앞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끝내 체념과 허무를 이겨내고, 자신의 불의한 양심으로 진실을 고백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읽어야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 철저히 짓밟힌 사람이 어떻게 허무와 체념을 극복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용기와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세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는 듯한 지적 만용이 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안 봐도 안다.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불의가 펼쳐졌을 때 거기에 놀라고, 경악하고, 분노하지 못한다.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무용 명제(뭘 해도 소용없다, 바뀌지 않는다)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법칙을 발견했다는 자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원래 세상은 이렇게 이렇게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어.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지적 만용은 일반 이론의 거죽을 덮어 쓰고 말하지만 곧바로 냉소와 체념, 허무주의를 불러온다. 그러나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자신했던 그 과학적 법칙이란 언제나 그 발견자를 배신하곤 했다. 세상이 어떻게 퇴보할 지,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 실린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처럼 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허시먼이 무용 명제의 모욕적 속성에 대해 분석했듯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허무주의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어느 날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말을 경청함으로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바로 우리의 적이라는 것, 허무주의가 바로 내가 냉소하는 그것을 더 강화시킬 것이라는 것, 체념하고 냉소함으로써 나 역시 사회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허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 희망도,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아무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채 나 자신의 허무주의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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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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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이 책을, 주제넘게 비판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 때문이다. 추천사를 읽고, 본문을 읽고, 다시 추천사를 읽으면서,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와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을 독해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음의 글은 책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비평일 것이다.>>

 

  최근 번역 소개된 앨버트 O. 허시먼의 저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이다. 직역하면 ‘반동의 수사학’인데, 이런 제목을 통해서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듯이 저자는 반동 세력의 논리를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수사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범위가 확장되어 보수의 수사학과 쌍을 이루는 진보의 수사학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저자 스스로도 놀라고 있지만, 이 책은 애초의 목표를 뛰어넘어 의사소통의 비타협적 단절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친화적(democratic friendly)’인 공적 담론의 구조를 확립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요컨대, 내가 끝낸 일은, 오랫동안 반동주의자 및 진보주의자 양쪽 모두가 실천해 온 비타협적 레토릭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 227 쪽   
 
“담론이 논쟁의 규범들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종속 상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그에 따라 담론의 방법을 바꾸고 의사소통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7 쪽 

  책에서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힌 이러한 목적은 진보와 보수 양 쪽이 오랜 기간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반목과 비타협적 단절을 반복해 온 한국사회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추천사에서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이 말했듯이 이 책은 “한국의 상황에 ......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저자가 반동적 레토릭의 전형적 형태로 정식화한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란 틀은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보수 세력의 주장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은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혹은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보수적 담론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정치의 문제점(민주적 소통 양식의 부재, 혹은 보수적 담론에 잠식당한 공론장)을 해결하는 데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로 인해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개입하는데 저자의 분석틀을 거듭 적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유혹들은 지적 욕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매혹을 지니지 못한 이론은 좋은 이론이 되기 힘들고, 그런 유혹이 없다면 이론은 현실적인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이라고 부를 만한 이 유혹은 우리 현실과의 적합성 때문에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유혹일수록 눈을 흐리게 하는 법이다.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 현실이 지닌 구체성과 책 자체에 내재된 난점이 나타날 것이다.

 

수사학 분석의 모순적 구조

  이 책을 독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허시먼이 수행한 수사학 분석이 이중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허시먼이 기획한 애초의 의도가 충분히 달성되었을 때, 의도하지 않았던 또 다른 결과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허시먼이 반동적 레토릭이란 분석틀을 통해 노린 1차적 효과는 분명하다. 그럴듯하고 정교해 보이는 논리로 무장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상대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고 보니, 언제나 독창적이고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사상을 제공해 온 일부 '심오한 사상가'들은 보다 덜 인상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보이게 됐다.“ -223 쪽 

  저자는 내용에 맞추어진 초점을 형식으로 돌려놓는다. 보수 세력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형식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수사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 주장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리고 이를 진보세력의 논리에까지 확장시킬 때 허시먼이 노린 2차적 효과는 비타협적으로 대립하는 두 주장의 자기 완결성을 상대화시키고, 반박될 수도 있고 허물어질 수도 있는, 그래서 타협이나 절충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시킴으로써,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의 의도는 '양비론'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적인 담론을, 양쪽 모두가 지닌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 이상의 것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논의가 보다 '민주주의 친화적'인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227 쪽  

 

거리두기 1 - 구체적 조건의 차이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지닌 이중적 과제가 일관된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시 저자가 당면한 정세적 조건에 기인한다. 저자에게는 당시 보수주의 및 신보수주의의 득세(1)라는 현실 아래서, 논쟁의 성격의 전환을 통해 형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진보와 보수라는, 저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두 개의 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2) 

“질서 있는 민주사회로 매우 안정적이고도 적절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사는 시민들이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몇 개의(이상적으로는 두 개의)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야 한다.” -16쪽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기획의 정치적 목표는 사회의 진보, 혹은 근본적인 전환이 아니다. 하나의 사회가 민주적 원리에 따라 질서 있고,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4)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수주의의 득세라는 당시의 정세적 효과들 중에서 민주적 소통의 불능이라는 상호분리(3)에 가장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호분리, 민주적 소통구조의 파괴가 일어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보수주의의 득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지나친(혹은 진지한) 당혹감이었다.   

  따라서 저자는 다른 진보적인 학자들이 수행했던 보수의 정신이나 성격에 대한 연구, “보수주의에 대한 이런 직접적이고 자칭 심층적인 공격”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특정한 효과를 노린 것인데, 즉 보수적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덜 진지하게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진보주의자에게 풍자적 태도를 강조하기도 한다.(224쪽)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에도 언급되듯이 한국 사회 역시 보수의 득세라는 동일한 조건(1)에 처해있는 듯하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과 오늘날의 한국의 정세는 공유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2) ‘보수의 득세’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반목하고 있다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고 그것이 얼마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 구도라는 개념에는 상호간의 균형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보수세력에 대응하는 진보세력이 부재한 실정이다.
  일단 의회 내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들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민주당은 진보적 의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민주당 같은 경우 이미 실패했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민중운동의 현실은 더욱 열악한데, 과거의 노동자 중심의 획일적인 운동에서 다양한 부문으로의 진출은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미약하며, 노동운동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오히려 하락하며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 등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의 진보적 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적도 있지만, 이를 하나의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3) 따라서 한국에서 민주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진보와 보수 간의 상호분리라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진보 세력이 과소화된 결과, 실질적인 대화의 균형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은 힘의 압도적 우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기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었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소통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을 실현하려면 대화를 거부하는 상대를 대화의 장으로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의 보수진영이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였을 때, 오히려 더 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현 실정에서는 그것은 지난번의 촛불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4)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은 민주적인 사회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걸 목표로 했다. 따라서 극단적인 충돌로 치달을 수 있는 격렬한 갈등과 반목을 피해야 했고, 이런 이유로 허시먼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를 너무 진지한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때로는 풍자적인 태도로 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진단과 처방이 나온 데에는 미국사회가 양당적인 견제와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다는 전제가 바탕이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과 같은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없다. 첫째는 보수주의자의 득세가 초래한 결과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보수 세력의 발호는 서민들의 삶, 생태, 문화, 평화, 모든 것들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러한 현실은 유행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허시먼이 수사학 분석의 배경으로 설정한 시민혁명, 보통선거권, 사회복지라는 단계적 진보는 유보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급격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해진 세계 경제, 급속히 확산되는 사회적 불평등, 전지구적 차원의 불균형의 심화, 심각하게 손상된 생태계... 우리가 처한 현실은 시급히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도 근본적인 대전환을, 그것도 아주 폭넓은 차원에서 말이다.  

 

거리두기 2 - 반동이란 무엇인가? 예외성의 일반성

  허시먼의 프로젝트가 지닌 또 다른 난점은 그가 분석한 담론들이 역사의 극히 전형적인 형세 속에서 발생한 것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허시먼의 연구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되고 있다. 하지만 허시먼의 분석이 밝혀낸 수사적 규범은 ‘보수’의 레토릭이 아니다. ‘반동’의 레토릭이다. 허시먼은 자신의 연구에서 다룬 ‘반동(reaction)’이란 개념을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반동이란 개념은 두 가지의 지성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역학의 영향이다. 흔히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알려진 운동의 제3법칙은 “모든 움직임(action)에는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동등한 반동(reaction)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반작용’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는 ‘반동’은 모두 영어로 reaction이다. 이런 물리학적 발견과 더불어 ‘사회는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의 단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지적 조류가 결합함으로써 ‘반동’이란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단선적인 역사인식을 제거한다면, 사회진보를 되돌리려는, 낡고 수구적인, 시대착오적인, 등등의 ‘반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허시먼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동파는 “......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react)'했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허시먼이 분석한 사례들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명백하게 진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는 반동했다. 프랑스 혁명, 보통선거권 쟁취와 같이, 광범위하게 확립된 진보적 전환이 이미 주도권을 잡은 형세에서 보수주의자는 그런 진보적 전환이라는 사건에 대해 반응(react)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에서도 이런 도식이 맞아 떨어질까? 비단 오늘날의 한국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 대부분의 시기는 이런 전형적인 정세에서 예외적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예외적 형태가 일반적 형태가 된다. 오늘날 한국은 지난 십 수 년간,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지배세력의 선제공격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해야 했고, 최근 몇 년간은 토건주의 세력의 공세에 저항해야 했다.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스와핑

  이런 명백한 현실 조건 속에서 반동적 레토릭을 단순히 보수의 전유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시대적 흐름이란 이름 아래 밀어붙여진 파괴적인 개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진보세력이다. 가령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진보세력의 논리는 허시먼이 말한 세가지 반동 레토릭에 부합한다.  

역효과 명제 : 한-미 FTA는 오히려 서민,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무용 명제 : 한-미 FTA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위험 명제 : 한-미 FTA는 힘들게 이룩한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을 파괴할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대하는 진보세력의 비판 역시 이와 비슷한 수사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보수적 담론이 반동 레토릭에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던 것처럼(혹은, 그보다 더) 진보의 주장들 역시 기가 막힐 정도로 반동 레토릭에 맞아 떨어진다. 

  반동적 레토릭과 쌍을 이룬다고 한 진보적 레토릭 역시 언제든지 보수적 담론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FTA에 대한 비판에 보수세력은 진보적 레토릭으로 대응했다.  

“한-미 FTA를 추진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다”라든지,  

“한-미 FTA가 한국의 사회적 역량을 파괴하기보다는 더욱 강화시키는 상승작용을 이룰 것이다” 

“한-미 FTA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다” 같은 것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첫째는 수사학 분석 그 자체의 역효과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공격적으로 진행될 때 성인이 됐던 나로서는 진보 혹은 좌파의 가장 큰 역할을 권력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인권적, 노동탄압적, 비민주적,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등의 수식어가 붙곤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강력한 저항 운동이 결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적 담론이 수사학적 형식을 답습하고, “논쟁의 규범에 종속” 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기득권층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주장 역시 역효과 명제의 전형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둘째는 여전히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동적 레토릭이든 진보적 레토릭이든 그 수사적 구조를 폭로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정보와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미 FTA를 비판하건 4대강 사업을 비판하건 간에 그 비판적 담론이 실질적으로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한-미 FTA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세력의 주장을 우스운 것으로 만듦으로서가 아니다. 실제로 상대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식량시장, 의료시장 개방의 야만성,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위험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상 같은 것들을 알리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짓을 밝히는 것 말이다. 4대강 사업의 경우 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2007년 대선에서 나타났듯이 오직 경제적 이슈로 환원되었던 정치의 쟁점들에서 생태라는 영역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지적

  이 외에도 이 책은 사소한 문제점, 혹은 난점들이 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번역의 문제인지, 저자의 실수인지 맥락상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혹은 앞선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반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19세기 정치적 시민권을 확대하려는 조류와 그에 대한 반동의 정치적 형세에 대해 서로 모순적인 주장을 다른 곳에서 펴고 있다.

“보통선거권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동적 조류는 …… 첫 번째 조류보다 훨씬 덜 반개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선거권을 확대하고 ‘하원’의 권력을 강화해 얻어낸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진전을 거꾸로 돌리자고 주장한 논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25쪽 

“하지만 참정권이라는 특정한 '진보'의 화신은 자유무역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그후 거의 한두 세기 동안(그리고 최소한 19세기 동안에는 분명하게)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갖지 못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명백한 민주주의적 정치 형태의 진보는 그에 대한 회의론과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49쪽 

  다른 곳에서 저자는 “1867년 개혁법과 보통선거권 일반에 대한 반대론자들 사이의 당시에 유행하던 이런 종류의 진술은, 민주주의의 도입이 상황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를 가져온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용 명제의 핵심이다”(100쪽)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용 명제라기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번역의 오류로 추측되는(하지만 원문을 모르기에 확인할 수는 없는) 부분들도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마셜의)이 단계적이고 누적된 진보 이야기는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의 이런 이행이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128쪽)라는 문장에서는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했다는 이유만으로“가 맥락상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탐구는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 단순성에 더욱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130쪽) 같은 경우도 비슷하다.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했는데, 그 단순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한지 검증(혹은 판별)받도록 하게 할 뿐 아니라“ 정도의 뜻이 아닐까싶다.  

  일일이 다 지적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맥락상 맞지 않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비문이나 약간은 생뚱맞은 개념(“여기서 파레토가 진정으로 제시하려는 핵심은, 민주주의란 다른 정치 제도와 마찬가지로 다중에 대한 '강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93쪽) 여기서 ‘다중’이란 개념이 어떤 의미로 나왔는지 모르겠다.)들도 있다. 전반부는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에 반해, 이런 번역상의 오류로 추측되는 부분은 중후반부에 주로 발견된다. 만약 번역상의 문제라면 교정될 필요가 있겠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조금 더 덜 사소한 점을 지적하자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의 구분이 때때로 불분명해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수행한 꼼꼼한 분석은 독자에게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떤 효과들을 발생시키는지 가르쳐준다. 하지만 때때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데, 그건 아마도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비용과 나타난 결과가 그로 인한 이득을 초과한다. 이 (방대한) 영역의 대부분은, 제4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위험론이 담당한다.”(187쪽) 

  긍정적인 효과들과 부정적인 효과들을, 그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득과 손실이란 양적 기준으로 치환하게 되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는 그 종적 차이를 상실하게 된다. 역효과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그 분명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했던”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며, 위험 명제가 말하는 것은 그 분명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이미 이룩했던” 성과들을 파괴하는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추천사에서 우석훈 소장도 위험 명제를 설명하며 “각종 미디어에서 ‘과잉 복지는 알코올 중독자를 양산하고 재정 위기를 가져온다’는 식의 발상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때면...”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위험 명제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적합한 설명이다.  

  비슷한 이유로,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의 질적인 차이도 상실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주장의 유일한 경험적 근거는 영국에서 국영의료서비스(NHS)를 도입한 이후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률이 하락한 게 아니라 상승했다는 주장이었다. 무용 명제 지지자들은 그 수사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해 또다시 역효과 명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106쪽) 

  사망률이 상승하면 역효과 명제이고, 그대로면 무용 명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주장, 혹은 그 근거가 역효과 명제인지 무용 명제인지 그 수치상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정확하게 분석했듯이 역효과 명제에서 그 역효과는 필연적이고 심각하지만, 무용 명제에서는 효과든 역효과든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 두 진보의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 담론 

  마지막으로 언급할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은 공산주의 담론에 관한 부분이다.  

“예컨대 무용 명제가 전개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결과로 기본적인 가치들이 급격하게 변화하면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결국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런 옹호는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이다. 두 입장의 공통된 가정은, 한편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험 명제 주장자들은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적 진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반대의 선택을 한다.“ - 206쪽 

  저자는 공산주의 담론을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불가능성에 동의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담론이 처음부터 자유와 평등, 혹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자유와 평등(추가적으로 박애)이라는, 실제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환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실천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제한이 아니라 무한한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가 어쨌든, 애초에 공산주의에 대한 담론은 두 가치의 양립불가능성이 아니라, 양립가능성을 전제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말했듯이 무용 명제와 위험 명제의 상호파괴적인 효과(그리고 그런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던 19세기 후반)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진보의 양립불가능이란 기본 전제가 무력화된 공간에서,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요청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위험 명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이 보수화되면서 전형적인 보수의 레토릭으로서 위험 명제가 사용된다. ‘지금 자유에 대한 요구는 우리가 이미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위협할 것이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론에다 현실을 섣불리 적용하지는 말 것. 그러나 이론으로부터 언제나 배울 것.

  나는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매우 훌륭하고 흥미로운 연구라는 점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결코 그가 이룩한 성과들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으며, 그럴 능력 역시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한 독자로서, 이 책이 내뿜는 강력한 유혹을 발견했기에 그에 대해 경계가 필요함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구체적 조건의 차이를 고려한 충실한 독해를 거치지 않고, 현실을 집어다 이론에 적용하고는 잘 맞아떨어진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하지만 사실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라는 틀이 우리 현실을 잘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더더욱 제시해주지 못한다.  

  허시먼의 연구가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한다면, 그건 바로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식에서이다. 그는 수사학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당시의 이론적 정세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그는 논쟁의 방법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책을 통해서나마 이런 경험은 구체적인 (정치적, 이론적) 정황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법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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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철학 분야에서 잘 나가는 저자 중에 강신주가 있다. 처음 강신주를 알게 된 것은 <철학, 삶을 만나다>를 통해서였는데, 루이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나, 알랭 바디우의 ‘보편’ 같이 난해한 개념들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것들을 접하다보니 당시의 책에 적힌 내용들이 상당히 일면적이고, 약간은 자의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책의 장점은 가족, 사랑, 국가 같은 일상적인, 혹은 현실적인 주제들과 철학적 개념들을 조화롭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강신주의 전공이기도 했고 학위 주제이기도 했던 노자철학과 장자철학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은 몇 권의 책을 훑어보면서 더 흥미를 느끼게 됐고, 대학에서 저자의 수업을 두 개 수강하고, 서로 다른 극단적인 성적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고 인기가 없었는데, 다음 수업에서는 넓어진 강의실과 몰려든 수강생을 통해 저자의 달라진 인기와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목차가 가장 매력적인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가를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와 꾸준한 저술, 강단 안팎을 넘나드는 다양한 강의로 현재의 ‘인문학 붐’을 주도하고 있는 저술가 중 한 명이지만, 최근의 저작들을 볼 때는 기존의 성공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만 들어도 골치 아프지만 때로는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철학자들과 난해한 개념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쓰는 교양서가 저자의 주무기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요구와 출판사의 홍보일 뿐이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면 철학 입문서라기보다는 철학 에세이에 가까웠고 저자가 소개하는 사상가들과 그들의 철학적 개념들은 일면적이거나 표면적으로만 다뤄지며, 독자가 요구하는 것(즉 어려운 사상가들의 이론을 쉽게 잘 이해하하는 것)을 충족시키기보다는 자신의 글에 봉사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한 책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목차(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사상가들의 이름과 개념, 저서들이 주욱 나열된)일 뿐이며, 그 점이 구매욕을 자극하고 소비로 이어지며, 그것이 표피에 불과하더라도 이름난 철학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만족감을 독자에게 생산시키고 있다.
  

 

 


 

  

 

  사실 이런 양상은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장자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난 <장자>를 읽어보지도 못했고 장자철학에 대해서는 오직 강신주를 통해서만 알고 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서양의 최신 이론을 위해 <장자>란 텍스트를 봉사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며, 저자가 장자철학과 노자철학에 대해 강렬하고 독특한 독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의 저자 자신의 매너리즘이 반복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성공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급히 오버해보면, 오히려 철학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불신이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해본다. 

 

  사실 강신주의 최근 저술에 대한 나의 불만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철학에 정통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불만의 근원은 대부분 ‘느낌’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한 나 스스로가 그의 ‘진지한’ 독자가 아니기에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가며 읽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느낌’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우연찮게 그러한 근거를 발견했다.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 비판 

  강신주는 매주 수요일 동아일보에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라는 코너를 연재한다. 지난 2월 23일자 신문에는 ‘<14> 모임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대학생들’이란 제목으로 동아리, 학회, 서클, 스터디 그룹 등 대학생들의 모임에 대해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은 그 나약함으로 인해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심리가 발생하고 그 안에서 불안을 해소하고 귀속감이란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이트 집단심리에 대한 이론과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한 개념들을 인용하며,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개성이 부정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비판 1 : 반전 결론, 혹은 훈훈한 마무리 

  대략 이런 내용을 갖는 이 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일단 비약적인 마무리는 반전에 가깝다. 내용의 대부분을 집단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능력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지적해놓고는 마지막 한 문단에서 ‘유아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딜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마침내 자신의 개성을 집단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다고 훈훈하게 결론 내린다. 이건 철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상황을 마무리 짓는 토크쇼 진행자의 재주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마지막 문단에 쓴 대로 “개성을 개화시킬 수 있는 집단 활동”의 가능성이 결론이라면 그 부분을 더 설득력 있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성이 집단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등의 권위에 기대놓고, 정작 결론은 몇 마디 그럴듯한 말로 끝맺는 건 심한 불균형이다. 이 글을 읽으면 누구든 ‘반전결론’ 아니면 ‘MC의 마무리 멘트’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비판 2 : 강신주가 인용한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2-1 : 르봉의 군중심리 이론

  더 중요한 문제점은 강신주가 인용하고 있는 르 봉의 존재이다. 사실 이 글에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가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약간 반가웠고, 그 다음에는 좀 의아했다. 르 봉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심리학자로 당시, 19세기 말 <군중심리>란 기념비적인 저서를 써서 사상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널리 읽히는 책은 아니다. 몇 년 전 동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매해서 조금 읽다 책장에 꽂아 둔걸 우연히 꺼내서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글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니 왠지 반가웠다.  

  하지만 의아했던 것은 르 봉의 <군중심리>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쉽게쉽게 인용할 만한 저서도 아닐뿐더러, 르 봉의 이론은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아 나란히 인용할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어본 사람은 누구라도 눈치 채겠지만 일단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군중을 이해하고 분석한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저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당시 19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정치적 권리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산되고,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대표적으로 보통선거제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당시 일반적으로 ‘민중의 지배’로 이해되고 있던 민주주의의 급진적 구호에 대해 공포심마저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르 봉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민중들에게 빼앗길 것을 전전긍긍하는 귀족이나 정치 엘리트였던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그는 뛰어난 이론가이며, 자신의 이론에 일관성을 갖춘 학자였다. <군중심리>를 읽다보면, 프랑스인답게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와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지능이 유사하든 아니든 그에 상관없이 그들이 군중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집단정신에 소속시켜버린다”고 말한다. 그는 군중 안에 있을 때는 개인들을 신분이나 지능, 능력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개인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중으로 변모했을 때는 그 구성원이 누가 되든지 ‘군중’이 갖는 일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반이론의 가죽을 뒤집어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군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그리고 ‘군중’이란 용어가 암시하듯, 군중을 이해하는 르 봉의 견해는 일관되게 부정적이다. (이제와 적당한 인용문을 고르려니 눈에 띄지 않고)목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군중의 충동성, 도덕성, 과잉반응성... 2. 군중의 피암시성과 잔인성... 3. 과장적이면서도 단순한 군중의 감정... 4. 군중의 편협성, 독재성, 보수성...” 등등 

  르 봉은 개인과 군중 사이에 위계적 질서를 설정한다. 그는 ‘군중’을 신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단적 의사 결정이란 민주적 의제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집단적 관계에 대해 ‘군중’이란 존재 형식 외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과 역사적 흐름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보인다. 이런 점들로 보아 그가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와 피지배계급의 정치 참여(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에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군중’의 대립쌍으로서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정치적인 의미에서)필연적으로 엘리트, 혹은 소수의 귀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문명들을 창조하고 지도한 자들은 오직 소수의 지식귀족들이었지 결코 군중은 아니었다. 군중은 오직 파괴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군중의 규칙은 언제나 야만적인 수준에 머문다."  - <군중심리>, 32쪽

 

2-2 : 프로이트와 르 봉의 관계

  하지만 부분적이긴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런 르 봉의 관점과 양립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일단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은 르 봉(물론 르 봉이 개인의 합리성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과 달리 개인의 합리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은, 한 생명체가 인간이 되는 과정과 일치하며, 따라서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역사 자체가 관계적이며, 집단적인 과정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개인의 심리와 집단의 심리에 대해 구분하겠지만 그것이 르 봉처럼 개인심리와 집단심리의 위계적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화하자면, 프로이트의 기획이 '합리성 비판'이었다면, 르 봉의 기획은 (군중의)'비합리성 비판'이었던 것이다.

  신문에 연재된 강신주의 글을 읽고는, 약간의 혼란이 느껴져 <군중심리>를 다시 펼쳐 봤는데, 거기 저자소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 기획했다고 한다.” 강신주가 <군중심리>와 나란히 인용한 프로이트의 저서가 바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다. 사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이해만 있으며,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역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의 의심에 확신이 들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는 서로 비판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세기의 반동적 심리학자의 글과 프로이트의 글을 병렬적으로 인용한 것에 대해 의아했던 것이다. 특히 저자 스스로가 무정부주의자라 말하며,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오던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물론 르 봉의 글에서 유효한 지점들이 있을 것이며,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전취하는 것은 학자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반동적으로 개입했던 학자에 대해 아무런 평가 없이 “탁월한 사회심리학자”라며 한 구절을 인용해오는 것은 썩 마땅치 않다. 르 봉의 <군중심리>가 단지 반동적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책이 히틀러, 무솔리니 등을 통해 파시즘에 기여했다는 뚜렷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에 특히 더 그러하다.  

 

비판 3 : 그는 왜 르 봉과 프로이트를 인용했을까?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라는 상호 비판적인 두 저작을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나란히 인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쉽게 알기 어렵지만, 얼마 전 (이 또한)우연치 않게 그 연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를 찾게 됐다. 며칠 전 앨버트 O. 허시먼<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란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거기에는 허시먼이 말하는 반동의 수사학 중 하나인 ‘역효과 명제’의 대표자 격으로서 르 봉이 언급되고 있었다. 허시먼이 이해한 르 봉은 앞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시먼은 르 봉이 ‘민주주의(구체적으로는 보통선거권)는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인데, 군중은 이러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은) “그러나 한편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진행하고 있던, 개인들도 결국 온갖 종류의 무의식적 욕구에 종속돼 있음을 곧 밝혀내게 되는 연구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과 군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자신의 이론을 시작한다.”   - 위의 책, 50~51 쪽 

  여기서 허시먼도 개인과 집단에 대해 르 봉과 프로이트의 견해가 서로 대립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허시먼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본문을 서술한 후 주석을 달아 다음과 의문을 제기한다. 

“이상한 점은, 프로이트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대중심리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을 때,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분명했던 르 봉의 개인과 군중 사이의 구분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 봉과 그의 저서인 <군중심리>에 대한 프로이트의 호의적 평가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전집> 제18권으로 실린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 72~81쪽을 보라.”  - 위의 책 51쪽 

 

 3-1 : 첫 번째 추측 - 프로이트의 실패한 기획?

  이를 통해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이라는 애초의 기획 의도와 달리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허시먼도 그리고 강신주도 두 저작을 친화적 관계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깎아내리거나 실패작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난 그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여타의 정황들을 볼 때, 최소한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서의 역할은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난 여기서 강신주의 글에 인용된 그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쓰지만 허시먼의 책이나 다른 검색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에는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듯하다. 그리고 원제를 보면 집단심리학이 맞는 듯하지만 처음 썼던 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부르겠다.) 

 

 3-2 : 두 번째 추측 - 사라진 비판점?

  두 번째 가능성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글에서 르 봉을 직접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것이 변화된 정치적, 사회적 조건하에서, 그러니까 변화된 지평 아래에서는 그런 대결 지점들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긴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다.(자유의 몸이 되면 빨리 프로이트부터 읽어봐야겠다.) 읽어보지 않은 관계로 일단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여기서 접어야겠다. 

 

 3-3 : 세 번째 추측 - 인용이 필요했고, 거기에 르봉이 있었다?

  세 번째이자, 이 글의 본론이기도 한 가능성은, 앞서 추측했던 것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데,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에는 르 봉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없었고, 강신주는 <집단심리와 자아분석>만 읽고, 거기에 나온 대로 르 봉을 인용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의 지적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시먼이 말한 대로 프로이트의 이론은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을 반박하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르 봉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 프로이트가 인용한 대로 르 봉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강신주의 글을 읽을 때 반복적으로 드는 것인데, 이것이 단지 나의 의심일 뿐이면 좋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괜한 의심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저자는 인용의 힘을 알고 있다. 특히 인문학, 특히 철학 책을 즐겨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권위에 민감하다. 과학처럼 관측이나 실험, 임상 등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권위 있는 권위자의 권위’에 기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곤 한다. 이런 현실은 비단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를 진지하게 사유하려 하기보다는 권위에 섣불리 신뢰를 보내곤 하는 읽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철저하고 엄격한 인용을 통해 텍스트의 권위와 신뢰를 높이는 한편, 텍스트 본래의 의미를 권위가 아니라 그 말에 의해 드러나도록 하는 1차적 책임은 쓰는 사람에게 있다. 

  강신주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쉽고, 재미있으며, 폭넓은 흥미와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는 책들이 지금 필요하며, 우리 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요구에 가장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강신주다. 쉽고 대중적인 철학을 지향하는 그의 글쓰기는 지지받을 만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그의 글들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사상가들, 수많은 저작들, 수많은 개념들은 저자에 의해 깊은 이해의 과정을 거치고 선정되어 나오기만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물론 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한 저작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거은 결코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독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사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독해 이후, 그것을 새로운 조건들과 결합시키면서 충분히 의미 있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종종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저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나오듯이 한 사람의 독서가가 책을 타자로서 대한다면, (창조적인 오독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저자와 텍스트를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라면, 자의적으로 선택적으로 인용할 것이라면, 그렇다면 굳이 왜 그 텍스트, 그 학자가 인용되었겠는가? 바로 권위 때문이 아닌가?  

 

 3-4 : 네 번째 추측 - 르 봉에 대한 재해석? 

  하지만 어쨌든 지금 말하는 것은 단지 세 번째 가능성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가능성이 있다. 르 봉을 그동안의 통상적인 견해 반동적 심리학자로서 이해하지 않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의 친화성 속에서 르 봉을 이해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 어떤 실패도 아니라, 르 봉 이론에 대한 전략적 재해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르 봉을 재해석하고 의미 있는 지점들을 적극적으로 전취해낸다 하더라도, 이미 르 봉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 있다. 저작 곳곳에 숨어 있는 엘리트주의적 언급, 비관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끼친 영향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 없이 어떻게 재해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지금의 니체가 있기까지 유럽에서 오랜 기간 니체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다시 읽는 과정들을 통해서, 나치즘에 물든 니체가 아닌,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 것이 아닌가? 즉 네 번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르 봉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강신주의 책은 여전히 읽을 만하다는 것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서 너무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특히 뛰어난 한 철학자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도 든다. 더구나 난 프로이트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저자로서 강신주의 글들이 지닌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드는 의구심들이 있었는데, 마침 신문에서 글을 본 김에 정리를 해봤다. 

  이 역시 토크쇼 진행자의 마무리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강신주의 책들은 분명 단점보다 강점이 많다. 그래서 꾸준히 출판될 수 있으며, 꾸준히 흥행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강신주만큼 매력적으로 철학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강신주의 책에 대한 추천 서평을 몇 번 쓴 적이 있고, 그의 강의를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책이 발간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다만 그의 글에서 자꾸 부딪치게 되는 불편한 점들, 그리고 들게 되는 의구심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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