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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이 책을, 주제넘게 비판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 때문이다. 추천사를 읽고, 본문을 읽고, 다시 추천사를 읽으면서,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와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을 독해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음의 글은 책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비평일 것이다.>>
최근 번역 소개된 앨버트 O. 허시먼의 저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이다. 직역하면 ‘반동의 수사학’인데, 이런 제목을 통해서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듯이 저자는 반동 세력의 논리를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수사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범위가 확장되어 보수의 수사학과 쌍을 이루는 진보의 수사학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저자 스스로도 놀라고 있지만, 이 책은 애초의 목표를 뛰어넘어 의사소통의 비타협적 단절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친화적(democratic friendly)’인 공적 담론의 구조를 확립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요컨대, 내가 끝낸 일은, 오랫동안 반동주의자 및 진보주의자 양쪽 모두가 실천해 온 비타협적 레토릭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 227 쪽
“담론이 논쟁의 규범들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종속 상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그에 따라 담론의 방법을 바꾸고 의사소통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7 쪽
책에서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힌 이러한 목적은 진보와 보수 양 쪽이 오랜 기간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반목과 비타협적 단절을 반복해 온 한국사회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추천사에서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이 말했듯이 이 책은 “한국의 상황에 ......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저자가 반동적 레토릭의 전형적 형태로 정식화한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란 틀은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보수 세력의 주장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은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혹은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보수적 담론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정치의 문제점(민주적 소통 양식의 부재, 혹은 보수적 담론에 잠식당한 공론장)을 해결하는 데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로 인해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개입하는데 저자의 분석틀을 거듭 적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유혹들은 지적 욕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매혹을 지니지 못한 이론은 좋은 이론이 되기 힘들고, 그런 유혹이 없다면 이론은 현실적인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이라고 부를 만한 이 유혹은 우리 현실과의 적합성 때문에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유혹일수록 눈을 흐리게 하는 법이다.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 현실이 지닌 구체성과 책 자체에 내재된 난점이 나타날 것이다.
수사학 분석의 모순적 구조
이 책을 독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허시먼이 수행한 수사학 분석이 이중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허시먼이 기획한 애초의 의도가 충분히 달성되었을 때, 의도하지 않았던 또 다른 결과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허시먼이 반동적 레토릭이란 분석틀을 통해 노린 1차적 효과는 분명하다. 그럴듯하고 정교해 보이는 논리로 무장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상대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고 보니, 언제나 독창적이고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사상을 제공해 온 일부 '심오한 사상가'들은 보다 덜 인상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보이게 됐다.“ -223 쪽
저자는 내용에 맞추어진 초점을 형식으로 돌려놓는다. 보수 세력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형식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수사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 주장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리고 이를 진보세력의 논리에까지 확장시킬 때 허시먼이 노린 2차적 효과는 비타협적으로 대립하는 두 주장의 자기 완결성을 상대화시키고, 반박될 수도 있고 허물어질 수도 있는, 그래서 타협이나 절충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시킴으로써,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의 의도는 '양비론'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적인 담론을, 양쪽 모두가 지닌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 이상의 것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논의가 보다 '민주주의 친화적'인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227 쪽
거리두기 1 - 구체적 조건의 차이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지닌 이중적 과제가 일관된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시 저자가 당면한 정세적 조건에 기인한다. 저자에게는 당시 보수주의 및 신보수주의의 득세(1)라는 현실 아래서, 논쟁의 성격의 전환을 통해 형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진보와 보수라는, 저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두 개의 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2)
“질서 있는 민주사회로 매우 안정적이고도 적절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사는 시민들이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몇 개의(이상적으로는 두 개의)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야 한다.” -16쪽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기획의 정치적 목표는 사회의 진보, 혹은 근본적인 전환이 아니다. 하나의 사회가 민주적 원리에 따라 질서 있고,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4)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수주의의 득세라는 당시의 정세적 효과들 중에서 민주적 소통의 불능이라는 상호분리(3)에 가장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호분리, 민주적 소통구조의 파괴가 일어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보수주의의 득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지나친(혹은 진지한) 당혹감이었다.
따라서 저자는 다른 진보적인 학자들이 수행했던 보수의 정신이나 성격에 대한 연구, “보수주의에 대한 이런 직접적이고 자칭 심층적인 공격”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특정한 효과를 노린 것인데, 즉 보수적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덜 진지하게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진보주의자에게 풍자적 태도를 강조하기도 한다.(224쪽)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에도 언급되듯이 한국 사회 역시 보수의 득세라는 동일한 조건(1)에 처해있는 듯하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과 오늘날의 한국의 정세는 공유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2) ‘보수의 득세’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반목하고 있다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고 그것이 얼마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 구도라는 개념에는 상호간의 균형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보수세력에 대응하는 진보세력이 부재한 실정이다.
일단 의회 내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들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민주당은 진보적 의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민주당 같은 경우 이미 실패했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민중운동의 현실은 더욱 열악한데, 과거의 노동자 중심의 획일적인 운동에서 다양한 부문으로의 진출은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미약하며, 노동운동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오히려 하락하며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 등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의 진보적 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적도 있지만, 이를 하나의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3) 따라서 한국에서 민주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진보와 보수 간의 상호분리라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진보 세력이 과소화된 결과, 실질적인 대화의 균형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은 힘의 압도적 우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기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었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소통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을 실현하려면 대화를 거부하는 상대를 대화의 장으로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의 보수진영이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였을 때, 오히려 더 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현 실정에서는 그것은 지난번의 촛불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4)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은 민주적인 사회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걸 목표로 했다. 따라서 극단적인 충돌로 치달을 수 있는 격렬한 갈등과 반목을 피해야 했고, 이런 이유로 허시먼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를 너무 진지한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때로는 풍자적인 태도로 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진단과 처방이 나온 데에는 미국사회가 양당적인 견제와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다는 전제가 바탕이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과 같은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없다. 첫째는 보수주의자의 득세가 초래한 결과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보수 세력의 발호는 서민들의 삶, 생태, 문화, 평화, 모든 것들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러한 현실은 유행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허시먼이 수사학 분석의 배경으로 설정한 시민혁명, 보통선거권, 사회복지라는 단계적 진보는 유보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급격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해진 세계 경제, 급속히 확산되는 사회적 불평등, 전지구적 차원의 불균형의 심화, 심각하게 손상된 생태계... 우리가 처한 현실은 시급히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도 근본적인 대전환을, 그것도 아주 폭넓은 차원에서 말이다.
거리두기 2 - 반동이란 무엇인가? 예외성의 일반성
허시먼의 프로젝트가 지닌 또 다른 난점은 그가 분석한 담론들이 역사의 극히 전형적인 형세 속에서 발생한 것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허시먼의 연구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되고 있다. 하지만 허시먼의 분석이 밝혀낸 수사적 규범은 ‘보수’의 레토릭이 아니다. ‘반동’의 레토릭이다. 허시먼은 자신의 연구에서 다룬 ‘반동(reaction)’이란 개념을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반동이란 개념은 두 가지의 지성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역학의 영향이다. 흔히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알려진 운동의 제3법칙은 “모든 움직임(action)에는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동등한 반동(reaction)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반작용’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는 ‘반동’은 모두 영어로 reaction이다. 이런 물리학적 발견과 더불어 ‘사회는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의 단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지적 조류가 결합함으로써 ‘반동’이란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단선적인 역사인식을 제거한다면, 사회진보를 되돌리려는, 낡고 수구적인, 시대착오적인, 등등의 ‘반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허시먼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동파는 “......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react)'했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허시먼이 분석한 사례들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명백하게 진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는 반동했다. 프랑스 혁명, 보통선거권 쟁취와 같이, 광범위하게 확립된 진보적 전환이 이미 주도권을 잡은 형세에서 보수주의자는 그런 진보적 전환이라는 사건에 대해 반응(react)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에서도 이런 도식이 맞아 떨어질까? 비단 오늘날의 한국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 대부분의 시기는 이런 전형적인 정세에서 예외적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예외적 형태가 일반적 형태가 된다. 오늘날 한국은 지난 십 수 년간,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지배세력의 선제공격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해야 했고, 최근 몇 년간은 토건주의 세력의 공세에 저항해야 했다.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스와핑
이런 명백한 현실 조건 속에서 반동적 레토릭을 단순히 보수의 전유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시대적 흐름이란 이름 아래 밀어붙여진 파괴적인 개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진보세력이다. 가령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진보세력의 논리는 허시먼이 말한 세가지 반동 레토릭에 부합한다.
역효과 명제 : 한-미 FTA는 오히려 서민,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무용 명제 : 한-미 FTA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위험 명제 : 한-미 FTA는 힘들게 이룩한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을 파괴할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대하는 진보세력의 비판 역시 이와 비슷한 수사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보수적 담론이 반동 레토릭에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던 것처럼(혹은, 그보다 더) 진보의 주장들 역시 기가 막힐 정도로 반동 레토릭에 맞아 떨어진다.
반동적 레토릭과 쌍을 이룬다고 한 진보적 레토릭 역시 언제든지 보수적 담론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FTA에 대한 비판에 보수세력은 진보적 레토릭으로 대응했다.
“한-미 FTA를 추진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다”라든지,
“한-미 FTA가 한국의 사회적 역량을 파괴하기보다는 더욱 강화시키는 상승작용을 이룰 것이다”
“한-미 FTA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다” 같은 것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첫째는 수사학 분석 그 자체의 역효과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공격적으로 진행될 때 성인이 됐던 나로서는 진보 혹은 좌파의 가장 큰 역할을 권력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인권적, 노동탄압적, 비민주적,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등의 수식어가 붙곤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강력한 저항 운동이 결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적 담론이 수사학적 형식을 답습하고, “논쟁의 규범에 종속” 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기득권층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주장 역시 역효과 명제의 전형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둘째는 여전히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동적 레토릭이든 진보적 레토릭이든 그 수사적 구조를 폭로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정보와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미 FTA를 비판하건 4대강 사업을 비판하건 간에 그 비판적 담론이 실질적으로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한-미 FTA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세력의 주장을 우스운 것으로 만듦으로서가 아니다. 실제로 상대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식량시장, 의료시장 개방의 야만성,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위험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상 같은 것들을 알리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짓을 밝히는 것 말이다. 4대강 사업의 경우 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2007년 대선에서 나타났듯이 오직 경제적 이슈로 환원되었던 정치의 쟁점들에서 생태라는 영역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지적
이 외에도 이 책은 사소한 문제점, 혹은 난점들이 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번역의 문제인지, 저자의 실수인지 맥락상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혹은 앞선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반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19세기 정치적 시민권을 확대하려는 조류와 그에 대한 반동의 정치적 형세에 대해 서로 모순적인 주장을 다른 곳에서 펴고 있다.
“보통선거권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동적 조류는 …… 첫 번째 조류보다 훨씬 덜 반개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선거권을 확대하고 ‘하원’의 권력을 강화해 얻어낸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진전을 거꾸로 돌리자고 주장한 논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25쪽
“하지만 참정권이라는 특정한 '진보'의 화신은 자유무역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그후 거의 한두 세기 동안(그리고 최소한 19세기 동안에는 분명하게)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갖지 못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명백한 민주주의적 정치 형태의 진보는 그에 대한 회의론과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49쪽
다른 곳에서 저자는 “1867년 개혁법과 보통선거권 일반에 대한 반대론자들 사이의 당시에 유행하던 이런 종류의 진술은, 민주주의의 도입이 상황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를 가져온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용 명제의 핵심이다”(100쪽)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용 명제라기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번역의 오류로 추측되는(하지만 원문을 모르기에 확인할 수는 없는) 부분들도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마셜의)이 단계적이고 누적된 진보 이야기는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의 이런 이행이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128쪽)라는 문장에서는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했다는 이유만으로“가 맥락상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탐구는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 단순성에 더욱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130쪽) 같은 경우도 비슷하다.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했는데, 그 단순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한지 검증(혹은 판별)받도록 하게 할 뿐 아니라“ 정도의 뜻이 아닐까싶다.
일일이 다 지적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맥락상 맞지 않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비문이나 약간은 생뚱맞은 개념(“여기서 파레토가 진정으로 제시하려는 핵심은, 민주주의란 다른 정치 제도와 마찬가지로 다중에 대한 '강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93쪽) 여기서 ‘다중’이란 개념이 어떤 의미로 나왔는지 모르겠다.)들도 있다. 전반부는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에 반해, 이런 번역상의 오류로 추측되는 부분은 중후반부에 주로 발견된다. 만약 번역상의 문제라면 교정될 필요가 있겠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조금 더 덜 사소한 점을 지적하자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의 구분이 때때로 불분명해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수행한 꼼꼼한 분석은 독자에게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떤 효과들을 발생시키는지 가르쳐준다. 하지만 때때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데, 그건 아마도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비용과 나타난 결과가 그로 인한 이득을 초과한다. 이 (방대한) 영역의 대부분은, 제4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위험론이 담당한다.”(187쪽)
긍정적인 효과들과 부정적인 효과들을, 그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득과 손실이란 양적 기준으로 치환하게 되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는 그 종적 차이를 상실하게 된다. 역효과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그 분명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했던”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며, 위험 명제가 말하는 것은 그 분명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이미 이룩했던” 성과들을 파괴하는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추천사에서 우석훈 소장도 위험 명제를 설명하며 “각종 미디어에서 ‘과잉 복지는 알코올 중독자를 양산하고 재정 위기를 가져온다’는 식의 발상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때면...”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위험 명제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적합한 설명이다.
비슷한 이유로,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의 질적인 차이도 상실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주장의 유일한 경험적 근거는 영국에서 국영의료서비스(NHS)를 도입한 이후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률이 하락한 게 아니라 상승했다는 주장이었다. 무용 명제 지지자들은 그 수사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해 또다시 역효과 명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106쪽)
사망률이 상승하면 역효과 명제이고, 그대로면 무용 명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주장, 혹은 그 근거가 역효과 명제인지 무용 명제인지 그 수치상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정확하게 분석했듯이 역효과 명제에서 그 역효과는 필연적이고 심각하지만, 무용 명제에서는 효과든 역효과든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 두 진보의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 담론
마지막으로 언급할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은 공산주의 담론에 관한 부분이다.
“예컨대 무용 명제가 전개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결과로 기본적인 가치들이 급격하게 변화하면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결국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런 옹호는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이다. 두 입장의 공통된 가정은, 한편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험 명제 주장자들은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적 진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반대의 선택을 한다.“ - 206쪽
저자는 공산주의 담론을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불가능성에 동의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담론이 처음부터 자유와 평등, 혹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자유와 평등(추가적으로 박애)이라는, 실제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환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실천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제한이 아니라 무한한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가 어쨌든, 애초에 공산주의에 대한 담론은 두 가치의 양립불가능성이 아니라, 양립가능성을 전제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말했듯이 무용 명제와 위험 명제의 상호파괴적인 효과(그리고 그런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던 19세기 후반)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진보의 양립불가능이란 기본 전제가 무력화된 공간에서,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요청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위험 명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이 보수화되면서 전형적인 보수의 레토릭으로서 위험 명제가 사용된다. ‘지금 자유에 대한 요구는 우리가 이미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위협할 것이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론에다 현실을 섣불리 적용하지는 말 것. 그러나 이론으로부터 언제나 배울 것.
나는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매우 훌륭하고 흥미로운 연구라는 점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결코 그가 이룩한 성과들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으며, 그럴 능력 역시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한 독자로서, 이 책이 내뿜는 강력한 유혹을 발견했기에 그에 대해 경계가 필요함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구체적 조건의 차이를 고려한 충실한 독해를 거치지 않고, 현실을 집어다 이론에 적용하고는 잘 맞아떨어진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하지만 사실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라는 틀이 우리 현실을 잘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더더욱 제시해주지 못한다.
허시먼의 연구가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한다면, 그건 바로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식에서이다. 그는 수사학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당시의 이론적 정세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그는 논쟁의 방법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책을 통해서나마 이런 경험은 구체적인 (정치적, 이론적) 정황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법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