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같은 일상의 디테일한 경험담이나 심리흐름에 따른 서사가 아닌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멋진 소설가라는 점 인정.

그러나 곧 세상에 홀로 남을 이 아이가 겪게 될, 종류와 정도를 가늠 못 할 폭력과 곤궁을 떠올렸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골몰하는 거야말로 무의미하나 가능성만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가혹하고 비참한 일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이 아이에게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늘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아이의 앞날은 뜨거운 물에 뿌려진 한 줌 설탕의 운명만큼이나 명백해 보였다.
편하게 해줄게.

"더러운 것보다도 슬퍼 보여서요."
손님은 고개를 기우뚱해 보였다.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콘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저는 정말로 그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니까요. 일부러발품을 들여가면서 자기 죽을 장소를 물색하는 게 자신의 생에 마지막으로 건네는 선물인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만약 그럴 작정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암울해 보였나요?"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당신에 대한 강하의…… 글쎄요, 그 불합리는 과연 뭐였을까요, 그 긴장과 불안과 원망은, 강하는 그 혼란을 평범한 일상이 주는 초조 정도 차원으로 수용하려 했어요.

원래 양가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만 해도 엄마없이는 못 산다고 그렇게 오래 엄마를 포기 못 한다며 붙잡았으면서도, 엄마를하루에 몇 번씩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갖다 버리는 상상을 한 적 있어요. 실행에옮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엄마가 떠났을 때 나한테 슬픔보다 먼저 큰 부피로찾아온 건 해방감이었어요.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싫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나는 숨기지 않겠어요, 곤, 딱히 내가 강하와 뭘 어쩌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남들같이 알찬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각자의 정신이 이미 늙어버렸지만, 그 순간 느꼈던 보통 이상의 친밀함은 그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유일한 무엇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한 조각의 감정, 한 마디의 호흡이었다고 하겠어요.

지금처럼 남들이 이미 다 밟고 떠나 누더기가 된 해수욕장에 꾸역꾸역 짐을싸가지고 온 것도 실은 아이들 학교에서 내주는 빌어먹을 방학 숙제 때문으로,
부모님과 온 가족의 단란한 피서 기록을 10분 안팎 동영상으로 저장해서 제출하는 수행평가였는데, 아빠는 그렇게 손이 많이 가거나 아이들 수준에 무리여서 최소한 어른이 신경을 써야 꼴이라도 갖출 수 있는 과제에 일절 관심을 보이는 일이 없고, 엄마는 이 과제에 담긴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을 혐오하고 있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안해하며 왔다가 쌓인 불만이 서로 터진 참이었다.
그 두 가지란, 하나는 모든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가정은화목하리라는 오류. 또 다른 하나는 모든 화목한 가정이 동영상 촬영 가능한스마트폰이나 그에 준하는 전자 기기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물질적으로 넉넉하리라는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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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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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긴장감과 박진감에 몰입돼버렸다. 문장의 호흡이 긴 작가라고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긴 문장이 지루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고 유려하다.
아쉬운 점은 투우 아버지의 방역의뢰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 후반부 투우의 조각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증오심의 감정 서사가 빈약하다는 점(의뢰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생각은 안하는 것 같다), 투우와 조각의 결투장면에서 그들 과거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장면이 너무 듬성 듬성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주인 여자의 전체적인 인상과 몸 상태는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에 올인하고 자신은 돌아볼 틈 없이 진통제로 근근이 연명하다 손쓸 수 없을 지경이 된, 보편적이며 통속적인 어머니들의 희생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사소한 권력이 다른 이에게는 증오를 넘어선 제거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단둘이라니, 아들과 딸, 이 무한한 단순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한 쌍이라니. 간결 속의 풍요를 응시하고 그것에 익숙해질수록 소녀는 자기가 떠나온 곳이 돼지우리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린 몸집에도 끼어 잘 데가 마땅치 않아 모로 누워 칼잠을 자고 막내 아기까지 같은 자세로 누나들의 가슴과 등 사이에 끼여 자다가 질식할 뻔했을 만큼 비좁고 더러워서만은 아니었으며, 치열한 아귀다툼과 함께 먹을 입만 남은 곳에서 공간과 곳간에 비례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애새끼들을 싸질러 놓은 친부모의 행위가 흘레만 붙여놓으면 꿀꿀거리며 새끼를 까는 돼지 같았다는 생각이, 당숙네를 보고서야 비로소 든 것이었다. 아이들이 한 무더기로 뒤엉켜 자는 일곱평 집 안에서 부모는 대체 그 짓을 어디서 어떻게 하고 막내까지 뽑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던 데다, 누구나 그렇게 아이를 놓고 살아야만 하는 줄로 알고 이유 불문 아이란 아들이 나올 때까지 – 그 아들을 어디다 써먹을 건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 계속해서 낳는 게 당연한 줄로 알고, 그러다 집안이 더 심하게 기울어져서 당장 손 붙잡고 굶어 죽게 생겼으면 비로소 새끼들 가운데 누군가 제일 덜떨어지거나 얼굴이 못났거나 많이 처먹어대는 녀석을 골라 다른 데다 보내버리면 그만인, 근대화가 덜 된 무식쟁이들이 돼지말고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두 명이 쓰던 부엌방도 운동장이었는데 생활수준이 올라가니 이제는 바라는 범위가 한 뼘 더 늘어나고 자신이 친척으로서 이 정도 대우는 받아도 괜찮지 않느냐는 은밀한 신분 상승의 감각, 돼지우리에서 벗어난 자신의 물리적 도약을 감사하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눈앞에 각도가 다른 현실이 펼쳐지자 자신의 겸양이 그저 기대하지 않는 척이었을 뿐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말하자면 소녀는 긴장이 풀렸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꼭 남더러 갈 곳을 끈질기게 묻더라. 당신 지금 자기가 뭐 하고 있는지 정말 알기나 해? 아는 건 단 하나, 목적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지."

당신은 얼마든지 그 사람을 바라보고 생각할 자유가 있어. 근데 자격은 없지.

"자네가 계속 일을 해나갈 팔자라서가 아닐까. 이보시게, 하나의 조직이란건 말이지. 어느날 갑자기 두목이라는 놈이 인생무상이다 만사 싫어져서 손 씻겠다며 아랫것들 불러놓고 오늘부로 우리 해산합시다, 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닐세, 두목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조직을 흩어버리거나 그 조직이 가는 길을 웬만해선 바꿀 수 없네, 그 점에 있어서는 조직의 가장 막냇동생과 다를 바 없지, 한번 구축된 조직은 이미 더 큰 질서 안에 포섭이 되어버리고, 그다음부터는 그 질서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일세. 기계의 부품이 모두 빠지고 더 이상 대체할 게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일세, 물론 대체룸은 소모되는 속도 못지않게 양산 속도도 빠르지."

그 아이가 빈정거릴 때는 상대방에 대한 뚜렷한 적의보다는 있는 힘껏 팽창된 자아가 엿보였기에, 지나고 나면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누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100세 시대의 노인이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 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흰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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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소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감정을 살아나게 한다. 주옥같다.
현실에 대해서, 그 현실의 비극에 대해서.

제도권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태어나서 두 부모의 보호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고 취업을하고 연애를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노년을 맞는 재생산 주기에 따른 생에 서사에 맞는 ‘제도’를 따르며 보호를 받고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제도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제도권 안에 살아남아 있으면 각종 보호막을 통해 삶을 일구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은행에서의 대출이라던지, 정부한태 받는 복지라던지, 주변 사람들의 대우라던지.(웃긴 건 차별적 복지마저 정말 밑바닥에 기어 있는 삶에는 손이 미치지 못한다. 못사는 것도 어느 정도 제도권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살아있다고 다 인간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는 것을 떳떳하고 남부끄럽지 않은 삶이라고 한다.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당당한 자식이 될 수 있고, 자랑스러운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성실한 국민이 된다는 것.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데 과연 이 세상에서 자유를 보장받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도권 안의 한정된 옵션들 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걸까. 우리의 자유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선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린’의 자유는 제도권의 보호막을 벗어나 소설의 화자인 엄마를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젠’ 역시 과거는 제도권 밖에서의 자유를 누리며 보통의 사람들과 남다르고 화려한 삶을 살아왔으나 요양원에서 늙어가는 노년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결국 남들에게 대리만족감이나 주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걸 보여준다. ‘엄마’역시 제도권 안에 삶을 살아왔지만 ‘젠’을 보며 제도권적인 사고에 맞서며 저항을 하고 딸의 이탈을 염려한다. 보통의 삶, 인간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대우를 받기 위해 정해진 선택사항들을 거부하는 자유는 불안할 뿐이고, 엄마의 삶처럼 성실히 제도권을 벗어나려 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본인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불안한 삶이 만들어지는 세상, 비극인 것이다.
다른 장편에서도 그랬듯이 김혜진의 소설에서 개인의 의지는 제도의 권력에 맞서 비참해지는 과정을 밟는 것 같다. 쉽게 나의 혹은 남의 비극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안에 어떤 서사가 진실을 감추고 세상을 보통의 범주로 종용해 나가는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끔 작고 마르고 보잘것없는 이 여자의 삶이 거짓말처럼느껴진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후엔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평생을 허비한 사람.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 하나 가지지 못한 이 여자에게 내가 가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세계의 풍광과 1년 내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18p)

이런 순간 더 이상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없는처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과 말을 섞고 생각을 나누고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면서 나도 젊은애들이 말하는 앞뒤가 꽉 막히고 편견으로 가득 찬, 세금만축내는 부류의 노인이 되는 걸까.
....
끝까지 남는 건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20p)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30p)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불필요한 공부를 내가 너무 많이 시킨 걸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32p)

이 애들은 유식하고 세련된 깡패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는 주먹을 쓰는 대신 주먹보다 강한 걸 쓰는 방법을 가르쳐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뺏긴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거겠지.(46p)

그건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사라지는 거다. (47p)

저 사람들은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두 집에 두고 오는 것 같다.(58p)

딸애는 내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 결코 그런 다정한 말은 나오지 않는 거겠지.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다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61p)

딸애는 또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성급하고 부주의하게 또 무슨 후회할 일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려는 것일까.(78p)

협박하듯 자식 앞에 농약을 내놓으며 같이 죽어 버리자고말하는 부모들이 있다. 실제로 자식을 먼저 죽이고 따라 죽는 부모들도 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런 말을 하려는 건아니다. 다만 그 순간 그들 내부를 채운 감정들을 짐작해 보고 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하도록, 한 사람을 밀어붙이는 감당할 수 없는 기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100p)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 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 지 않는다. 저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저렇게 말하겠지. 제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그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126p)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160p)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세요.(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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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그러했듯이 현실의 사실적인 서술에도 새로운 걸 알고 느끼게 되는 책들이 있다. 누군가의 말이나 짧은 기사 같은 걸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와 닿을 수 없는 설명들이다. 소설을 통해 긴 문장과 긴 상황설명과 감정묘사를 통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소설에 빠져버리는 경우엔 두 가지 상황으로 나뉜다. 빠져나올 수 없어 계속 독서를 하는 경우와 더이상 빠져버리고 싶지 않아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은 후자의 경우에 가까웠다. 책을 보면서 정말 깊이 빠져버렸지만 계속 너무나 무거운 상황에 기분이 내려가 책을 몇 번 덮었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지식을 배우는 것 뿐만 아니라 감정도 표현도 관계도 배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뻔하다. 사람이 너무 본능에 충실한 건 나빠서라기 보다는 배우지 못해서이다. 배우지 못한 남자들의 지리멸렬한 군상이 안타까웠다.

남성성뿐만 아니라 인간 보편적인 속물근성에 대한 냉철한 시선도 인상적이었다. 책을 보며 이 작가와는 함부로 말싸움을 해서는 안 될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잔인한 표현들이 마음에 들었다.

‘82년생 김지영’도 권장하지만 아주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접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잘해주는 아이들.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들. 부 모님이 좋아하는 아이들, 그들과 있으면 나도 그런 애가 된 기분이들었다. 나는 춘자 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송보영은 내 진심을 알아챘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쥐고 흔들 수 있었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큰 무기가 될 수있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42p)

역시, 재력이든 권력이든 성격이든. 피해자는 뭔가 만만치 않은 걸 갖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97p)

망상이 속도를 내며 머릿속을 질주했다. (139p)

함께 산다는 건, 헤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도 같다. (158p)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물어보지 않으면 된다. 그녀 역시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으니까.(161p)

폭력의 미학. 폭력의 연쇄 사슬에걸려든 비극적 인물들, 입체적이라고 했다. 앞뒤가 불룩 튀어나온 눈사람 같은 (괄호)의 주체들. 그들을 이해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다. 아니, 수진은 그 무엇도 아름답지 않았다. 누구도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강간에 대한 감각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이 폭력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괄호)에 붙들린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진도 누군가를 강간해야 하는가?(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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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이라는 곳에서 예술서적 발간지원사업을통해 책을 낸게 이정도라니 서울의 건축관련 서적의 현실이 안타까울따름.
전반부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으로 정신못차리고 사는 서울의 아류들을 수집해 놓은 인터뷰로, 후반부는 잉여로운 동네탐방을하며 현실부정 자기부정이 가득한 에세이 정도로 정리하면 되려나. 두껍지도 않고 그림도 많은 책이 이렇게 지루할 수가 라는 느낌이 드는건 공감을 염두하지 않는 글쓰기와 냉철하게 보이려고만 하고 발전적인 비판은 부재해서 오는 밑도 끝도 없는 부정적 인식때문인가.
힘든 독서였다.

직선의 규칙은 어수선한 배관만 가리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까지도 통제한다. 인천공항의청소부들은 쉴 곳이 없어 화장실에서 간식을 먹고, ‘높은분이 나타나면 화분 뒤에라도 숨으라는 지침을 받는다. 극단적인 예, 일반적이지 않은 사건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보여주기 위한 껍질과 삶을 위해 작동되어야 하는 것들 사이의두터운 경계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다. 인권보다는브랜드 이미지가 더 중요한 대기업의 상업 공간뿐 아니라집값 떨어진다고 발코니에 이불을 널지 말라는 안내문이붙는 아파트 단지까지… 질서와 통제를 내세우는 이들은 자연스러움을 혼란이라 이해한다. (184p)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의 ‘장식‘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어에서‘정돈’의 의미로 유래되었다.(228p)

요즘엔 디자이너와 일반인(?)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은 특이하지만 기능성이 떨어지는 뭔가를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돈 들이고 시간 들인것이 무색할 정도로 전시용에 그치거나, 단지 디자이너의작품이라는 것 하나로 불편함은 눈감아주는 경우들. 그런 것에이러쿵저러쿵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는 것도 질린다. 그래서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솔직한 모습에 더 끌리는것인지도 모른다. 코앞에 닥친 생계를 위한, 즐기기 위한, 혹은 둘 다를 위한 삶의 면면에서 배울 것들이 많다. 기름기 없는생생한 장면들에서.(249p)

내가 사진으로 채집한 것들을 보고 추하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지만, 미추를 판단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을 보는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몇몇 풍경에선 고운 피부로 가려진 끈적한 내장을 보는 느낌을 떨치기 힘든 게 사실이다.(281p)

"저긴 걍 돈이 없고, 거긴 술 땜에 돈이 없고, 너님은 집사느라 돈이 없고, 모 교수는 자식 유학 보내느라 돈이 없고, 저 사장은 요트 사느라 돈이 없고, 모 회장은 개인 리조트만드느라 돈이 없고… 다 돈은 모자라."(296p)

자연생태계의 종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하듯이 도시에서도 삶의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308p)

비공식 건축은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변화한다.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건축으로는 일일이 충족되지 않는세부적인 요건들이 발생할 때, 그때그때 해결하는 방식이 좀더 예민하고 대응도 빠르다. 아파트나 쇼핑센터는 어딜 가나다 비슷하지만 비닐 장판이 덮인 평상과 포장마차, 오래된건물은 지역마다 다르다. 그런 것에서 그 지역의 느낌을 알 수있다. 비공식 건축은 지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자, 효율을 위해 균질화하려는 도시의 관성에 저항하는 장치다.(300p)

내 건물도 아닌데 왜 내가 창피할까? "허영심과 빈약한 현실 사이에서 태어난 건물들. 원대한 허영심은 있는데 실력과 돈이 없으니 허접한 것이 나온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감당할수 없는 허영심과 빈약한 현실이 동시에 들켜버린 형국.(3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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