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같은 일상의 디테일한 경험담이나 심리흐름에 따른 서사가 아닌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멋진 소설가라는 점 인정.

그러나 곧 세상에 홀로 남을 이 아이가 겪게 될, 종류와 정도를 가늠 못 할 폭력과 곤궁을 떠올렸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골몰하는 거야말로 무의미하나 가능성만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가혹하고 비참한 일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이 아이에게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늘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아이의 앞날은 뜨거운 물에 뿌려진 한 줌 설탕의 운명만큼이나 명백해 보였다.
편하게 해줄게.

"더러운 것보다도 슬퍼 보여서요."
손님은 고개를 기우뚱해 보였다.
"네? 정말로 슬프거나 최악의 상황에 놓여 더 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버릴것도 없는 사람은 저렇게 술에 취해 소리칠 기운도 없을걸요. 제 눈에는 약간불행을 전시하는 걸로 비치기도 해요."
콘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
"그건 그러네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저는 정말로 그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니까요. 일부러발품을 들여가면서 자기 죽을 장소를 물색하는 게 자신의 생에 마지막으로 건네는 선물인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만약 그럴 작정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암울해 보였나요?"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당신에 대한 강하의…… 글쎄요, 그 불합리는 과연 뭐였을까요, 그 긴장과 불안과 원망은, 강하는 그 혼란을 평범한 일상이 주는 초조 정도 차원으로 수용하려 했어요.

원래 양가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만 해도 엄마없이는 못 산다고 그렇게 오래 엄마를 포기 못 한다며 붙잡았으면서도, 엄마를하루에 몇 번씩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갖다 버리는 상상을 한 적 있어요. 실행에옮기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엄마가 떠났을 때 나한테 슬픔보다 먼저 큰 부피로찾아온 건 해방감이었어요.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싫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나는 숨기지 않겠어요, 곤, 딱히 내가 강하와 뭘 어쩌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남들같이 알찬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각자의 정신이 이미 늙어버렸지만, 그 순간 느꼈던 보통 이상의 친밀함은 그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유일한 무엇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한 조각의 감정, 한 마디의 호흡이었다고 하겠어요.

지금처럼 남들이 이미 다 밟고 떠나 누더기가 된 해수욕장에 꾸역꾸역 짐을싸가지고 온 것도 실은 아이들 학교에서 내주는 빌어먹을 방학 숙제 때문으로,
부모님과 온 가족의 단란한 피서 기록을 10분 안팎 동영상으로 저장해서 제출하는 수행평가였는데, 아빠는 그렇게 손이 많이 가거나 아이들 수준에 무리여서 최소한 어른이 신경을 써야 꼴이라도 갖출 수 있는 과제에 일절 관심을 보이는 일이 없고, 엄마는 이 과제에 담긴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을 혐오하고 있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안해하며 왔다가 쌓인 불만이 서로 터진 참이었다.
그 두 가지란, 하나는 모든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가정은화목하리라는 오류. 또 다른 하나는 모든 화목한 가정이 동영상 촬영 가능한스마트폰이나 그에 준하는 전자 기기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물질적으로 넉넉하리라는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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