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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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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장과 시대적 배경과 인물 관계도 때문에 내용에 집중할 수 없어 빠르게 훑어나갔다. 10대 시절의 이반, 팬픽 문화 등등의 소개 글을 보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좀 부끄러웠고 이 부끄러움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잘 읽혔다.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랬을 거다.
우리가 같이 공유했던 과거 중 언급해선 안되는 부끄러움들이 있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더 작가에겐 이 소설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소설의 말미에서 이 모든 부끄러움을 전복시켜버려 참 감사했다. 너무 급격하게 슬퍼졌다. 내가 지우고 싶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들 삶의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점이 말이다. 그동안 이 소재에 대해서 왜 아무도 나서서 문학이란 작품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던 걸까. 어느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다가 죽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소재는 다시 우리 수면 위로 끌어내야 할 것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도, 화자가 좋아했던 선배도 아닌 인희라는 친구였고, 그래서 인희라는 존재감은 이 소설의 묵직한 중심축이 되고 있었다. 특히 화자와 인희가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 화자가 그때 우리는 미쳐있었다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참 가슴이 아렸다. 그때부터 이 소설은 작가가 어딘가 있는 ‘인희’라는 대상들에게 바치는 진심 어린 사과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논점을 벗어나 우리가 쫓는 유행이라는 것, 실체를 가지지 않고 진정성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트렌드가 순수한 본질을 호도하고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따르던 유행들이 뒤돌아서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게 보통 아닌가. 유행이나 대세를 쫓지 않아도 자신의 확고한 신념은 시간이 지나도 자랑스러운 것일 텐데.

교사들은 누워 있는 행위와 팬픽 읽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실 그들이 금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 P26

이는 자유롭고 느긋한, 즉 이기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척 유혹적이었다.
그들은 속삭였다. 뭔가가 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대의나 애국심, 위인전, 전부 다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사람들을 세뇌시켜 자기들 이익을 지키도록 앞장서게 만드는 술수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너에게서 오후에 느긋하게차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조차 빼앗아 갈 거야. 뭣 때문에 그렇게 살아? 너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도 괜찮아. - P95

"내 생각에 김경열은 그냥 잘해 주는 거였던 것 같아. 경미가 자기를 좋아하니까. 경미가 착각한 거야."
어느 순간 내 얼굴이 굳었다.
"자기도 좀 심각해진다고 느꼈는지 최근에는 경미를 멀리했어."
‘착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었다. 혜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혜진의 말을 듣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착각‘이라는 단어처럼 한 사람을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 있을까. - P127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 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 P153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P159

"학교 다닐 때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후배들의숭배를 받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히죠. 저도 처음에는 말하고 싶어서 온몸에 좀이 쑤셨어요. 나 좀다른 애야, 그런 거요. 갑자기 평범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만 되면 입이 근질거렸어요. 그러다 몇 번 쓴맛을 보면서 서서히 입을 다물게 되는 거죠."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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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 건축 - 마음을 사로잡는 영국의 공간 브랜딩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8
양지윤.김주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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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인 건축물이 탄생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맥락을 정리해 놓은 저술이다. 건축,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상징이 되는 랜드마크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상징물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며 하나의 상징으로 심연에 자리잡는 것을 다뤘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에 편파적인 관점이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아이콘은 권력의 욕망으로 탄생한다. 과거 피라미드부터 고딕 성당, 의사당까지 권력의 확장된 표현형의 결과물 중 하나가 건축이 되었고, 이러한 상징물의 역사는 권력의 이동과정(절대권력-종교-국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는 그러한 권력이 자본으로 옮겨와 기업의 상징물인 랜드마크가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상징적인 건축물이나 장소가 사람과 자본을 모으는 몇 가지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저자가 말하는 아이코닉한 건축의 외형적 특징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과거의 권력과 자본이 표출된 랜드마크와 뒤섞여 구별하지는 못한 듯하고, 책에 소개된 사례는 조금 과거의 철 지난 트렌드의 한 목록에 지나지 않나 싶다.
과거의 아이코닉한 상징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해보는 기회로서는 적절하다.

도시 재생의 키워드로서 지역 경제의 부흥에 일조하고, 지역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건축은 이제 어디에나 있다. 아이코닉 건축이 세계의 도시에 전략적으로 건립되고, 우리의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이코닉 건축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문화 자본과 이에 대한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현대인의 여가 생활인 쇼핑에서 찾을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쇼핑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 먼저 이성적 판단을 기초로 가격 비교, 구매 편리성, 서비스에 따라 만족을 느끼는 ‘실용적 쇼핑 가치utilitarian shopping values‘가 있다. 그리고 감정적 동기에 기반한 ‘유희적 쇼핑 가치hedonic shopping values‘가 있다. 유회적 쇼핑은 쇼핑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한 감정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같은 물건이라도 깔끔하고 우아하게 디자인된 상점을 선호하는 것, 쇼윈도의 감각적인 디스플레이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윈도쇼핑을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이때 가격보다는 쇼핑의 경험이 주는 심미성이나 기분 전환,
즐거움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급 숙박과 서비스, 음식과 교통수단, 방문지를 선택해 우월적인 경험 소비를 보여 주려는 것이 그 예다. 자랑할 만한 이을 한다. 훌륭한 관광 자원인 동시에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그 지역의 상징이 되어 간판sign 역할는 ‘인증샷‘의 배경이 되는 필수 방문지이며, 그 지역을 관광하고 왔다는 증표가 된다. 사람들은 에펠탑을 소개하는 이미지를 볼 때마다 프랑스 여행을 떠올린다. 만약 에펠탑 모양의액세서리를 기념품으로 구입했다면, 그 액세서리는 마치 섬네일thumbnail처럼 여행의 추억을 압축적으로 재생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이코닉 건축은 장소와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추억의 아이콘이자, 소비자의 경험을 전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이 문화를 경험하는 통로이자, 문화 쇼핑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디자인 경영학의 선구자인 브리짓 보르자드 모조타BrigitteBorja de Mozota는 공간 아이덴티티spatial ident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기업의 빌딩과 공간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한 영속적인 매개체가 된다는 의미다. 사무실과 공장같은 업무 공간이나 부티크 같은 상업 공간이 공간 아이덴티티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건축의 내부와 외부는 기업의 메시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내부와 외부 관계자들에게 일관성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수행한다.

지역과 단절된 기호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든 기호의 의미는 문장의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맥락주의는 건축의내외부적 요소에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령문은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지만, 전체적인 환경 차원에서는 장식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건축에서는 절대적인 맥락과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건물의 완전한 의미만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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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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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숨 쉬고 사고하는 모든 것들의 수 만큼 서사가 존재하기에, 가끔 세상을 바라보면 그 거대한 세계의 질량이 주는 압박감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같은 공간에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마저도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을 읽다 보니 그런 압박의 감정들이 몰려왔다. 인물들의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분위기에 끌려오다 소설의 말미에 뒤집어지는 반전과 이야기의 장치들이 나를 교란시켜 다시금 복잡한 기분에 휩쓸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장욱의 소설처럼 세상을 이해해야겠다. 그의 소설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겠다.

나는 그 방의 공기를 조금씩 호흡하며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과묵한 손님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묵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희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희망은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좋았다. 그런 희망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하지않고, 죽게 만들지 않으니까. - P17

나는 내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형태를 갖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사건이나 현상에 즉시 반응하는 것이 내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 P21

상대에 대해 예의 바른 거리를 만들어 내는 미소 말이다. 염의 입에서 나온 게 욕설뿐이었다면아마도 끝까지 평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정을 잃는다는은 곧 실패를 의미하니까. 실패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걸 의미하니까. - P36

애도란 산 자들의 것이라고 말한 이가. 죽음이 뚫어놓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산 자들의 의식이라고 말한 이가. 그렇다. 그것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수행하는 인간의 제도에 불과하다. 나는 애도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구멍속으로 나 자신을 들이밀고 싶은 인간이다. 그 구멍이 나를 잡아먹을 때까지. 그 구멍이 나를 완전히 수긍할 때까지.
A가 죽었다. A가 시신으로 변했다. 삶이 제거된 하나의 물질로 바뀐 것이다. 혈관의 피와 뇌의 운동이 정지한 것이다.
그 물질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죽음을 완성하고 승인해서, 죽은 자의 삶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떼어 내겠다는 뜻 아닌가. 시신의 세계에서 보면 추모라는 형식 자체가이미 모욕이 아닌가. 이미 나 자신이 그 모욕의 일부가 아닌가. - P53

보수 언론이 제작한 녹음 테이프를 튼 기분이었다. 노동 착취로 성장한 국가가 여전히 그 착취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논리. 일하는 자들의 고통을 끝없이 요구하는 성장의 논리, 철저하게 동물화된 약육강식의 세계. 수긍할 수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미칠 듯한 적의를 느끼던 시절의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 P54

터널은 약간 흰 채 뻗어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긴 터널이 있었나…… 나는 중얼거렸다. 길고, 어둡고, 정지할 수 없는 터널이었다. 터널이란 참으로 알맞은 인생의 비유가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다. 입구와 출구의 사이는 일직선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말하자면 출생이 있고,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인생은……… 터널이다.
상투적인 비유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상투적인 비유만큼 위대한 것이 있을까? 예술적인 척, 독창적인 척하는 것들의 허세보다는, 차라리 상투적인 것들의 몰취미가 아름답지 않은가? - P103

그 유명 감독들의 영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독들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취향을 과시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꼬일 대로 꼬인 상징들로 가득한 영화들, 롱 테이크를 쓰면 예술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영화들, 인생의 지루함을 닮는 게 리얼리즘인 줄 아는 영화들…..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 P109

이런 이야기를 A에게 하고 있다니. 내 웃음 끝에서 쓴맛이 배어 나왔다. A는 학점이니 연수니 토익이니……… 그런 것들과무관한 친구였다. 짐짓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녀의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세계의 논리 바깥에있었다. 그런 A가 나를 따라 웃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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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정신 오늘의 젊은 작가 18
김솔 지음 / 민음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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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답을 구해야 하는 한국식 교육방식에 익숙한 작가가, 독자에게 집필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소설의 의미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듯한 불친절한 소설....
마르케스를 좋아하는 독자로써 약간의 반가운 대목이 있긴했지만....

화학과 물리학에 조예가 깊은 직원들이 물질들을 적절히 섞고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시료의 절반을 만들어 내면, 나머지 절반은 문학과 철학, 언어와 역사를 전공한 직원들이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분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우려한 바대로, 하나를 없앨 때마다 두 개 이상으로 늘어나는 변수들과 이들을 조합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실험은 매번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 P24

그래도 우연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위대하고 많은일들을 처리해 왔는지 잘 알고 있는 직원들은 상투적인 결말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업무를 묵묵히 처리했으며 희생의 이타적 목적을 점점 깨달아 갔다. 하지만 현재는 더 이상 질문을 생산하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답변만을 소비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질문이 불어날수록 불안감도 함께 커졌고, 결국 그 무의미한 질문들이 회사를 절멸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 P26

농사나 사냥이 그러하듯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순간을 기다려 감사하고 수긍하는 것이지, 극복하고 개선하는 게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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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별 볼일 없는 작자들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초보적인 레파토리는 비슷할 것이다. 뭔가이슈가 되는 주제나 단어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배껴오는 것으로 글머리를 시작한다. 주제와 유사한 과거의 사례나 신문기사를 인터넷에 검색하여 자료를 긁어 모으고 편집하여 분량을 확보한다. 논점에서 벗어난 소재라 할지라도 아주 미세한 정도의 교집합이 존재하면 주제와 개연성을 무시하고 일단 가져와서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다. 분량은 어마어마한 수치의 폭격으로 채울 수 있다. 통계적인 수치를 디자이너의 능력을 빌려 그래프로 나타내고한 자 한 자 읊어대기까지 하면 피상적이고 보나 마나 한 책을 완성할 수 있다.
점점 분량이 늘어나면 흡족해지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간을 넘어가 자신이 써야 하는 주제에 대해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시작부터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인 과거 사례와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왔지만,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문장으로 결론에 이르려 애쓰거나 앞으로 생각해 볼 문제라며 미래 독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한다. 할 수 있는건 결국 디자인과 편집에 공을 들여 표지를 예쁘게 뽑아내는 것이지만 이건 저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분야는 아니다.


그냥 공짜로, 전자책에 익숙해지기 위한 시도정도로 괜찮다.

미국 의학협회는 의료 종사자들의 악수를 금기한 바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CDC의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100명 중 4명 정도가 의료 종사자의 손을 통해 옮겨진 세균에 감염되는데, 이로 인한 사망자만 연간 7만 5000명이었다. 병원의환자와 의료 종사자가 인사한다고 악수하다가 죽는 사람이 매년 7만 5000명이라는 건, 병원 외에 일상에서 악수하다가 손을 통해옮겨진 세균에 감염되어 병에 걸리거나 죽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매년 10만여 명이 악수 잘못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셈이다.
이건 미국만의 숫자니까, 전 세계로 확장시키면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악수 때문에 죽는 것이다.

1979년 동독 수립 30주년 행사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의 형제 키스 장면은 역사적장면 중 하나다. 1989년 동독 수립 40주년 행사에선 고르바초프가 호네커와 형제 키스를 나눴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건재했던196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냉전시대 때 사회주의 국가 정상들끼리 나눈 사회주의 형제 키스나 포옹 사진이 꽤 남아 있는데, 이것이 광고에 패러디되어 쓰이기도 했다.

우린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초연결 시대에 단절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과의 연결에서 오는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 감정 소모, 피로에 대한 거부다. 하루종일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다.

불편한 소통 대신 편한 단절

이제는 더이상 사람이 사람을 직접 보며 감시하고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술적 진화와 산업적 진화 때문이다.
우리의 사무실 공간이나 일하는 방식은 우리가 임의로 정한 게 아니다. 기술적·산업적 진화에 사회적 진화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기계공학자이자 산업공학자엔지니어 프레드릭 테일러 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는 ‘과학적 관리법 Scientifie Management‘을 창안해 공장 개혁과 경영 합리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에 의해 완성된 테일러리즘 Taylorism(1904)은 사무실 공간 설계를 할 때, 업무의 효율적진행과 함께 쉬운 감시 감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책상들이 직급별로 일렬로 배치된다. 동일공간 내에서 가장 많은 책상을 밀집시켜 배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초기 사무실은 대부분 이런 형태였다.

코로나19는 누굴 만나고, 어떤 모임에 나가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등 평판 관리와 투명성에 대한 자각에 좀더 눈뜨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낯선 상대의 호의나 오지랖에 대해 더 경계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행동에서도 남들이 알았을 때 문제가 될 것에 대해 더 조심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유흥업소에서 접대받고, 뇌물 주고받고, 짬짜미로 계약하는 것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관성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이것이 문제라는 자각이 부족했던 이들도 생각의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접대 없이는 비즈니스가 안 된다는 한국적 마인드를 깨는 데 사회적 투명성과 함께 언컨택트 트렌드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직접 대면하면서 몰래 하던 것과 달리, 언컨택트의 방식으로 하게 되면 근거가 다 남는다. 가장 대표적인 언컨택트가 캐시리스 다.

여전히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업종들도 있다. 사실 사람들이 앉아 있을 때 그들을 감시 감독하고 제어하는 것이 훨씬 쉽다. 사무실 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한눈에 파악하기도 쉽다. 현대적 사무실의 책상과 의자 배치는 이런 의도가 담긴 채 만들어졌고, 이 방식은 전 세계 기업의 사무실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1960년대 독일식 사무 공간‘이라는 뜻의 뷔로란트샤프트 Bitrolandschetit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파티션도 일부 도입되고 프라이버시 보호에도 신경 쓰는 등 테일러리즘의관료적이고 감시 감독하는 환경에서 조금 벗어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들어 개방된 공간에서 벗어나 파티션도 많아지고, 아예 독립적인 칸막이로 나눠진 구조가 확산되었다. 1990년대 들어 컴퓨터가 사무실 책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무 공간 구조도 변화하게 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실리콘밸리의 IT 기업들이 개성적이고 독특한 사무 공간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재택근무와 원격근무가 더 보편화되면서, 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다 보니 상시적 자기 책상이 있는 사무 공간에서공용으로 쓰는 사무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대학들은 그동안 오프라인에서 넓은 캠퍼스와 수많은 건물을 지으며 부동산 가치를 자산으로 삼고, 스포츠팀을 운영하며, 수익사업과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대학이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대학의 비즈니스를 위해 학생들이 존재하는 건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학의 중심이 교육이 되기 위해선 오히려 온라인 기반의 비대면 모델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미네르바 프로젝트 Minerve Project의 설립자이자 CEO인 벤 넬슨 Ben Neson이 미네르바 스쿨을 만들기 위해 가졌던 문제의식이라고 밝힌 내용들이다.

비대면 주문 자체가 핵심이 아니다. 비대면이라는 것은 사람은 빠지지만 그 자리에 애플리케이션과 데이터가 들어간다는 것을의미한다. 이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해야 경쟁력을 가지는 시대에선 중요한 자원이 된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 AI 스피커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온라인 광고 시장에서 개인화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결국 이들의광고 수익은 우리의 사생활이자 개인정보를 활용해 얻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로 인해 벌었지만 우리에게 나눠주진 않는다. 엄밀히 말해 여기서 우린 데이터 노동을 했다. 우리가 뭘 샀는지, 뭘 봤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관심 있어 하는지등 데이터의 흔적을 남겼고, 그 과정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래서 이런 데이터 노동에 대해 수혜를 본 기업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 제기된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데이터 노동의 가치를 더 인정해줘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지만, 기업으로선 이런주장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기존에 공짜로 활용하던 우리의 사생활과 데이터 노동에 돈을 지불하기 시작하는 건 그들로선 끝까지저항해서라도 버틸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건 기업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다.

사회 양극화, 경제 양극화는 단지 부자와 서민의 차이가 커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 불평등의 심화를 얘기하고, 중간계층이 사라지는 것을 얘기한다. SF영화에서 다룬 미래 사회의 모습에서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만든 사회적 신분에 따른 거주 지역의 분리다.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계층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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