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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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장과 배경과 관계도에 내용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10대시절의 이반, 팬픽 문화라는 소개글을 봤지만 그래도 좀 부끄럽고 이 부끄러움을 들춰내고, 이런 부끄러움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게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잘 읽혔다. 너무나 잘 알고있어서 그랬을거다.
우리가 같이 공유했던 과거 중 언급해선 안되는 부끄러움들이 있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래서 더 작가에겐 이 소설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서 이 부끄러움을 전복시켜버렸다. 너무 급격하게 슬퍼졌다. 내가 지우고 싶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들 삶의 실체로 자리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점이 말이다. 그동안 이 소재에 대해서 왜 아무도 나서서 문학이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어느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다가 생을 마감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97p)이 소재는 다시 우리 수면위로 끌어내야 할 것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도, 화자가 좋아했던 선배도 아닌 인희라는 친구였고, 그래서 인희라는 존재감은 이 소설의 묵직한 중심축이 되고 있었다. 특히 화자와 인희가 학교 앞에서 만났을 때 화자가 그때 우리는 미쳐있었다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참 가슴이 아렸다. 그때부터 이 소설은 작가가 어딘가 있는 ‘인희’라는 대상들에게 바치는 진심 어린 사과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논점을 벗어나 우리가 쫓는 유행이라는 것, 실체를 가지지 않고 진정성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트렌드가 순수한 진실을 훼손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따르던 유행들이 뒤돌아서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되는게 아닌가. 유행이나 대세를 쫓지 않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은 지나고 보면 더 자랑스러운 것일텐데.

교사들은 누워 있는 행위와 팬픽 읽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실 그들이 금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P26

이는 자유롭고 느긋한, 즉 이기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척 유혹적이었다.
그들은 속삭였다. 뭔가가 되려고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대의나 애국심, 위인전, 전부 다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사람들을 세뇌시켜 자기들 이익을 지키도록 앞장서게 만드는 술수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너에게서 오후에 느긋하게차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조차 빼앗아 갈 거야. 뭣 때문에 그렇게 살아? 너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도 괜찮아.- P95

"내 생각에 김경열은 그냥 잘해 주는 거였던 것 같아. 경미가 자기를 좋아하니까. 경미가 착각한 거야."
어느 순간 내 얼굴이 굳었다.
"자기도 좀 심각해진다고 느꼈는지 최근에는 경미를 멀리했어."
‘착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었다. 혜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혜진의 말을 듣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치부가 드러나는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착각‘이라는 단어처럼 한 사람을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 있을까.- P127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 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P153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P159

"학교 다닐 때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후배들의숭배를 받고. 하지만 대학에 가면 완전히 세상이 뒤집히죠. 저도 처음에는 말하고 싶어서 온몸에 좀이 쑤셨어요. 나 좀다른 애야, 그런 거요. 갑자기 평범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만 되면 입이 근질거렸어요. 그러다 몇 번 쓴맛을 보면서 서서히 입을 다물게 되는 거죠."-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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