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 숨 쉬고 사고하는 모든 것들의 수 만큼 서사가 존재하기에, 가끔 세상을 바라보면 그 거대한 세계의 질량이 주는 압박감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같은 공간에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마저도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을 읽다 보니 그런 압박의 감정들이 몰려왔다. 인물들의 감정이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분위기에 끌려오다 소설의 말미에 뒤집어지는 반전과 이야기의 장치들이 나를 교란시켜 다시금 복잡한 기분에 휩쓸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장욱의 소설처럼 세상을 이해해야겠다. 그의 소설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겠다.

나는 그 방의 공기를 조금씩 호흡하며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과묵한 손님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묵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희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희망은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좋았다. 그런 희망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하지않고, 죽게 만들지 않으니까. - P17

나는 내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형태를 갖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사건이나 현상에 즉시 반응하는 것이 내겐 매우 어려운 일이다. - P21

상대에 대해 예의 바른 거리를 만들어 내는 미소 말이다. 염의 입에서 나온 게 욕설뿐이었다면아마도 끝까지 평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정을 잃는다는은 곧 실패를 의미하니까. 실패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걸 의미하니까. - P36

애도란 산 자들의 것이라고 말한 이가. 죽음이 뚫어놓은 구멍을 메우기 위한 산 자들의 의식이라고 말한 이가. 그렇다. 그것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수행하는 인간의 제도에 불과하다. 나는 애도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구멍속으로 나 자신을 들이밀고 싶은 인간이다. 그 구멍이 나를 잡아먹을 때까지. 그 구멍이 나를 완전히 수긍할 때까지.
A가 죽었다. A가 시신으로 변했다. 삶이 제거된 하나의 물질로 바뀐 것이다. 혈관의 피와 뇌의 운동이 정지한 것이다.
그 물질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죽음을 완성하고 승인해서, 죽은 자의 삶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떼어 내겠다는 뜻 아닌가. 시신의 세계에서 보면 추모라는 형식 자체가이미 모욕이 아닌가. 이미 나 자신이 그 모욕의 일부가 아닌가. - P53

보수 언론이 제작한 녹음 테이프를 튼 기분이었다. 노동 착취로 성장한 국가가 여전히 그 착취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논리. 일하는 자들의 고통을 끝없이 요구하는 성장의 논리, 철저하게 동물화된 약육강식의 세계. 수긍할 수 없는 지배와 피지배의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미칠 듯한 적의를 느끼던 시절의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 P54

터널은 약간 흰 채 뻗어 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긴 터널이 있었나…… 나는 중얼거렸다. 길고, 어둡고, 정지할 수 없는 터널이었다. 터널이란 참으로 알맞은 인생의 비유가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다. 입구와 출구의 사이는 일직선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말하자면 출생이 있고,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샛길이나 갓길 같은 것은 없다. 인생은……… 터널이다.
상투적인 비유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상투적인 비유만큼 위대한 것이 있을까? 예술적인 척, 독창적인 척하는 것들의 허세보다는, 차라리 상투적인 것들의 몰취미가 아름답지 않은가? - P103

그 유명 감독들의 영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독들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취향을 과시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꼬일 대로 꼬인 상징들로 가득한 영화들, 롱 테이크를 쓰면 예술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영화들, 인생의 지루함을 닮는 게 리얼리즘인 줄 아는 영화들…..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 P109

이런 이야기를 A에게 하고 있다니. 내 웃음 끝에서 쓴맛이 배어 나왔다. A는 학점이니 연수니 토익이니……… 그런 것들과무관한 친구였다. 짐짓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녀의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세계의 논리 바깥에있었다. 그런 A가 나를 따라 웃었다.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