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공용 본드로 지압용 신발의 묵은 때를 벗길 수 있다? 할 수 있다. 목공용 본드로 지압 신발 바닥에 2mm두께로 얇게 펴 바른후 6시간 동안 잘 말려서 마른 본드의 끝부분을 잡고 아래에서 위쪽으로 천천히 잡아 당기면 묵은 때까지 같이 올라와서 깨끗해진다.

2

다 쓴 섬유유연제 통으로 꽃삽을 만들 수 있다? 이 통이 P인지 확인하고 색연필과 칼을 준비하고 손잡이 부분을 중심으로 꽃삽 모양을 색연필로 그려서 밑그림대로 조심스럽개 자르면 양날 꽃삽이 될 수 있다.

3

설탕으로 천연 제모제를 만들 수 있다? 따뜻한 물로 피부를 닦아 모공을 넓혀준되 못 쓰는 설탕을 모아 물과 설탕을 1:2 비율로 섞어주고 녹을 때까지 끓이면서 타지 않도록 저어준 다음에 뜨거운 설탕을 식힌 후 붓을 이용해 피부에 발라준 뒤에 설탕을 바른 곳에 천을 밀착시키고 시간이 지난 후에 털이 난 반대 방향으로 떼어낸다.

4

우유 점토 만드는 방법

1.원하는 색깔의 주스나 분말을 우유에 첨가합니다.
2.우유 막이 생길 때까지 가열한 후에 식초를 두 스푼 정도 떨어뜨립니다.
3.보글보글 덩어리가 생길 때 까지 잘 저어 줍니다.
4.우유 용액을 거즈에 걸러 물기를 뺀다.
5.물기를 뺀 덩어리 반죽을 골고루 섞어 꾹꾹 놀러 준다.
6. 색깔이 선명해질 때까지 잘 말리면 완성이다.

5

고체 풀통으로 휴대용 비누 만들기

1.다 쓴 고체풀통의 뚜껑과 심지를 분리하여 따뜻한 물에 담가 둔다.
2.30분 정도 불린 후 깨끗하게 수건으로 닦아준다.
3.쓰고 남은 조각 비누를 모아 따뜻한 물을 불려준다.
4.고체 풀통에 불린 비누 조각을 눌러 넣어 준다. 이때 빈툼이 생기지 않도록 꾹꾹 눌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5.지저분한 비누 조각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충분히 굳을 때까지 말리면 완성이다.

6

고무장갑으로 액체 조미료 뚜껑 만들기

1.구멍 나지 않은 고무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4cm 가량 가위로 자른다.
2 .송곳을 이용해 손가락 끝 부분에 작은 구명을 낸다.
3.따뜻한 물에 넣어 자른 고무장갑의 곁과 속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4.뚜껑을 빼둔 액체 조미료 통에 쐬우면 완성이다.

정말 이 여섯가지는 기억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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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파비아전투에 대해서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 배워보겠다.

파비아 전투란? 
이탈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환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또한 프랑스 군이 전의 포 공격은 막아 주는 보호처에 숨어 있으면서 잘 먹고 지내다가 에스파냐의 아르크뷔지에(화승총으로 무장한 부대)의 급습에 패배하였다고 하여 굶주린 배가 승리한 전투라고도 하며 패주병 사냥이 매우 처참하여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이라고도 한다. 

파비아전투의 내용  
파비아 근처를 흐르는 티치노 강까지 몰린 스위스 용병 부대의 대다수는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떨어져 비명과 함께 숨져 갔다. 프른츠베르크의 종군 서기관 라이스나는 "신은 이날 은총을 베풀어주지 않았다."면서 쓰러져 전쟁의 사악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프른츠베르크의 종군 서기관 라이스나의 말대로 신이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았을까? 이 전투가 프랑스에 정말 나쁜 영향을 끼쳤을까? 그렇다면 이 전투의 결과는 어땟을까?  

이 전투로 프랑스 군 2만 8000여 명이 거의 전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수아 1세는 포로가 되었 마드리고 호송되었다. 신의 은총이 없었기에 이러난 이 일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서 일어난 일 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안에서 어떻게 했을까? 

그러한 포로의 치욕과 함께 처음부터 무리가 타랐던 왕의 밀라노 공위 계승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부르고뉴 전쟁에서 이겨 루이 11세가 프랑수 왕가로 편입했던 부르고뉴 공국 또한 합스부르크 가로 넘겨주는 굴욕적인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이 것인 파비아 전투의 결과라 말인가...... 왜 이렇게 참혹할까? 그렇다면 이후 어떻게 했을까?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던 이 조약을 마드리드 조약이라고 한다. 이 마드리드 조약으로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게속 이탈리아 전역은 합스부르크 가의 대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파비아 전투는 프랑스에 신의 은총이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 파비아 전투는 프랑스의 참혹한 결과를 준 전투이다. 이를 통해 또하나의 세계사에 대해서 잘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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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중국 광둥에서 태어났 쑨원은 일찍이 홍콩과 하와이에서 서양 의학 등의 신식 교육을 받았는데 한동안 의사를 활동하다 1894년 베이징으로 가 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때 그는 흥중회라는 혁명 단체를 결성했다. 흥중회라는 혁명 단체를 결성한 쑨원은 과연 어떤 일을 했을까? 

첫번째  
쑨원은 다음 해 10월 광저우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 곳에서 청국 공사관에게 체포되었고 홍콩 의학교 때의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두번째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마야사키 도텐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 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또 한 차례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 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의 유학생등 혁명 세력을 통합하여 중국 혁명 동맹화를 결성하고 반청 무장 봉기를 되풀이했다. 

세번째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안 그는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렵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ㅂ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었다. 

그후 그는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죠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하고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다졌다. 그리고 국민 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늘 쑨원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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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의 뜻을 찾아보면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로 풀이되어 있으며 삼고초려에서 유래된 삼고지례는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이라는 뜻으로 설명되어 있다고한다. 그렇다면 이 삼고초려와 삼고지례는 제갈공명과 유비하고 어떤 관련이 있을까?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조조만큼 권력을 갖지 못한 유비는 싸움터에서 작전이나 계략을 궁리해 낼 사람이 필요했다. 매번 조조 군에게 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제갈공명이라는 사람을 원했을까?

유비는 제갈공명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유비는 양양에 있는 제갈공명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없었다. 세 번째 찾아가서야 겨우 제갈공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라하여 유비는 세 번째 방문으로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으며 바로 이 일에서 삼고초려라는 유명한 밀이 나온 것이다. 아하 삼고초려의 뜻을 잘 몰랐다.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와 제갈공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된다.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집으로 세 번 찾아가 간청하여 드디어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이 일에서 유래한 말로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제갈공명은 유비가 촉으로 세우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유비가 죽자 그의 이들 유선을 도와 촉의 세력을 기르는데 힘을 기울렸다.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략가이며 충신으로 꼽힌다. 

유비가 세 번째에 가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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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대표적 명의로 허준을 꼽는다면 중국에서는 화타를 들 수 있다. 중국 후한 말 패국 사람인 화타는 신체 단련 및 건강과 섭생 방법에 밝았으며 내과와 외과 부인과 소아과 침구과 등에 두루 정통했는데 특히 외과 수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전해진다. 술과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외과 수술을 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화타가 서양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연구하였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서양 의학에서는 1846년 치과 의사이자 하버드 대학생인 윌리엄 모턴이 에테르를 이용해 무통으로 치아를 뽑는데 성공했지만 화타는 그보다 훨씬 앞선 2~3세기경 첫 번째 마취 수술에 성공했다. 삼국지에서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치료해 준 사람도 이 화타인데 화살 맞은 부위를 째고 뼈에 퍼진 독기를 탈로 긁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관우는 아픔을 잊기 위해 바둑에 집중했다고 한다. 아프지 않았을까? 아무리 바둑에 집중한다고 해도 말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하라고 천거하였으나 그는 명예와 이익에 담담해 모두 거절했으며 권력자의 전담 주치의도 사양했다. 조조가 그를 불려 병을 보게 하고 시의가 되기를 강요하였으나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가 거짓이 발각돼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럴수가 어째서 이렇게 좋은 것을 거절했을까?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나 결국 훗날 위나라 조조의 시의가 된 화타는 조조에게 뇌수술을 제의하지만 의심 많은 조조는 자신을 해치려는 계략으로 생각하고 화타를 사형시킨다.

정말 화타는 조조를 위해 애써는데 너무나 억울할 것 갔다. 그리고 벼슬이나 돈에 관심이 없는 화타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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