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파비아전투에 대해서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 배워보겠다.

파비아 전투란? 
이탈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환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또한 프랑스 군이 전의 포 공격은 막아 주는 보호처에 숨어 있으면서 잘 먹고 지내다가 에스파냐의 아르크뷔지에(화승총으로 무장한 부대)의 급습에 패배하였다고 하여 굶주린 배가 승리한 전투라고도 하며 패주병 사냥이 매우 처참하여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이라고도 한다. 

파비아전투의 내용  
파비아 근처를 흐르는 티치노 강까지 몰린 스위스 용병 부대의 대다수는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떨어져 비명과 함께 숨져 갔다. 프른츠베르크의 종군 서기관 라이스나는 "신은 이날 은총을 베풀어주지 않았다."면서 쓰러져 전쟁의 사악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프른츠베르크의 종군 서기관 라이스나의 말대로 신이 은총을 베풀어 주지 않았을까? 이 전투가 프랑스에 정말 나쁜 영향을 끼쳤을까? 그렇다면 이 전투의 결과는 어땟을까?  

이 전투로 프랑스 군 2만 8000여 명이 거의 전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수아 1세는 포로가 되었 마드리고 호송되었다. 신의 은총이 없었기에 이러난 이 일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서 일어난 일 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안에서 어떻게 했을까? 

그러한 포로의 치욕과 함께 처음부터 무리가 타랐던 왕의 밀라노 공위 계승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부르고뉴 전쟁에서 이겨 루이 11세가 프랑수 왕가로 편입했던 부르고뉴 공국 또한 합스부르크 가로 넘겨주는 굴욕적인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이 것인 파비아 전투의 결과라 말인가...... 왜 이렇게 참혹할까? 그렇다면 이후 어떻게 했을까?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던 이 조약을 마드리드 조약이라고 한다. 이 마드리드 조약으로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게속 이탈리아 전역은 합스부르크 가의 대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파비아 전투는 프랑스에 신의 은총이 베풀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 파비아 전투는 프랑스의 참혹한 결과를 준 전투이다. 이를 통해 또하나의 세계사에 대해서 잘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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