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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는 틀렸다 -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지음, 박형준 옮김 / 동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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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GDP 4만 불이면 모두 부자가 될까? 대학 등록금, 사교육비, 주거문제, 의료비, 사회적 만족도등 모든 것이 지금보다 2배 더 좋아질까? 왜 기업은 현금을 쌓아놓고 배부른 콧노래를 부르는데 가계 빚은 1000조에 육박하는 것일까? 초인플레이션이 눈앞에 가다왔는데도 정책적 논리 때문에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관료들을 동정해야할까?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은 사회적 우위를 점하면서 모든 것을 함부로 통제하려하는가? 우린 그들의 실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대중을 통제하는 ‘통계’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GDP’는 한국의 대표적인 ‘행복지수’(?)다. 정부 관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GDP를 정책의 기준으로 삼는다. 도대체 GDP가 무엇 이길래 모두들 GDP 만을 바라보는 것일까? GDP에 대한 오류는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불만과 불안요소로 표출되고 있다. 실절적인 생산수단인 노동자들에 대한 만족도가 GDP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GDP는 편익을 추구하려는 기득권자들에게 엄청난 통제력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NDP(국내 순생산)에 대한 활용도가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감가상각’ 이라는 국민계정요소를 포함시키지 않음으로 경제학자들에게 머리 아픈 과제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변화하는 경제적 욕구를 GDP만으로 설득하기에 한계에 봉착한 것인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을 필두로 세계 경제학자들이 진보적인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른다.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계측을 위한 위원회’ 라 불리는 CMEPSP는 GDP의 한계를 파악하고, GDP가 지닌 문제점을 파악하며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지표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GDP 는 늘어나는데 삶은 팍팍해진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GDP 만을 놓고 봤을 땐 위와 아래가 분명한 논리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 GDP에 대한 기준은 ‘생산’ 이지 ‘행복’ 이나 ‘삶의 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통계시스템은 우리의 삶을 ‘평균’으로 측정해왔다. 평균이란 말이 참으로 묘해 빈부의 격차도 쉽게 해결하곤 한다. GDP의 함정은 우리들이 요구하는 시대적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적 행복을 평가할 때조차 생산보다는 소득이나 소비에 주목하라’. 인간이 지닌 모든 가치를 ‘화폐’로 평가 할 수 있을까? 생산에 대한 개념보다 소득과 소비에 집중하는 시대에, GDP의 그릇된 판단은 사회를 리드하는 정책의 오류로 이어질 것이다.

‘기업 프렌들리’ 참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선 ‘가계’가 존재해야 하는데 앞으로 가계 부채 문제가 어떻게 풀어질지 모두들 불안하기만 하다. GDP의 중심은 기업이다. 하지만 사회적 구성원 일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다변적인 상황에서 GDP는 ‘가계’ 에 더욱 집중해야한다. 왜 가계는 대차대조표에 목을 매는데, 국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일까? 혹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비자금이나 부정부패의 탐욕자금이 이곳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재산 지표를 올바르게 작성하는 것은 공신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정부와 관료에 대한 믿음을 주는 행위다. 숫자에 빠져들어 사회를 잃어버리는 모순이 반복된다면 통계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복잡하다고, 불편하다고 손대지 않는다면 기득권자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우린 부지불식간에 혹은 어쩔 수 없이 국가의 정책을 따라야하는 국민이 아니다. 사회는 구성원 개개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소통과 토론의 문화가 정착될 때 보다 나은 대안을 만들 수 있다. GDP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세계적 대안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행복은 성적 순’ 이라는 모 기사의 글을 보면서 그 행복이 지속가능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결코 통계적 수치가 아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 그리고 장 폴 피투시의 ‘GDP는 틀렸다’. 통계적 선택에 대한 준비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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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비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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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는가? 지금 당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순수한 당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들인가? 너무도 당연시 인식되었던 사유재산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소유에 대한 의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면 당신은 공짜로 사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미치는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우린 대가에 대한 지불수단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간과하지 않고 있다.

대가란 다름 아닌 ‘지식’이다. 지식은 누구나 사용가능한 자원이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지는 않다. 미국과 아프리카를 비교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두드러진다. 미국인들에게 지식은 공짜점심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식기반경제을 근간으로 세계최고의 삶의 질을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프리카인들이 지식경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한편에선 공짜로 지식을 사용하는데 한편은 지식의 유무조차 알 수 없는 것일까? 문제는 편중된 지식이 빠르게 부의 편차를 늘리고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불로소득을 누려왔던 미국도 점차 지식을 사용하는 빈도의 수에 따라 심각한 부의 편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자유시장이 추구하는 이상으로만 바라보기에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점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왜 세상은 불로소득에 관용을 베푸는 것일까? 이에 대한 소위 상위1%의 해답은 거의 묵묵부답이다. 지배력이 우선권임을 자부하지 않기에 누구도 먼저 불로소득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지상주의를 설파하며 불로소득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인다. 그들은 과거와 다름없이 왕정이 추구해왔던 ‘지식의 독식’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워린버핏과 빌 게이츠가 추구하는 공익재단은 그 내용이 어떻든 상위 1%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면죄부란 생각이 든다.

본 책 ‘독식 비판’은 너무도 당연시 되었던 사회현상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결국 공적인 사업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로 사업의 성공이나 부의 팽창을 이루었지 어느 것 하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지식경제의 힘’ 이다. 그는 경제성장의 원천을 지식으로 보았으며 이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음식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부의 분배 또한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져야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공정한 계산이란 들어있지 않았다.

1인시대가 산업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초기발명가들로부터 탈출한 문화적 혁명은 곧 지식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지식은 일부인 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그리고 최근의 금융자본주의까지, 지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단에서 이젠 자체적으로 재산권을 형성하고 있다. 문제는 지식의 편중이 가져다주는 극한 사회불안이다. 부의 편중에 관한 논의가 해묵은 논쟁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불안한 사회구조는 심각한 혼란을 잉태한다. 부의 편중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지식의 독식하는 자들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프리카에 태어났다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까? 다소 엉뚱한 질문이지만 진보니 복지니 하는 문제의 근원을 기회와 균등으로 확장한다면 얼마든지 부에 관한 상대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한 지식경제를 풀어나갈수 있는 해법으로 저자는 ‘철학적 고찰’을 논의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정당성을 확보하진 못한다. 만약 지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이 보편화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질까? 이에 대한 의문도 역시 미지수다. 하지만 독식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위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지식경제를 이룬 현대인들에 주는 뉴턴의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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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카페베네의 성공스토리, 수많은 자영업자들에게 꼭 고하고픈 책!!

 

 

 

 

 
 

 

 

 노후에 대한 대책을 물어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과연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연금은 노후를 풍요롭게 해 줄것인가?

 

 

 

 

 

 

 자본주의의 수수쎄끼와 돈에관한 진실에 가장 근접할 수 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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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 모르면 당하는 확률과 통계의 놀라운 실체
카이저 펑 지음, 황덕창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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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린 ‘평균적인 삶’을 갈망하고 있다. 평균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조건을 제시해 준다. 몇 평의 아파트, 몇 cc의 자동차, 얼마의 봉급, 심지어는 아이의 수까지, 모든 것에 평균이 있다. 평균은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혹, 우리의 삶이 평균이라는 숫자에 종속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우린 모든 것을 평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업은 평균을 알아야만 목표를 정할 수 있다. 만약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사업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균은 불특정한 상황을 측정 가능한 변수로 만드는 특징이 있다. 평균을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이 금융권이다. 은행은 엄청난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이 가능한 금리를 결정한다. 요즘엔 정치적인 압박이나 외부변수가 편차를 만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믿는 것은 고객의 데이터뿐이다. 그런데 보험이라면 어떨까? 가장 안전하다는 자산 보험, 보험은 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최적의 상품이다. 하지만 문제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다.

2004년 플로리다 주에서 가장 큰 손해보험회사로 부상한 포우 파이낸셜은 8년 연속 40%성장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달성하고 있었다. 설립 이후 1억 달러의 순이익을 내고 있었기에 누구도 포우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허리케인은 포우의 모든 결과를 앗아가 버렸다. 포우는 이제 가능성보다는 파산을 걱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보험사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과거의 빈도를 중심으로 계산해 보험료를 결정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포우는 누구보다 업계를 잘 알고 있었고 보험숫자에 능했지만 단 한 번의 허리케인에 녹다운 된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보험사들이 골머리를 안고 있는 것이 가변성이다.

미국 수학능력 시험(SAT)에 관한 놀라운 진실이 있다. SAT를 시행하는 ETS는 1975년 골든 롤 보험사의CEO였던 루니에게 소송을 당한다. 루니는 보험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보험판매원 시험을 주관하는 ETS가 흑인들의 취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시험내용이 철저하게 백인에게 유리하게 되어있어 취업을 희망하는 흑인들에겐 치명적인 결과라고 사회정의(?)를 주장한다.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지만 이 소송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SAT 시험은 치밀한 공정성 아래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시험출제자들은 인종, 성별, 종교등을 예상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삭제한다. 그들은 통제가 가능한 평균적인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하지만 SAT 역시 보험회사와 마찬가지로 가변성이라는 변수를 간과한 부분이 있다. 즉, 집단적 비교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집단’에 한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환경적 요인부터 다르다는 것인데 이는 허리케인의 피해를 보상하는 사람은 내륙지방 사람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그들은 위험요소가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높은 지역의 사람들과 같은 보험료를 지출하고 있다. 시험문제 역시 환경적 혹은 생태적 요인이라는 가변성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논란의 소지가 없어질 것이다.

숫자를 중심으로 한 통계는 우리사회의 모든 부분을 종속하고 있다. 우리를 판단하는 것은 내면의 가치가 아니라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뿐이다. 숫자는 우리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고 판단을 부정확하게 한다. 간혹 필요치 않는 용기를 주는 것도 숫자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이 믿는 숫자는 오류가 없는 것일까? 숫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큰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을 통계화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들 역시 그 한 부분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이 그지없지만 역시 또 하나의 숫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에서 결코 숫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자회를 해본다.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카이저 펑의 놀라운 통계학적 접근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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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는가 - 지구를 위협하는 맛있고 빠르고 값싼 음식의 치명적 유혹
파울 트룸머 지음, 김세나 옮김 / 더난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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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피자가게는 자영업자들이 꿈꾸는 몇 안 되는 성공아이템들 중의 하나다. 동네 빵가게와 닭튀김집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에 비하면 피자가게의 생명력은 놀라울 뿐이다. 실제로 가격파괴를 중심으로 한 저가형 피자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헌데 피자에 대한 의문점을 가진 적은 없는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피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 반죽하고 숙성시키며 토핑하고 오븐에 굽는 시간만 해도 족히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늦어도 10분이면 특대사이즈 피자한판이 포장까지 완료된다. 패스트푸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먹는 피자의 진실은 무엇일까? 왜 우린 달콤한 설탕과 지방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햄버거의 보존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천연자연 식품은 산소나 물이 닿는 순간 부패가 시작된다. 그만큼 빨리 소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아이들이 매일 먹는 햄버거는 몇 주가 지나도 탐스러운 빛깔을 자랑한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인 햄버거엔 조리과정이 없다. 완전 냉동식품으로 완료된 제품으로 출시가 된다. 단지 튀기고 조합하는 과정만 매장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햄버거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변질, 부패, 변색, 오염을 방지하기위해 엄청난 첨가제와 화학물질을 투여한다. 이러한 물질들이 우리 몸에서 쉽게 소화가 가능하리라 보는가? 건강에 좋지 않고 열량만 높은 패스트푸드는 비만, 당뇨, 고혈압등과 같은 성인병과 우울증 등 정신질환에 치명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몸에 좋지 않은 패스트푸드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첫 번째 원인은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식품회사들의 광고 때문일 것이다. 침 넘어가는 광고의 유혹을 참는 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수십억을 광고에 투자하는 식품회사들이 결코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 자신들의 제품의 위험성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두 번째는 맛에 대한 유혹을 참기 어려운 우리의 속성과 값싼 제품에 길들여진 소비심리가 주원인일 것이다. 인간의 뇌는 설탕과 지방, 나트륨에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즉, 달콤함, 목을 넘기는, 부드러운 이란 소리만으로도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된다는 것이다. 또한 패스트푸드 음식들은 비싸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먼저 가격을 염두에 둔다는 사실은 공급자나 소비자에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피자를 중심으로 한 패스트푸드는 지구를 덮어버렸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거대 식품회사들의 간판을 볼 수 있고 메뉴 또한 다르지 않다. 세계인들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같은 음식을 접하고 있다. 이는 식품회사 CEO와 일부 관료들에겐 큰 이익을 줄지 모르지만 인류에겐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주범이 되고 있다. 거대 식품회사들과 화학회사들은 값싼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저렴한 화학식품을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 기회비용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되고 있으며 고통은 스스로 해결해야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먹는 것에 대한 공포는 정치적으로도 가장 민감한 주제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침이 넘어가는 광고를 본다고 해도 거부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우린 넘쳐나는 중국산 재료를 거부하지만 외식에 대한 선호는 갈수록 늘어간다. 외식은 우리들에게 필요 없는 나트륨과 첨가물을 공급한다. 또한 대부분 값싼 재료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중국산을 거부하는 우리의 통제권을 쉽게 벗어난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의지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결방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유기농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유기농이 좋다고 하니(돈벌이가 되니) 대기업들도 뛰어들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익이다. 아무리 좋은 유기농일지라도 배송과정이 길거나 다량 생산한다면 결국 패스트푸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과다한 육류섭취는 자신의 건강을 쉽게 해칠뿐더러 지구를 오염시키는 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직접 재배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다국적 회사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더욱 많은 화학식품을 만들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아는 것, 21세기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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