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테이너블 엑설런스 - 미래를 선점하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코드
아론 크래머.재커리 캐러벨 지음, 이진원 옮김 / 더난출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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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 안을 살펴보자. 옷장엔 철지난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있다. 그 옆을 채우고 있는 건 언젠가는 사용하리라 마음먹었던 물건을 넣어두었던 박스들이다. 박스엔 추억보단 자욱한 먼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니 필요한 일이 있더라도 철지난 옷과 먼지 수북한 박스를 열어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세련되고 멋진 옷과 공구 혹은 제품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은가? ‘소비’에 관한한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부에선 오히려 소비가 줄어들까봐 걱정하고 있지 않는가?

생산과 소비에 관한한 중국은 할 말이 많은 국가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이 가공할만한 성장을 이루는 동안 배출했던 환경오염물질의 기준을 새롭게 자국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껏 이용해놓고 이제 와서 당신은 안 된다 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감정을 자극하는 것밖엔 안 된다. 이들의 염려(?)와는 달리 중국은 처음부터 환경오염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중국정부는 양쯔, 황허등 대륙을 관통하는 젖줄을 폐수로 오염시키면서까지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또한 가공할만한 생산기지가 되어 세계의 원자재를 싹쓸이하고 있다. 이미 세계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국의 농촌, 폐기물 때문에 질병이 창궐하는 도시주변, 이제 부패한 관료들조차 이대로 가서는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에게 성장은 삶의 지표와도 같다. 하지만 단기적인 성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환경오염이 결국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국적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포함되어있다. 성장이 과연 모든 것을 해결해줄 만능의 열쇠일까? ‘서스테이너블 액셀런스’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탁월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기업들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1987년 노르웨이 수상을 지냈던 하람 브룬트란트는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 이라 정의를 내렸다.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 말을 실천하는 기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기업들의 경영방식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무슨 말이든 그들에게 유리한 상황이면 ‘자유자본주의, 시장원리’를 내세우고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나는 듯이 공적자금에 사활을 건다. 한마디로 경쟁보다는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문제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론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글로벌 기업들이 에코매지네이션 운동으로 턴을 하고 있겠는가? 그들은 보다 근접한 거리에서 소비자를 상대하길 원한다. 리더십에 대한 재발견, 경영 방식의 재고찰, 무엇보다 기업을 이끌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부각 되고 있다. 서스테이너블 엑셀런스는 최근에 첨예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동반성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어떤 상황이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없듯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다면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세계는 빠르게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되고 있다. 이제 누구도 하나의 개념이나 이론만으로 상황을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둘러싼 애플과 삼성간의 글로벌 다툼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구글이 어떻게 특허권을 알지 못하고 삼성에 판매를 했을까? 결국 문제는 애플의 위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글로벌 시장엔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 단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첨예한 경쟁과 까다로운 법적인 절차만이 남겨질 뿐이다. 지속적인 탁월함은 기업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기 보다는 생존이 가능한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탁월함을 보여주는가? 하루아침에 수조원대의 기업들이 몰락하는 현실에 기업의 성장 코드는 무엇보다 중요한 생존조건이 될 것이다. 2020년을 선도할 한국 기업들은 어떤 기업들일까? 그들은 과연 지속가능한 탁월성을 지니고 있을까? 서스테이너블 엑셀런스를 통해 그 해답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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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에 대비하라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김현구 옮김, 남상구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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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군가는 정처 없이 길을 걸어가고 누군가는 아무런 생각 없이 길을 걸어간다. 간혹 정신을 차리라는 목소리를 듣기도하지만 불필요한 소리라 판단해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믿을 수 없지만 특별한 대안이 없기에 대중적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내일보다는 눈앞의 불편함에 필요이상의 신경을 쓴다. 당연히 우리들이 요구하는 경영, 경제학의 가치는 불편함에 대한 감수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편익을 볼 수 있는 구조, 우린 어느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편익을 추구하고 있다. 누구도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에 동정의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비용으로 전락한다면, 아니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경제학은 행복을 추구하기위한 학문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을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 낸다. 통계, 수치, 데이터, 경제학을 이끄는 변수들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만치 외부의 침입을 불허한다. 이러한 명분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놀랍게도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에 비해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의문이다. 왜 우린 100년 전의 경제학적 고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를 예측할 수 있다는 필요이상의 뻔뻔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빠르게 진화되어가는 국제정세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볼 수 있는 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는 변화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블랙 스완’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역작이다. 일견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는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했을 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마치 하얀 백조사이에 검은 백조를 발견했다면 말이다. 나심은 반복되는 경제위기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어리석음에 더 이상 희망을 걸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행된다. 그나마 자산을 보존하고 생존을 연명하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통찰력을 부여해야한다. 우린 나심이 말하는 칠면조가 아니기에 충분히 고려할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누구도 스스로에게 ‘이럴 것이다’ 란 예측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심은 대표적인 비관론자이자 독설가다. 그렇다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필요 없는 가설과 엉뚱한 방향설정으로 마치 신이 된 듯한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불편함을 토로한다. 실제적으로 그의 강의는 우리들이 알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통계나 모델보다는 경험치를,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조언보다는 ‘하지 말라’ 는 부정적인 조언에 귀를 기울이라 충고한다. 또한 경쟁구조에서 이기려고하기보다는 실수를 줄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며 역시 과도한 낙관을 유심히 살펴보라는 충고도 곁들인다. 실제로 그가 추천하는 투자방법은 10%는 옵션에 90%는 국채라는 다소 특이한 방법이다. 아무리 기대치가 커도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원칙이며 이는 불필요한 예측을 대비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수익률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나심은 규모의 경제를 비판한다. 즉 큰 것은 추하고 허약하다는 이론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는 월가의 금융회사들을 보면서 합병을 통한 규모의 경제가 언제까지 국민의 기대치를 만족할지 의문이 든다고 한다. 규모는 부의 독식과 모럴해저드라는 필요치 않는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의 이론을 읽다보면 마치 고대의 제사장이 예언을 하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귀를 기울이고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변수에 대항하지 말라는 부분은 수치를 다루는 통계학자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블랙 스완’은 그가 선택한 경고의 목소리다. 우린 참으로 겸손할 필요가 있다. 있는 것에 만족하고 충분한 교감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세상에 이를 수용할 국가나 개인이 존재할까? 사회적 합의는 고통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 언뜻 스쳐간다. 블랙 스완은 경이로움이 아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우리들이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의 생존의 법칙에 대한 나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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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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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타들의 자살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다. 그들은 사회가 원하는 모델이었고 추종하는 자들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한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삶의 모든 부분이 대중들에게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으로 인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을 선택할 기회를 쉽게 얻지 못한다. 도시를 배회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인생을 가꾸고 있는가? 인기인들 못지않게 우리 모두는 자신을 갈망하고 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리 없다. 우린 스스로에게 커다란 올가미를 씌우고 있다. 절벽위에 선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불쾌한 상상이다. 하지만 일상은 나를 절벽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중성은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두운 곳을 좋아해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당신의 사용하던 물건, 당신이 만나는 사람, 당신이 매일 사랑을 속삭이던 가족들에게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차가움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지금 어느 세계에 있는 것인가? 당신은 ‘나’ 인가 아니면 다른 객체인가?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내 몸은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거대한 파도 속으로 돌진한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나는 나를 다시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제3기 문학’을 출발하는 최인호 작가님의 새로운 장편소설이다. 30년 동안의 주제가 타인을 위한 역사와 종교였다면 이번 작품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결국은 나마저 사라져버리는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을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라 자평한다. 그는 현재 암투병중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허락된 시간을 통해 그가 바라본 세상은 나를 잃어가는 도시의 군상과 마치 미로처럼 얽힌 세상을 빠져나오려는 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존재하지 않는 나를 찾아나서는 K의 혼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예전과 다름없는 토요일 아침, 요란한 자명종이 울린다. K는 분명 달콤한 늦잠을 자기위해 토요일엔 자명종이 울리지 않게 해놓았다. 자명종은 결국 그를 침대에서 일어나게 만든다. 욕실에 들어선 K는 알몸뚱이를 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된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K,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낯선 감정을 느낀다. 이상하다. 모든 것이 바뀐 것 같다. 그가 사용하던 스킨도 사라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는 어젯밤 일을 기억해낸다. 의사 친구와의 만남, 끊임없는 친구의 불평, 그리고 어두운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그리곤 기억이 없다. 핸드폰과 함께 어젯밤의 1시간 30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K는 처제의 결혼식에 도착하면서 더욱 혼란에 빠진다. 돌아가셨다던 장인이 버젓이 살아있고 모든 이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우여곡절 끝에 핸드폰을 주은 사람과 연락이 닿아 그를 만났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핸드폰을 주은 곳이 영화관이란다. 어젯밤 술집을 기억하는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영화를 보러 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왕복거리만으로도 2시간이 족히 걸릴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타임머신 속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K가 찾은 곳은 어젯밤 술집이었다. 그 곳은 성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호스트바였다. 분명 이곳이 맞는데, 그는 아무런 기억을 할 수가 없다.

K는 의사 친구의 권유로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누나를 만나기로 한다. 잠시 정신적 혼란이 있었을 것이란 위안을 주면서. 하지만 K는 익숙지 않았던 누나와의 포옹과 사는 모습을 보며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누나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K는 분명 다른 K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작가는 원리 원칙적이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K를 등장시켜 일상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를 보여준다. K는 주변의 작은 물건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가족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건은 K를 중심으로만 이루어진다. 어느 것 하나 변한 것 없는데 K의 선택만이 변하는 것이다. K는 자신에게 닥친 극도의 혼란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만나는 사람은 K다. 바로 자신이다. 문득, 어딘가에 자신의 가면을 쓴 자신이 있을 거란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또한 진짜일까? 그렇다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무엇일까? 일순간 세상이 케오스에 빠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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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한 친구들 스토리콜렉터 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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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비결, 에어컨 바람보다 뒷목을 서늘하게 하면 된다. 상상의 동물인 인간은 특별하게도 뇌의 작용만으로도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소설은 상상을 이끌어내는 최적의 장소다. 그런데 왜 우린 비현실적인 세계를 탐닉하는 것일까? 혹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에 빠져들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설의 매력, 누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타우누스 시리즈’로 일약 세계적 문학가가 된 넬레 노이하우스, 그녀의 네 번째 소설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플롯과 범죄를 만들어가는 군중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덕분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서 군중은 절대적인 역할을 작용한다. 군중은 기득권을 위해 완전범죄를 가장하지만 진실을 수렴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녀가 선택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범죄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 즉,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기만으로 범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긴박한 사건진행과 인간이 지닌 본연의 욕구에 충실한 넬레의 타우누스 시리즈, 그녀가 선택한 스릴러의 한계는 어디일까?

동물원에서 절단된 손과 발이 발견된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지점, 부패를 시작한 시체가 발견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보덴슈타인과 직관력이 뛰어난 여형사 피아가 사건현장에 도착한다. 일상적인 탐문이 이루어지는 순간, 살해된 시신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인물인 파울리임이 밝혀진다. 비록 지역교사였지만 자연보호, 환경연합, 동물보호등 다수의 단체를 이끌고 있었던 파울리는 그 영향력만큼이나 정적이 많았다. 보덴슈타인은 사건이 광범위하게 퍼질 것이란 예상을 한다. 파울리와 크고 작은 영향력을 맺은 어떠한 사람이든 세상에 비판적인 그를 죽일만한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시작과 더불어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빠뜨린다. 그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범죄에 대한 구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물원장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사건은 꼬리를 물고 퍼져가며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한 둘 등장한다. 하지만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는 루카스의 등장은 다소 의아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노엘의 소설은 빼어난 사건구성 못지않게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이는 살인사건과 교묘한 교차를 이루며 색다른 흥분을 유발시킨다. 사랑에 실패한 피아, 그녀는 용의대상자인 동물원장과 루카스에게 애정공세를 받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혼란을 느낀다. 그런데 간혹 보덴슈타인의 집안배경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 작가는 보덴슈타인과 아내와의 갈등관계를 부각시킨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형사지만 그들 역시 내면적인 갈등 앞에선 사건의 대상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보덴슈타인은 특유의 감각으로 복잡한 사건을 능수능란하게 풀어나간다.

범인은 뜻밖의 인물이다. 헌데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은 루카스에 대한 오해(?)를 전혀 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보덴슈타인의 직감이 지속적으로 빗나가는 것일까? 이에 반해 피아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루카스를 바라보는 둘의 차이는 본 소설이 지닌 극적인 반전을 예상한다. 대부분의 살인이 그렇듯이 동기 또한 무척 빈약하다. 살인사건으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 그 이면에 가려진 추악한 사회의 내면, 탐욕에 찌들어가는 기득권 세력, 무엇보다도 질투 때문에 ‘너무 친한 친구들’을 배신한 그들에게서 우린 어떤 모습을 투영할 수 있을까?

넬레의 작품엔 다수의 주변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웃들이며 친척들이다.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지만 어느 한 순간 누군가를 살인자로 지목한다. 그들에겐 저마다의 충분한 동기가 있다. 팍팍한 삶속에 가려진 인간의 비관적인 내면을 꺼내려는 것일까? 일순간 우린 넬레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사로잡히고 만다. 각박한 사회, 하나를 더 가지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사회, 그들은 입으로는 공존을 외치지만 마음엔 탐욕이 가득하다. 파울리의 이상도 루카스의 열정도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결국 소유로 인한 불행이라는 마지막 결론은 넬레가 전해주고자 하는 극렬한 메시지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가? 더위를 한방에 식혀줄 ‘너무 친한 친구들’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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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본성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 삼천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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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가치를 아는 순간이 있다. 조그만 동전하나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다. 이제 돈은 소비의 기준이 되고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생산의 수단이 된다. 돈을 주고 행복을 살 수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거라 믿는다. 물론 현재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우린 삶을 위해 돈을 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정하기에 저축과 투자를 한다. 마치 인생의 모든 부분이 돈과 결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돈의 본성을 한번이라도 의심 해본 적이 있는가?

권력과 돈의 함수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복잡하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돈이 배경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돈은 어느덧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우리들이 추구하고자하는 돈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데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돈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사회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은 그렇다 쳐도 기업이나 국가 역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다.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돈,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한 돈, 돈은 물물교환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무형의 상품까지 사고팔 수 있는 극한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돈은 개인은 물론, 기업이나 국가의 지위를 이동시킨다. 달러에 연동되어있는 환율은 국가가 지닌 경제적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신용평기기관에 의해 최저등급으로 하락한 그리스는 돈을 빌리기 위해 엄청난 프리미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여 실질적인 경제를 부양하는 국가도 있다. 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의 역할을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월가다. 그들은 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탁월한 재주를 갖추고 있다. ‘파생상품’으로 대변되는 돈의 자가 증식과 갬블을 연상시키는 옵션거래는 돈이 지닌 무한한(?) 매력이다.

저자 제프리 잉햄은 케임브리지 대학 사회과학자로 화폐가 정치와 사회문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역사적 배경을 통해 서술한다. 그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른 화폐경제학이 과연 얼마만한 효용성을 주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중립적 이미지를 벗어던진 화폐의 상품화와 무분별한 부채를 양산하는 통화주의자들에 깊은 반감을 표시한다. 또한 신용사회에서 화폐의 역할과 이를 역이용하는 허구적 사회구조를 반성해야한다고 말한다. ‘돈의 본성’은 돈에 관한 역사적 고찰로 출발해 신용화폐가 어떻게 사회구조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굳이 세밀하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돈에 좌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금리만 올려도 서민경제엔 눈살이 찌푸려지고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실질금리를 하락시켜 주머닛돈을 감소시켜버린다. 인간의 일생동안 필요한 돈은 얼마일까? 만약 정확한 통계나 수치가 있다면 실질적인 구매력을 계산하여 돈의 필요량을 산출한다면 돈이 추구하고자 하는 중립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돈은 시간에 대한 이자와 물가상승에 대한 가치하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매일 바뀌는 환율은 어떻게 붙잡으라는 말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돈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상품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돈은 확고한 지불수단이다. 만약 돈이 지급불능이 된다면 돈을 발행하는 국가는 파산할 것이다. 돈이 지켜야할 것은 신용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지만 결국 국가들 간의 외교 전략도 신용등급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다. 비싼 이자는 돈이 지닌 힘을 보여준다. 결국 화폐를 통제하는 국가가 패권국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우린 매 순간 돈을 벌기위해 고민을 하고 연구를 하지만 결국 돈이 지닌 본성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화폐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관한한 어떤 욕망도 거부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밝혀서도 안 되고 너무 가려서도 안 되는 돈, 당신이 선택한 돈의 본성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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