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카드뉴스로 만든 ‘출판사 제공 책소개’가 눈길을 끌어 책(『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을 살피게 되었다. 삶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답을 도출하는 법을 알려 주는 실용 철학서란다. 부제는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다. 목차만 읽어보아도 그러한 컨셉트에 충실한 책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그리스 3대 철학자의 저작만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04 사람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_수사학]
[38 ‘결국 이런 뜻이죠?’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 : 소크라테스_무지의 지]
[39 이상은 이상일 뿐,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 플라톤_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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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고전 혹은 인문을 적용해도)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본 사람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언뜻 주워들은 한마디에서도 깨침을 얻기도 하거니와 무심코 읽는 동안 기대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좀 더 깊이 있는 질문으로 이어져 관심 분야로 진입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는 말처럼 어려우니까 철학이다, 라는 말로 언제까지나 위안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만, 몇 가지 눈에 띄는 점에 이의제기를 해야겠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고, 그 역도 가능하듯이 책의 발상에 걸맞게 책 소개 또한 형식(방법)의 새로움을 제시하여 귀감이 되었다. 그런데, 일러스트와 함께 실린 우화의 내용은 다듬어질 수 있기에 논외로 하고 ‘이솝 우화’를 언급한 본문과 관련하여 할 얘기가 있다. 본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가 있다.]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았다.
결국 여우는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며 가 버린다."
-<철학은 어떻게..> 50면.[01 타인의 시기심을 관찰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인다 : 프리드리히 니체_르상티망]
이 우화가 현재 어린이들의 교과서에는 어떤 번역으로 실려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지만 제목부터 문제가 있다. 물론 필자도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 「여우와 신 포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이솝 우화 전편(358편)을 총망라하여 (원전) 번역한 책이 몇 해 전에 나왔다. 희랍-라틴 고전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다.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이솝 우화』(숲, 2013.5.)인데, 당시 신문의 신간 안내에서 이 책을 다루면서 화제가 되었다. 「여우와 신 포도」로 알고 있는 우화가 원전을 살피니 그 제목부터 좀 다르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므로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굶주린 여우가 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 덩굴에 포도송이들이 매달린 것을 보고 따려 했으나 딸 수가 없었다.
여우는 그곳을 떠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포도송이들은 아직 덜 익었어."*
-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 전문, 『이솝 우화』 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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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우화에도 처음과 끝이 있고 중간이 있다. 이것을 ‘전체’라고 하며, 처음과 끝과 중간이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다. 어쨌든 첫 인용은 우화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이 짧은 이야기의 요약이 왜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신 포도'가 아니라 '덜 익은' 포도라는 점을 이야기하자.
옮긴이의 설명(주석)를 살핀다. <*'덜 익다'의 그리스어 omphax(복수형 omphakes)는 '시다'는 뜻이 아니라 맛과 관계없이 '덜 익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sour grapes'라는 영어 표현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주석에 따르자면 영어판을 우리말로 옮기는(중역) 과정에서 생긴 오류다. 덜 익은 포도가 대체로 신 맛이 나고,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 쓴 맛일 수 읽고 설익었을 때는 단 맛이 더 지배적일 수도 있다. 신 맛은 덜 익은 포도가 내는 여러 맛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데 단어 하나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리고 그것이 교과서나 동화(그림)로 널리 읽히면서 어느덧 '신 포도'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필자는 결코 사소하게 여길 수 없다. '사소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대단히 복잡한 문제도 차근차근 관련된 사소한 질문부터 풀어가노라면 풀리는 것을 일상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전은 여러 층위의 질문들(해석의 여지가 넓다고 달까) 을 함유하고 있어, 스포일러에도 지장 받지 않으며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그런 저작이다.
사실, 이 책(정본 이솝우화)의 경우도 몇몇을 제외하고 우화마다 주석처럼 '교훈'이 붙어 있는데, 해당 우화 아래 '교훈'을 주석처럼 배치해놓아 우화를 읽고, 이거 뭐지(모든 우화가 그렇게 의도한 바, 친절한 교훈으로 일대일 대응하지는 않거니와) 하다가 '교훈'을 읽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달까, 생각의 폭을 좁히게 되는 '결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가령, 두 번째로 인용한 우화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의 교훈은
"이와 같이 사람도 더러는 자기가 맡은 일을 능력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하면 시운(時運)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다. 어쩌면 이런 교훈은 훗날 편저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어쩌면 교과서에는 없지만 교사용 교재에는 있는 '지침'인데 이것이 해당 우화들과 짝을 이뤄 남게 된(고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책의 내용을 보완하는 각주(脚註: 본문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래쪽에 따로 달아 놓은 풀이)는 가급적이면 해당 면((이나 양면의 각주를 오른쪽 면 아래에)에 있어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좋다. 대체로 주석이 많은 학술논문들에 질린 경험 때문에 주석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면, 난해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후주(後註: 책에서 한 편이나 장 등의 끝이나 책의 맨 끝에 보충하여 주는 말이나 글) 처리를 하는데(이는 출판사의 의도), 꼭 필요한 주석이라면 해당 면에 자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석이 필요 없으면 없을수록 좋겠지만 필요한 주석이라면 그 목적에 맞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교훈'의 경우는 후추 처리하여 책의 끝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한 편의 우화를 읽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을수록 좋은 우화이고, 대부분의 우화들은 실제로 그러하기에, 알고 보면 '교훈'이 곧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해석의 여지를 미리 차단해버리면 왜 책을 읽는지 회의감이 들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질문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구나 나름대로 대답할 있는 질문을 ‘해석적 질문’이라 하는데, 가령, "부자가 된 흥부는 왜 형을 찾아갔을까?"(<흥부와 놀부>라면) 같은 질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양한 견해(의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우와 포도송이」의 경우도 교훈을 배제하고 조금만 더 생각하고, 질문을 찾으면 철학자 니체의 '르상티망'을 경험하지 않겠는가? 우화가 실린 해당 면에 '교훈'을 함께 싣는 것처럼 ‘A는 B다’와 같은 '작위적인' 연결은 위험성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금 논하는 책과 관련하여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해석적 질문을 다룬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 이해하고(외우고)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읽지 않는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개념만 파악하고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이나 사랑에 대한 논의를 심화한 『파이드로스』를 읽지 않게 된다면 그런 삶(사고)은 얼마나 건조할 것이며, 풍부하고 기지 넘치는 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 유명한 비극의 정의('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하면서 '전체'에 대해 설명한다.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는 것.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처음'과 '중간'과 '끝'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하나마나 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아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논의가 심각해질 것이니, 이만 하기로 하고. '50가지 생각 도구'를 섭렵하되, 그 과정을 살피는 독서로 이어지기를, 또한 가능하면(특히, 번역된 텍스라면) 한없이 원전에 가까운 번역을 골라 읽으면 좋을 것이다. 제대로 옮겼다면 결코 어려울 리가 없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죄목 가운데 하나)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리 없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어렵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면 말이다.
“진정한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담론보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는 원래 이야기꾼이 아닌지라 …아이소포스의 우화들을 운문으로 고쳐 썼단 말일세.”(플라톤 「파이돈」 61b)
독배를 마시고 죽던 날,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의 고백한다. 아이소포스와 겨룬다는 건 쉽지 않으며, 그와 겨룰 생각이 전혀 없다(아이소포스는 이솝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이솝의 내공을 당대의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 소크라테스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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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는 독자라면 역시 일본인 저자가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쓴 『독학獨學』(이룸북, 2015)이란 책을 참고하기를. 분량도 많지 않고, 독서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이에게 특별한 정보를 준다. '스스로 공부하려고 해도 어쩐지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용기와 지침을 주고, 독학 요령을 알려주는 데' 책을 쓴 목적이 있단다. 제목 때문에 독학을 위한 노하우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터득한 독학하는 방법의 일부분은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평범하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문이 생긴다. 순수한 의문이 많이 떠오를수록 좋을 것이다.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의문이 지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독학하는 동안 살아있는 지식을 얻게 된다. 사소한 의문 하나를 규명해가다보면 기대한 지식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이어본 것이다. 괜히 꼬투리를 잡아 보라는 달은 못(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탓만 한 것은 아닌지, 숙고하게 된다. <능엄경>(불경)이었던가! 가끔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눈길을 주어야 할 때도 있다. 말이 길어졌다.
* * * * * *
[아래]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중 <시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