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5권에서 두 번째로 그려지는 군중 전투(트로이아가 우세한 상황)에 앞서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자기 부하들을 격려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을 잃지 말라고 역설한다.
"친구들이여! 사나이답게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용기를 내시오.
격렬한 전투에서도 서로 남 앞에서의 체면을 존중하시오.
체면을 존중하는 자들은 죽는 자보다 사는 자가 더 많을 것이나
도망치는 자들에게는 명성도 구원도 없을 것이오.” _『일리아스』5: 529~532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란 말이 떠오른다. 충무공이 자주 사용했다는 이 말의 출처는 『오자병법』(필사즉생 행생즉사 必死卽生 倖生卽死)이다.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절체절명의 전장에서 아가멤논이 강조하는 것은 '체면'이다. 대체 체면이 무엇이기에, ‘덕분에’ 살 수 있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까? 평자들은 이 대목을 희랍 문화가 죄의식의 문화(guilt culture)보다는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에 가깝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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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살 수 있고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수치의 문화(shame culture)
수치심(羞恥心)은 불명예를 안겨줄 성싶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비행(非行)과 관련된 일종의 경멸 또는 무관심이다. 파렴치는 똑같은 비행과 관련된 일종의 경멸 또는 무관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시학』 <수사학> 2권 6장 수치심) 아리스토텔레스는 들고 있던 방패를 내던지거나 싸움터에서 도주하는 경우를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 우리 자신이나 돌보는 사람들의 명예를 실추시킬 성싶은 비행은 무엇이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 또한 수치심은 불명예에 대해 느끼는 '인상'이고 그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그들의 의견이 우리에게 중요한 (그) 사람 앞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인지상정이다. 그런 사람들이란, "우리에게 감탄하는 자들, 우리가 감탄하는 자들, 우리가 감탄 받고 싶은 자들, 우리의 경쟁자들, 그들의 의견을 우리가 존중하는 자들이다."(앞과 같음)
그리고 뒤집어 생각한다. 우리는 별로 믿을 게 못 되는 자들 앞에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아이들이나 동물들 앞에서와 같이). 그런데, 또한 안면이 있는 자들과 안면이 없는 자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좀 다르다. 안면이 있는 자들 앞에서는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안면이 없는 자들 앞에서는 '관습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과 '관습적으로' 수치스러운 것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향연』은 기원전 381년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비극작가 아가톤이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祭)의 비극 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베푼 술잔치(symposion)가 배경이다. 이 자리의 참석자들은 에로스(eros; 사랑)에 관해 발언하는데, 첫 번째로 나선 파이드로스는 신화적인 관점에서 에로스를 찬미한다. 그는 곧바로 에로스가 인간들에게 베푸는 가장 큰 은혜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자기를 사랑해줄 연인을 갖는 것, 그리고 연인은 자기를 사랑해줄 소년을 갖는 것이란다. 나이차가 좀 있는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싹트는 '사랑'이 에로스가 준 최고의 선물이란다. 오늘날 말하는 동성애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이어린 소년(연동)과 성인 남자(연인) 사이의 동성애를 사랑의 최고 경지로 보았다. (『향연』) 옮긴이는 사랑하는 자를 '연인'(戀人: erastes), 사랑받는 소년을 '연동'(戀童; paidika 또는 eromenos)으로 옮기고 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연상의 연인)이 사랑받는 사람(연하의 연동)을 평생 동안 인도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은 '사랑'인데, 이것은 혈연, 공직, 부(富)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원칙으로 수치심과 자긍심을 제시한다. "수치스러운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는“ 이런 감정 없이는 국가도 개인도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행위와 관련하여 그것을 자신의 연동에게 들킬 때가 가장 괴롭지 않겠느냐, 역설적으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한 사람만 꼽으라면 그의 연동(연인)이다. (물론 '수사학'보다는 '향연' 집필시기가 앞서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제로' 수치스러운 것(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것)을 피하고 싶은 거다. 아버지, 친구들,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들킨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었으면 하는데, 그가 연동이며, 연동에게는 연인이다.
'그러므로' 파이드로스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국가든 군대든 잘 다스려지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연인들과 연동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때 그들은 추한 것은 모두 멀리하고 서로 경쟁적으로 명예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싸우게 되면 비록 소수라 해도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연인)은 대열을 이탈하거나 무기를 내팽개치는 것을 연동에게 보이는 것을 가장 싫어할 것이며, 그런 것을 보이느니 몇 번이고 죽기를 택할 것이라고. 이때에 에로스가 불어넣어주는 것은 '용기'인데 사랑의 힘이다.(플라톤의 <향연>, 189e~197a 정리)
파이드로스, 연인들과 연동들로 군대를 구성하자
부왕 필립포스가 뷔잔티온으로 원정을 떠나고 없는 사이에, 알렉산드로스(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 부르는)는 16세밖에 되지 않지만 마케도니아의 섭정 겸 옥새 관리자로 뒤(宮)에 남게 된다. 이 기간에 어느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무찌르고 그들의 도시에 헬라스 식민시를 세우고 '알렉산드로폴리스'라고 개명한다. 2년 후, 18세 무렵에는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에 참가해 헬라스 연합군과 싸웠는데, 그가 맨 먼저 테바이인들의 <신성부대> 대열을 돌파했다고 전한다.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338년)는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 근교에서 벌어진, 필리포스(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테나이-테바이 연합군을 상대로 싸워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다. 마케도니아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주도권을 잡는다. 앞서 아테나이가 델로스동맹의, 스파르테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주도국으로 그리스 패권을 잡았던 것처럼, 이후 마케도니아는 코린토스동맹의 맹주국으로 오랜 동안 그들의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제압했다는 '신성(神聖)부대'가 흥미롭다. 그 당시에도 십자군 같은 것이 있었단 말인가!
18세 알렉산드로스가 무너뜨린 '신성부대'
'신성부대(hieros lochos)는 테바이의 명문가에서 가려 뽑은 300명의 중무장 보병으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다. 이 부대는 150쌍의 동성애자들로 이루어져 유난히 결속력이 강했다. 이 부대는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에서 스파르테군을 격파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으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 기원전 338년 아테나이와 테바이 연합군이 필립포스에게 패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옥쇄했다.'(『플루타르코스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전> 주44)
사료에 따라 조금 보충하면(출처: 위키백과), 신성부대는 기원전 378년에 보이오타르크(사령관)였던 고르기다스가 창설했는데, 그리스에서 최강이란 찬사를 받은 부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테바이는 엘리스와 함께 동성애에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는 것. 테바이가 위치한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 지방에서는 소년애로 알려진 헤라클레스 숭배가 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실된 저작에는 헤라클레스의 조카이며 종자이자 애인이었던 이오라우스의 묘소에 관한 묘사가 있는데, 그곳은 고대 테바이의 남성 동성애자 커플이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는 '신성부대'라는 호칭이 이런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스의 동성애(신화)에서 '신성부대'라는 호칭 유래
플라톤의 『향연』 집필 연대가 기원전 381년이고, 이 대화편이 기원전 416년의 '향연'에서 나눈 이야기인 점을 상기하자. 파이드로스의 제안이 3년 후(기원전 378년) 테바이 군대에 도입된 것일까? 플라톤은 생전에 시켈리아(시칠리아)섬에 있는 시라쿠사이를 세 번 방문했다, 자신의 철인정치론을 현실에 도입해보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만약 ‘향연’의 언급이 신성부대 창설과 인과 관계라면, 플라톤으로서는 뿌듯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사랑의 힘으로 똘똘 뭉친 이들 테바이의 신성부대가 최후를 맞이하는 전투가 그들이 아테나이와 연합한 전투였다. 연동과 연인의 나이차를 감안할 때(이상적인), 150쌍의 그들은 요즘 군대의 '사수와 부사수' 쯤으로 대입할 수 있으리라. 사랑만이 아니라 전술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관계이기도 했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으리라. 하필 이들을 멸망시킨 이가 18세의 알렉산드로스였다는 점도 놀랍다. 굳이 인용문을 찾아 그의 면면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알렉산드로스야말로 출중한 외모에 지혜(인문학도)와 기예를 겸비한, 연인이라면 누구나 탐하는 연동이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쨌든 이 전투에서 테바이 신성부대 300명 중 254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46명은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이들의 숫자가 짝수인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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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81년 『향연』 집필, 기원전 378년 '신성부대' 창설
(내친 김에) 한편, 이들 신성부대가 활약한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는 테바이가 주도한 보이오티아동맹군과 아테나이+스파르테+만티네이아 연합군이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치른 전투다.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군이 좌익을 맡았고, 이들과 맞서는 연합군은 만티네이아 군과 아카디아 군이 스파르테 군(스파르테 왕 아게실라오스 2세)과 함께 우익을 맡았다.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는 보이오티아 군과 스파르테 군이 격전을 벌인다. 그 와중에 에파메이논다스는 몸소 수하들을 이끌고 적들을 공격한다. 적의 총사령관이 최전선에 나가 있음을 간파한 스파르테는 에파메이논다스의 죽음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보고 많은 손해를 보면서도 그를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그는 마침내 적이 던진 창을 가슴에 맞고 쓰러진다.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안티크라테스(스파르타인)라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하고, 파우사니아스(143~176년 활동 그리스 지리학자, 여행가)는 크세노폰의 아들 그륄로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직업군인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기원전 428년경~354년경)의 두 아들이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장남 그륄로스가 전사한 것. 크세노폰의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기원전 354년경으로 추정), 그가 쓴 『그리스 역사』가 다루는 마지막 사건(기원전 35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을 기준으로 가늠한다. 크세노폰이 쓴 『그리스 역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의 막바지(기원전 411년)와 그 이후 4세기 초반의 그리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투퀴디데스가 그의 '역사'(『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쓰기를 멈춘 시점(기원전 411년 가을)에서 기원전 362년 여름까지 49년 동안의 헬라스(그리스) 역사를 크세노폰은 서술했다.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Hellenica』 마지막 Ⅶ권이 '기원전 369년~기원전 362년'인 것.
66세쯤의 크세노폰은 장남이 전사한 만티네이아 전투를 그의 역사에서 다루었을 것인데, 그런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