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 엄비가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이 아니었을까? "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서울 도심 중학동 골목 수문동 바그다드카페에서')의 한 대목이다. 저자는 동십자각 부근 한 카페에 앉아 역사기행을 하고 있다. 조선의 왕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세계 만방에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언이었는가, 불과 한두 해 전에 겪은 일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그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종로통 시전으로 식료품을 사러 가는 나인들의 가마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지금 경복궁 정동(正東) 문(門)인 건춘문을 통과해야 했다. 한 나라 왕이 자신이 주인인 궁궐을 눈속임까지 하며 탈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조선 후기 경복궁 건춘문 밖에서 신식군대(별기군)가 훈련하고 있다. 문 앞 삼청동천 위로 종친부로 건너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개천이 있었는지조차 잊혔지만 고종은 마차에 올라 이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을 탈출하였다(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의 왕비(민자영, 1851~1895)는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하게 시해되었다.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저지른 만행이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일제가 가세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지아비로서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할 틈도 없었다. 고종은 고정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종 자신이 신변의 위험을 느꼈고, 그해 11월 궁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실패하고(춘생문 사건), 기회를 엿보던 차에 이듬해 이른 봄 재차 탈출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배경을 고려하여 인용문을 천천히 읽으면, 그것이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한 각본에 따라 엄비가 가마행렬을 이끌고 같은 시각 궁과 시전을 오가기를 되풀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엄비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비로 책봉된다. 왕비는 승하한 상태이고, 그렇기에 더욱 그 역할이 커진 귀하신 몸이 손수 시장을 보러다녔다는 것을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거사를 준비하는 사전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규모의 전쟁의 원인을 그것을 주도한 세력들의 입장에서 살피곤 한다. 때문에 거대한 양대 세력들 사이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투퀴디데스의 함정'을 소개하는 『예정된 전쟁』에서 조선은 청의 속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정도로 잠시 기술될 뿐이다. 또한 외침보다 더 무서운 전쟁은 한 나라 내부의 세력간 펼쳐지는 권력쟁취를 위한 전쟁이다. 기원전 431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발견한 한 에피소드와 비교해보려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은 왜 일어났는가?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했다.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에게 해의 해양제국을 건설했다. 둘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세력으로,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 군의 잔류 병력(육군)을 퇴각시키기까지 세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년가량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들 두 나라만 치른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제국 가까이 해안가에 위치한 크고 작은 그리스 국가들부터 본토의 군소 국가들이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이 두려워 보다 안전한 방어책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육상 세력 스파르테보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던, 아테나이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델로스(해상)동맹을 이끌면서 특히, 크고 작은 해상국가들의 보호국 역할을 하게 된다. 공짜는 없다. 아테나이의 해군력에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함선이나 병력을 그 댓가로 지불했고, 나중에는 군자금(현금) 형식으로 동맹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해마다 지불했다. 이를 기반으로 아테나이의 해군력은 급속히 신장되었고 동맹국들의 안보(지킴이)만이 아니라 에게 해의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 동맹이지만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해 함선(해군력)들이 필요했던 것, 이것이 황금기의 아테나이('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부른다)를 일군 배경이다.
이처럼 페르시아제국과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기원전 478년)을 발판으로 아테나이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이처럼 200여 개의 도시국가 중 절반이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주요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번영과 과도한 팽창정책을 견제할 목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주도로 결성)의 결속을 강화하게 된다. 이 동맹은 기원전 500년을 기준으로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이었다. 어쨌든 그리스의 양대 진영이 맞붙은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전쟁사'에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사 1권 23장(6)
'공포감'을 '두려움'으로 옮기기도 하고 '질투'(아테네의 번성과 스파르타의 질투가 부른 비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최근 들어 뜨거운 이슈로 등장한 '투퀴디데스의 함정'(혹은 '덫')이란 용어의 출처다. 불과 한 세대만에 경제력에서 군사력에서 주변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에서 중국의 급부상은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세계1위 국가의 지위와 특권을 누리던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두 세력의 긴장과 갈등을 사전에 해소하지 않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세계 3차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제 전 인류의 노심초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들 두 세력이 맞붙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예상되는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강대국들의 세력 대결에서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전장(戰場)이 되었다. 그때그때 그들의 세력 개결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고 안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27년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촉발한 '불꽃' 역할을 했던 사건(쟁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양대 세력의 틈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눈에 보이는' 전쟁의 원인에 좌우되기에 하는 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한국인의 관점은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에 직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코린토스만과 사로니코스만 사이 코린토스지협을 중심으로, 오른편의 메가라, 아테나이 등과 왼편 아래 스파르테의 위치 등을 살펴보면, 메가라가 거대 세력 사이에 낀 국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펼쳐진 그리스와 에게 해 일대의 지도를 살핀다. 육상세력으로 육군이 우위인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가 위치한 아티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야 한다. 해군력이 우위인 아테나이로서는 여차 하면 수많은 함선들을 국토로 삼을 작정으로 스파르테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테나이가 대책없이 스파르테의 육군을 견제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영화 <300>1에서 보았던 유명한 전투, 300인 스파르테 전사들이 페르시아 대군들을 막아낸 고개 테르모뮐라이를 기억할 것이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스파르테의 육군을 1차로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지형이 바로, 코린토스지협이다. 보유한 함선도 변변치 않거니와 육로로 침공해야 하는 스파르테는 코린토스 지협을 거쳐야만 아티케를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인 코린토스가 영토이며, 코린토스지협과 아테네 사이에 있는 도시국가가 메가라인데, 이 나라 또한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이다. 부상하는 아테네에 기존 주도세력인 스파르테가 느낀 '두려움' 때문에 이 전쟁이 발생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테나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설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 한다, 아테나이의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준비한다. 그것이 이 전쟁의 도화선 중 하나인 페리클레스가 공표한 '메가라 법령'이다. 또 하나 두 세력 사이에서 전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라가 코린토스(식민시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코린토스-케르퀴라 전쟁)다.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바다를 낀 국가들이라 해상무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아테네의 해상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살피면,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메가라시와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 항 사이에 그 유명한 살라미스 섬이 있다. 영화 <300>2의 배경이다. 코린토스지협을 경계로 서쪽 바다는 코린토스 만(灣)이고, 동쪽은 사로니코스 만이다. 사로니코스 만을 사이에 두고 아테나이 건너편이 아르고스인데, 이 나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세력이다.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사이의 바다 사로니코스 만이야말로, 에게 해 일대의 해상(해안) 국가들과 아테나이의 무역에서 가장 활성화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432년(이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는)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메가라인들이 아테나이의 사원에서 불경한 언행을 저지르고, 아테네에서 도망친 노예를 숨겨준 데 대한 벌로 메가라에 가한 일종의 경제제재다. 메가라 속한 동맹과는 별도로 메가라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해상무역권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2018년의 기사 하나를 살핀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는 실패했다. 왜 2421년 전 아테네가 메가라에 부여한 무역금수 조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사소한 조치'라고 여겼지만, 메가라는 '적대의 의도'로 읽었다. 압력은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생산했다. 위협이 공포를 부르자, 제재가 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 외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제재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재라는 수단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김연철 칼럼(통일연구원 원장, 한겨레, 2018-09-0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0301.html#csidxda67d0013b76af5ac4652ac09950c7f
투퀴디데스는 27년 전쟁의 불꽃 역할을 한 '눈에 보이는' 두 세력의 갈등을 세 가지로 보고 있다. 1)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소극적이지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를 지원한 점), 2)메가라 법령 공포, 그리고 3)'학살'로 표현되는 아테나이의 멜로스섬 침공이다. 이것들은 두 세력이 30년 평화조약을 깬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불안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데, 특히, 메가라에 대한 경제 제재는 스파르테의 역린을 건드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실제 전쟁 발발을 대비한 아테나이의 포석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라는 점에 유의하자.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하는 것도 식량을 비롯한 생활재 유통을 막는 경제 제재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권을 제약하는 현재에도 유용한 그런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사로 먹고사는 메가라 사람에게 아테네와 인근 항구 출입을 못 하게 했으니 '벌'의 효과는 전쟁만큼이나 쏠쏠하다. 메가라의 동맹국인 스파르타는 아테나이에 법령 철회 요구하지만 아테나이가 거부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파르테의 정치 체제는 정확히 과두정과 왕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가령, 페리클레스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정치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회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자의적으로 내릴 수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쟁과 같은 중대사의 결정에서 스파르테의 왕도 중지를 모아야 하는 설득전을 펼쳐야만 했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는, '전쟁사'에서 전쟁을 결정하기까지 두 세력 내부에서의 갑론을박을 소개한 것에 근거해, 두 지도자(페리클레스와 스파르테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친분이 두처운 관계였다)의 혜안에 따른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진단한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중대사는 양국 정부 내 각 분파들의 대립과 협상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는 얘기다. 페리클레스의 경우 민회의 실력자였지만 정치인 중 한 명이었고, 설득(정치연설) 여부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당시 아테네의 법률시스템은 독재를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살아 있었다. 스파르테의 경우,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동맹국들(각 1표를 가진), 특히 코린토스·메가라 등이 동맹회의에서 결사적으로 개전(開戰)하기를 압박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메가라만이 아니라, 두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그들이 속한 동맹의 맹주국이 전세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정체(스파르테의 과두정과 아테나이의 민주정)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린다. 스파르테는 자신들의 강점(육군력)을 이용해 수시로 아티카에 침공하여 아테나이를 압박하고, 아테나이의 경우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특히, 코린토스지협의 스파르테 동맹국을 침공하여 괴롭힌다. 특히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지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메가라를 수시로 침공한다. 함선을 동원해서 가볍게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아테나이로서는 힘든 전투가 아닌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를 살필 차례다. 전쟁 7년차 아테나이는 스파르테 인근의 퓔로스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를 회복하려는 스파르테와 싸워 승리한다. 스파르테인들은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다고, 스파르테 군사들은 끝내 항복하고 아테나이로 끌려가서 구금된다. 전쟁 8년차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함으로써, 중요한 현안을 해결한다. 바로 이즈음, 메가라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주도권을 잡자, 메가라 내부의 친아테나이파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테나이 군을 불러들이는 것. 잠시 전쟁 8년차 여름의 '전쟁사'를 인용한다.
"같은 해 여름 메가라 시내의 메가라인들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았으니, 전쟁에서는 전군을 동원해 매년 두 번씩 영토를 침범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내전 중에 민중파에게 쫓겨난 뒤 페가이를 거점 삼아 약탈 행위를 일삼는 자신들의 망명파에게도 시달렸다. 그래서 메가라인들은 망명파를 다시 받아들이고 협공으로 도시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을 자기들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6(1)
급기야 민중파 지도자들은 1)민중들의 지지기반이 굳건하지 않고 2) 망명파의 위협이라는 '상수'를 해결할 수 없다, 고 판단,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아테나이 장군들과 접촉하여 아테나이군이 그들의 성을 제압하도록 협조한다. 메가라인들은 민주정(민중파, 친아테나이)과 과두정(친 스파르테)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여기에 두 세력의 원군이 파견되어, 두 세력은 그들의 교두보를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쟁사'를 참조하시고) 이 내란 초기의 에피소드 하나를 인용한다.
"(3)날이 새려 했을 때, 이 메가라인 반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두기 위해 얼마 전부터 밤에 수비대장의 허가를 받고 약탈하러 간다는 핑계로 조정 경기용 보트 한 척을 사륜거에 싣고 해자를 건너 바닷가로 나가 출항했다가, 날이 새기 전에 보트를 사륜거에 싣고 성문을 지나 성벽 안으로 들여오곤 했는데, 새벽에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을 테니 미노아 섬을 봉쇄한 아테나이인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라고 했다. (4)그래서 이번에도 사륜거는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고, 성문은 여느 때처럼 보트가 들어가도록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아테나이인들이 각본대로 매복처에서 뛰쳐나와 문이 도로 닫히기 전 사륜거가 문틈에 끼여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방해하는 사이 문에 도달하려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동시에 메가라인 반역자들이 문간에서 보초들을 죽이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7(3~4)
'메가라인 반역자'란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려는 민중파 일부(친아테나이파)를 말한다. 정황상 민중파가 득세한 상황이라도 나라를 넘길 정도(민중파 대부분이 친아테나이파는 아니라는)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메가라인들로서는 당파를 떠나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투는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나고 메가라의 과두정은 오래 지속된다. 이제 타임머신에 올라, 1896년 2월 11일 우리나라, 일명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그날로 가보자.
아관파천은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왼편에서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옛 러시아공사관에 이른다. 이곳까지 당시 조선의 왕이 궁궐(경복궁)을 장악한 칭일파의 위협에서 피란한 사건이다. 고종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을 통해 궁을 벗어났다. 그곳이 어디든 왕이 머무는 곳(행재소)이 수도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러시아공사관은 요즘의 청와대 대톨령 집무실이 된 셈이다.『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김란기 지음, 발언미디어, 2017년 12월)에서 필자는 고종을 태운 가마의 이동경로를 추적한다. 고종은 왜 떠나야만 했으며(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의 살해, 일명 '을미사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얘기를 읽는 동안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아관파천 두 달 전에도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일명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친미파-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 서울 사진으로 추정. 1926년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궁궐 벽을 끼고 서 있는 건물이 건춘문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쯤이 종로통일 것이다.
춘생문은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는 문(門)이다. 건춘문은 경복궁의 정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지금 동십자각에서 북쪽으로, 북촌한옥마을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있는 경복궁의 동쪽 정문이다. 그런데, 이 건춘문은 궁궐의 나인들이 군주의 식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을 보러 오가던(최단거리), 곧 종로 시전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아관파천 때에 고종이 건춘문을 통과했다는 기록은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고종이 건춘문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아관파천 때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종과 세자를 태운 가마는 건춘문을 나온 후 어떤 경로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했을까?" -앞의 책
그런데,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은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로 보인다. 필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D-day를 정한 이후에 엄비가 몸소 종로의 시전으로 쇼핑을 핑계로 오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데, 필자는 거기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가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앞의 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엄비가 손수 장을 보러 종로의 시전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했고, 고종을 모신 가마가 그런 일상적인 행차로 가장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친일파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메가라시의 관문과 경복궁의 건춘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 벌인 두 사건을 비교하자니, 마음이 씁쓸하다. 이 간단한 비교를 하려고 얘기가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