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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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과 더불어 ‘교만(Hybris: 히브리스)’은 『일리아스』를 읽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이 서사시에서 가장 먼저 이 교만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킬레우스다. 반면에 '미망(ate)'을 처음 그리고 자주 거론하는 이는 아가멤논이다. 이런 미망과 교만이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데에서만 등장하는 것일까? 현대 서구인들(특히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데서도 그 DNA가 살아있음을 엿본다."(이 글에 피력한 필자의 의견에 대한 요지입니다.)

 

『일리아스』 19권 핵심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화해 장면이다. 그리고 19권을 대표하는 핵심어 하나만을 고르라면 ‘미망’이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체면치레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망은 『일리아스』 의 제1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임을 고려하면, 이 서사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가급적 관련 언급(텍스트)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9권.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복수하고자 다짐하고, 복수를 하자면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다.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 때문에 전투불참을 선언한 그로서는, 그런 선언을 뒤집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가멤논과 화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군 지휘관들과 전사들이 회의장으로 모여든다. 마지막으로 아가멤논이 참석한다. 먼저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향해, 자신들이 여자 하나 때문에 불화한 것을 개탄한다. 이제 상황이 안 좋으니 감정을 억제하자고 제안한다. 분노를 거두겠다. 화해를 거부하고 계속 화를 낸 것은 옳지 않았다고, 그리스 군을 일으켜 전투에 나서자고 권한다. 자기도 싸우겠다고. 그리스 전사들은 아킬레우스가 분노를 거둔 것을 기뻐하지만, 아가멤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말을 한다[그러자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들 가운데로 걸어 나오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19권: 16~77행] 아킬레우스에게 직접 대답하는 것도 아니고, 회의장에 대중을 향해 말한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나오지 않은 것이 내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들의 책임이라고.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이렇다.

 

"하지만 그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고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과
어둠 속을 헤매는 복수의 여신에게 있소이다. 아킬레우스에게서
내가 손수 명예의 선물을 빼앗던 그날 바로 그분들이
회의장에서 내 마음속에 사나운 광기를 보내셨기 때문이오.
신이 모든 일을 이루어놓으셨는데 난들 어쩌겠소?
미망(迷妄)은 제우스의 맏딸로 모든 이의 마음을[91]
눈멀게 하는 잔혹한 여신이오. 그녀는 발이 가벼워 결코
땅을 밟는 일이 없지요. 그녀는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니며 
사람들을 넘어뜨리는데 둘 중 하나 꼴로
걸려들게 마련이지요."(19권: 86~95)

 

아가멤논은 그 책임을 제우스와 운명의 여신(모이라) 그리고 복수의 여신(에리뉘스)에게 돌린다.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여자를 빼앗은 것은 이 신들이 자기에게 ‘아테’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 아테는 보통 미망(迷妄)으로 옮기는데, ‘정신적으로 눈 먼 상태’를,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피해, 손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아래 ‘강대진의 책’) 
그런데 『일리아스』에서 ‘미망’이란 단어는 2권(아가멤논의 꿈_함선목록) 아가멤논의 발언에 처음 등장한다(이 글의 맨 뒷부분 인용, ‘교만’이란 말을 처음 언급하는 이가 아킬레우스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출전(出戰)에 앞서 관례에 따라 말로 전사들(아레스의 시종들)을 시험하는, 전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슬쩍 떠보는 대목에서다. 

 

"친애하는 다나오스 백성들의 영웅들이여, 아레스의 시종들이여!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나를 큰 미망에 빠뜨리셨소이다."(2권: 110~111행)

 

이 경우 아가멤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제우스가 보낸 거짓 꿈에 속아 (아킬레우스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출전 준비를 하는 것. 9권에서도 아가멤논은 미망을 언급한다. 전세가 트로이아 군에 밀려 위급한 상황이기에, 여기에서의 ‘미망’은 앞(2권)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의 '신 탓'은 습관적이며 상습적임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이여, 아르고스인들의 지휘자들 및 보호자들이여!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나를 큰 미망에 빠뜨리셨소이다."(9권: 17~18행)

 

역시 9권에서 이번에는 네스토르(제안)에 대답하여 ‘미망’을 언급한다. 네스토르는 아가멤논의 과오를 지적하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우정의 선물과 상냥한 말로 달래고 설득하자는 제안을 하는 것, “나는 그러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렸건만 그대는 자신의 거만한 마음에 복종하여(9권: 108~109)”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 많은 원로라고는 하지만 네스토르의 지적은 날카롭다. 이런 네스토르의 말에 아가멤논이 대답한다.

 

"노인장! 그대는 내 미망을 거짓 없이 사실대로 지적해주었소. [115]
내가 어리석었음을 부인하지 않겠소. 제우스께서는 지금
그 사람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아카이오이족 백성들을 무찌르시거늘
그분이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야말로 실로 만군(萬軍)의 가치가
있소이다. 내가 사악한 마음에 복종하여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니,
이를 바로잡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상금을 기꺼이 바치겠소."(9권: 115~120행)

 

흥미로운 것은 『일리아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미망’(이란 개념)은 9권과 19권에서 보듯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 그 중에서도 아가멤논의 ‘과실’과 연관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일리아스』의 제1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점, 그 분노를 유발한 이가 아가멤논이며, 분노는 한 여인(브리세이스)을 빼앗은 데서 촉발되었음을 생각하자. 물론 아가멤논이 자신의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아니다. "희랍인들은 늘 인간의 결정이 두 가지 수준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의 영향이기도 하고, 자신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강대진,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452면) 9권에서 약속한 바 있는 보상금을 언급하는 아래 인용에서 그러함을 읽을 수 있다.

 

"먼저 내 마음을 눈멀게 한 미망의 여신을 잊을 수가 없었소. [136]
하나 내가 이렇게 마음이 눈멀고 제우스께서 내 지혜를
빼앗으셨으니 나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보상금을 내놓겠소." (19권: 136~138행)

 

아킬레우스에게 주기로 약속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인정이다. 자신의 ‘지혜를 빼앗은’ 제우스에게도 잘못이 있단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고 흔쾌히 인정하면 될 것은 결코 그러는 법이 없다. 물론 이 전쟁 전체를 지휘하는 총감독은 제우스이고, 앞서 2권에서 살폈듯이 제우스는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지만 아가멤논은 인간들의 왕(왕중의 왕)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 한다. 아킬레우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9권에서도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화해를 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오뒷세우스)의 말을 들으며, 아가멤논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그 맥락에서 읽어낸다. 그럼에도 19권에서 아킬레우스는 대중들이 모두 듣는 자리에서 ‘미망’을 언급하며, 제우스가 준 ‘시련’ 때문에 아가멤논이 자신을 분노하게 했음을 '보란듯이'  언급한다.
 
"아버지 제우스여! 그대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미망을 주시나이다. [270]
그렇지 않았던들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내 가슴속 마음을
격분시키지 않았을 것이며, 내 뜻을 거슬러 고집스레
소녀를 데려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는 결국 제우스께서
많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죽음이 닥치기를 원하셨던 탓이오.
자, 우리가 어우러져 싸울 수 있도록 그대들은 가서 식사하시오!" (19권: 270~275)

 

아가멤논 스스로가 미망을 언급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소녀(브리세이스)를 데려간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킬레우스가 전적으로 아가멤논을 용서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소녀 때문에 많은 그리스 전사들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왕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두에(1권) 호메로스가 그리는 트로이아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피고 있다. 아가멤논이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여러 참가자(국) 중에서도 ‘실세’였음을 언급한다.

 

"아가멤논은 이 왕국을 물려받은 데다 누구보다도 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트로이아 원정군 모병에는 충성심보다는 위압감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 호메로스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 아가멤논은 누구보다도 많은 함선을 이끌고 갔고, …(중략)… 내륙에 살던 그에게 상당 규모의 함대가 없었다면, 바닷가에서 가까운 소수의 섬들 말고 다른 섬들까지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9(3), (투퀴디데스/천병희/숲) 

 

‘호메로스의 중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을 전제하고 하는 기술이지만, 그가 당시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기에 아가멤논은 이런 대군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슬려 오르면 아가멤논은 펠롭스의 자손이며, 펠로폰네소스(반도)라는 지명은 ‘펠롭스의 섬’이란 뜻임을 상기한다. 19권 맨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 아가멤논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마저도 한때 미망(아테)에 눈이 먼 적이 있었다(신화)고, 하물며 인간은 나는 오죽하겠는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진심으로 아가멤논을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23권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경기를 마무리할 무렵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19권)은 절친이자 시종인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에 나서야 하며, 전투는 혼자서만 치를 수 없는 것, 결국 아가멤논이 나서야만 하기에, 내심이야 어쨌든 화해하는 모양새를 갖추는데, ‘미망(ate: 아테)’이란 개념은 절묘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미망’과 더불어 ‘교만(Hybris: 히브리스)’은 『일리아스』를 읽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이 서사시에서 가장 먼저 이 교만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킬레우스다. 분노가 치밀어 아가멤논을 죽이려하자 이를 제지하는 아테네 여신에게 하는 말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기스를 가지신 제우스의 따님이여!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교만을 구경하기 위함입니까? [202]
내가 지금 그대에게 하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즉,
이제 곧 그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일리아스』: 1권 201~205행. 

 

그런데, 이런 미망과 교만이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데에서만 등장하는 것일까? 현대 서구인들(특히 미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시원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데서도 그 DNA가 살아있음을 엿본다. 과연 자리를 박차고 떠난 그 회담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의견과 해설이 분분하지만, 제2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와 그 참모진들이 보인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봄이 오나 했더니, 한반도의 평화의 봄은 아직 멀리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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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좌-신Gods, 영웅Heroes, 신화Myth의 머리글자를 따서 GHM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콜먼의 태도가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설득력이 컸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스테인』(1,2권)의 주인공 실크 콜먼는 고전학자이다. 콜먼은 매사추세스 서부 버크셔에 있는 가상의 대학인 아테나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강의실로 복귀한 콜먼은 출석을 부르다 수업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학생들(나중에 흑인으로 밝혀진다)을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spooks로 지칭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 문제를 해명하고자 맞서다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자 않고 사직해버린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내 아이리스까지 급사한다.

 

이런 거짓된 비난의 전말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겠다며 주커먼을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커먼은 이 소설의 사회자 격인 일인칭 화자다. 주커먼은 이 작품 말고도 그의 『미국의 목가』(1997)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도 화자로 등장하는데, 때문에 이 세 작품은 일종의 삼부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네이선 주커먼은 필립 로스의 분신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또 하나, 그는 ‘결연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인 요소를 섞어 넣기를 즐긴 작가이다. 이 점에서 그의 프로필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시카고대학과의 인연이다. 그는 이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잠시 이 대학의 강사 생활을 했다. 시카고대학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고전 읽기를 교양교육의 기본으로 시스템에 편입시킨 특별한 대학이다. 시카고대학을 변화시킨 ‘위대한 고전 읽기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뤄볼 예정인데, 어쨌든 1929년 시카고대학의 5대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당시 30세)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 85년 동안 8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2014년 기준) 대학교의 초석을 놓은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소설  『휴먼스테인』에 설립한 가상의 아테나대학은 그의 프로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콜먼이라는 인물, 그리고 고전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수업 장면을 녹취하듯 펼쳐놓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살피는 데서 찾아보자.

 

“여러분은 유럽 문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콜먼은 강의 첫 시간에 출석을 부르고 나서 이렇게 묻곤 했다. “바로 불화에서입니다. 유럽 문학 전체가 싸움에서 기원했죠.” 그리고는 준비해온 『일리아스』를 집어들고 처음 몇 줄을 읽어나갔다. “‘시의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저주를 부르는 분노를 노래하라……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위대한 용사 아킬레우스가 맨 처음 불화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난폭하고도 힘센 두 인물은 무엇을 놓고 불화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술집에서 사내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 여자를 놓고 다투는 것이니까요. 처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그녀의 아버지한테서 강탈해온 처녀, 전쟁 와중에 유괴된 처녀지요. ‘마아 코우리Mia kouri'. 이게 이 서사시에서 그 처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미아‘라는 낱말은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가튼 의미를 지니는데 영어의 부정관사 ’a‘에 해당합니다. ’코우리‘ 곧 ’처녀‘라는 낱말은 서서히 변화해 현대 그리스어에서 딸이라는 뜻인 ’코리kori'가 되었습니다. 자, 아가멤논은 이 처녀를 본처 클리타임네스트라보다 더 좋아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 처녀를 따라올 수 없다.’ 아가멤논이 말합니다. ‘이목구비나 몸매 어느 쪽을 봐도.’ 이만하면 왜 아가멤논이 이 처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나요? 이 처녀의 유괴를 둘러싼 정황에 분노해 흉포해진 아폴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만 아가멤논은 거부합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밖에요. 쉽게 격분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는 어느 작가라고 기꺼이 그려보고 싶어 할 법한, 그야말로 폭약 같이 쉽게 격발되는 거친 인물입니다. 특히 자신의 위신이나 욕구와 관련된 경우, 전쟁사에서 가장 과민한 살인기계로 변하는 인물이죠. 모두에게 칭송받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에 가해진 모욕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됩니다.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모욕, 처녀를 빼앗긴 모욕에 대한 분노의 위력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한때는 그가 영광스러운 보호자였고,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집단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다툼은 그러니까 젊은 처녀, 그리고 처녀의 싱싱한 몸과 성적 강탈에서 얻을 쾌락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좋든 나쁘든 정력가인 용사 군주가 수컷으로서의 권리와 위엄을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것에서 위대한 상상력이 넘쳐흐르는 유럽 문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불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는 것이며……”(이 책 1권 16~17면)

 

 

우리의 단군신화의 주제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임을 떠올리면 참 다르지요. 그들이 그들의 문학의 기원을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가보다 하면 될 것을, 긴 인용까지 해가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크 콜먼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강의 스타일을 엿보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우리말 원전번역  『일리아스』(천병희)을 읽으면, 콜먼이 언급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배경은 좀 차이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라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조건부가 아니었다. 아가멤논의 속마음이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브뤼세이스를 취하였다.’이지 조건부는 아닌 것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의)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인용은 실크 콜먼의 강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한 ‘녹취록’ 수준의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크 콜먼이 직면한, 출석을 부르다가 우연히 던진 한마디가 그의 ‘아름다운 노년’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곧 명예의 실추와 그에 따른 분노는, 그 스스로가 아킬레우스적임을 이 작품은 초반에서 일종의 배경으로 까는 것이다. 그가 평온을 되찾는 한 여자와의 만남(71세인 그가 만난 34살의 여인, 포니아 팔리), 그 만남은 한 여자가 중간에 낀 ‘삼각 관계’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일리아스』를 어떻게 해석하건, 『일리아스』는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그리고 필립 로스의 자전전인 기록과 무관하지 않게, 이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급반전’까지는 아니라도, 실크 콜먼의 인생이 간직한 아이러니는 작품 후반에 드러나는데, 그리스 비극으로 치면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면모를 또한 그는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한 고전 몇 편을 읽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써본 글이다. 사실 『일리아스』의 표면 주제인 트로이아 전쟁 원인 중 주요한 하나는, 헬레네를 되찾아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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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아이테토스 - 지식에 관하여 푸른시원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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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대화만이 아니라,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상대방의 질문이나 의견에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맞아요!"다. '네.'라고 하거나, "그래요"나 "네, 그렇습니다."하면 될 것을 습관적으로 "맞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려니 하지만 좀 생각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맞아요'는, 상대방에 의견(주장)에 동참하는 나의 '의견(판단"을 포함한다. 'A는 B이다.'는 상대방의 진술이 참이라면 '맞아요.'는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A는 B이다.'가 아닌 경우에도 습관적으로, '예우'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맞아요'라고. SNS나 각종 기사 등 콘텐츠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좋아요'는 그나마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맞아요'는 '좋아요'와 사뭇 다르다. 발언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 포함하고 있음에도 그런 줄 모르고 말하는 것이다.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에 '맞아요!'라고 대응하는 사람이 싫지 않다. 또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맞아요'는 나는 당신의 '하나뿐인 내 편'임을 인증하는 일이기도 한다. '맞아요!'에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나는 그렇게 진술하는 당신을 항상 '믿어요'라는 진단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당신을 항상 믿는다. 때문에, 이번 진술도 '맞을 것'이라는 '신뢰' 또는 동지적인 '믿음'의 반영이며, 'A가 실제로 B가 아닌' 경우에도 '그렇군요.'하고는 나름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맹목적으로 그런 줄도 모르고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의 틀린 진술을 교정할 기회 자체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과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의 차이는 크다.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 사유의 발생학이랄까,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함으로써,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꼬치꼬치 그리고 천천히 복기(바둑에서)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서구 철학을 이끈 사람은 플라톤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자가 '신들'에서 '인간들'로 이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널리 알리는데 힘을 쏟은 철학자, 그가 플라톤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직접 펼치지 않는다. 일련의 대화편들을 통해 문제를 툭 던지는 것이다. 연못에 던진 돌이 동심원을 일르키게 하듯이다. '대화편들'은 나라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은 순간에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유력한 정치가가 하는 정치연설처럼 하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여느 비극과 다르지 않는 하나의 '문학 작품'일 뿐이다.

공연을 통해 당대의 시민들이 처한 상황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행위(여론몰이)를 한 장르는 희극(아리스토파네스로 대표되는)이었다. 반면, 비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인간됨의 정체성을 캐묻는 데 집중했다. 오늘날 철학 영역에서 플라톤이 '대화편'작품)을 통해서 하고자 한 일을 비극 작가 중에서는 소포클레스가 했다. 그가 작시술을 배웠던 선배 아이스퀼로스가 전적으로 신의 영역에서 신들의 세계에 의지했다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입각하여 세계를 보려 했고, 그런 작품 세계를 펼쳐 놓았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비록 7편뿐이지만, 소포클레스가 완성한 비극의 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수석 대변인'  역할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의 의미는 입증되고 있다.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학문의 시원(始原: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비롯되는 처음)이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비해, 3대 비극시인 가운데, 제3시인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나 '비극의 완성자'(소포클레스)처럼 딱 떨어지는 규정(닉네임)이 힘든 점이 있다. 서양철학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자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 시대정신을 자신이 익숙한 장르에 담아낸다는 것, 이렇게 볼 때 플라톤과 소포클레스가 한 일은 장르가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 저마다의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플라톤의 '작품'은 정치연설이 아닌 것이다. 

5.18광주항쟁의 의미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여 하는 말이지만.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몇몇 시인들이 참여하여 동인을 형성했다. <5월시>다. 일종의 협동조합을 결성한 이들의 목표는 1980년 5.18의 진실을 시를 통해서 온 나라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시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그런 '서정시인'들도 상당수 속해 있었다. '맞아요!'라고 동의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작품'은 대상화되는 것이라서 작품의 생산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한 움직임, 그런 '한계'를 안고서 나름의 움직임을, 노고를 집중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인들이 시로 나섰다. <시학>에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시를 쓴다 해도 그는 시인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기능성의 법칙에 맞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 점에서 그는 이들 사건의 창작자[역사상 많은 사건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옮긴이 주석]이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창작자에 의해 그 사건이 재구성됨으로써(전후 관계의 인과 관계를) 비로소 '보인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플롯'이 좋은 작품의 필수요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한다. 가령, <그것이 알고 싶다>(sbs)는 그런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문필가 플라톤의 작품 <테아이테토스> 이야기를 하자. <테아이테토스> 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지금 멜레토스가 제출한 고발장에 답변하기 위해 왕의 주랑으로 가야 하네. 하지만 테오도로스 님, 우리 내일 아침 이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멜레토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1) '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2)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아테나이인 중 1인다. 왕의 주랑이란 아테나이 아고라에 있던 주랑.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하는데, 대화편 <소피스트>의 대화가 바로 다음 날 진행된다. 기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소크라테스가 잠시 법정에 간 날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소피스트>이후에 <정치가>의 대화가 이어진다. <변론>을 해야 하는 본 무대(법정)에 나서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무려 세 편의 대화마당을 가진 것이다. 

-<정치가/소피스트>[플라톤(지은이), 천병희(옮긴이)|도서출판 숲 | 2014년 7월]의 대화 시점은 '소피스트'가 먼저이고 '정치가'가 다음이다. 이들 대화편 이전에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지의 지"를 역설한 <테아이테토스> 대화가 이뤄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있고, 대화순으로 보면 <크리톤>과 <파이돈>이 이어진다. 플라톤은 참 뒤끝이 '상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변론'을 중심에 놓고, 평생에 걸쳐 스승을 변호하고 있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받아들리자면 그렇다. 좀 그렇지 않은가!

-<정치가>는 소송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앞서 아테네법정에 출두한 다음날, 나눈 대화이며 이날에 앞서 나눈 대화들이 <소피스트>에 수록되어 있다. 그 하루 전에 나눈 대화가 <테아이테토스>(지식에 관하여)로, 소크라테스가 인생을 마감하게 결정적인 재판을 코앞에 두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런 대화를 나눴단다. 그런 대화편 3부작이다.

-(숲의)<정치가/소피스트>의 수록 순과는 달리 사실은 <소피스트>가 <정치가>보다 먼저 진행된 대화다.  특히 앞부분, 소피스트란 어떤 존재인가 찾아가는 짧은 문답들이 흥미롭다. 두 대화편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의 고유한 영역을 찾는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를 찾아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유사품' 소피스트(<소피스테스>)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으며, 사이비 정치가와 거리를 두고자(<정치가>) 한다.

-<정치가>에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전 대화편의 소크라테스 자리(역할)에는 낯선 '방문객'이 앉아 있다. 말하자면 외부초빙강사인데,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요즘말로 'X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대화편에 스승을 등장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던 플라톤이 집필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를수록 자기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 과도기에 방문객(X맨)이 주대담자이자 이론을 주창하는 이로 나서는 것이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는 '변론'을 보완하는 대화편으로 '무지의 지'의 근거를 제시한다. 초점은 '변론'에 맞춰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실제 그렇게 발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으로 만드는, 설정 그것이 <테아이테토스>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처음에 그랬듯이, 대답하기를 망설이기보다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말해야 하네.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찾게 되든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둘 중 한 가지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일세. 사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 보담이라고 할 수 있지."(187c)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자네가 앞으로 다른 생각들을 임신하려다가 임신에 성공하면 지금의 이 탐구 덕분에 더 훌륭한 생각들을 임신하게 될 걸세. 설령 임신하지 못하더라도 자네는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덜 부담스럽고 더 유순한 사람이 될 걸세.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210c)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든가', '자네는 지혜롭게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변론'을 보완하는 결정적인 말씀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변론'에 앞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그렇군요."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 모르는 것이 무엇이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지의 지. <테아이테토스>는 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변론>의 부록이다. '그래요'보다는 '맞아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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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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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읽었어요. ‘이솝 우화’를 읽고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십대가 될 때까지도 쭉 이어져 영화 쪽으로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지요."
『이야기의 힘-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황금물고기, 2011년 9월)에 실린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 '로버트 맥기'와의 특별 인터뷰(스토리텔링 공식)의 일부다. 실제로 EBS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녹취록이다. 어떻게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특히 어떻게 스토리닥터로 활동하게 되었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의 초반부다. 그의 대표작으로 시나리오 작법의 교과서인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전2권)의 책 소개는, 난데없는 퀴즈로 시작된다. "<반지의 제왕>, <디어 헌터>, <X파일>, <슈렉>, <프렌즈>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정답은 이들 작품을 쓴 사람들 모두가 '로버트 맥기'의 제자라는 것. 그는 아홉 살 때 처음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고, 극단원으로 10대 시절을 보냈다. 프로필이 예사롭지 않다. '이야기 의사'라는 그의 직함을 살피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관객 반응을 직접 확인하는) '현장'을 경험했기에 살아 있는 이야기의 힘을 실감했으리라, 여기게 된다. 

 

10대 시절을 극단원으로 보낸 '이야기 의사', 로버트 맥기

그런데, 작가로서 명성을 쌓은 이들이 인터뷰에서 으레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할 때,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처럼,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읽은 『이솝 우화』를 꺼낸다.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의 이야기(STORY)의 최소 단위를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이솝 우화』이고,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에도 또 하나의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대화, 번역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한 편 한 편의 우화를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버지에게 질문하였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을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 받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이런 변화를 객관적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생산)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들이 던진 질문은 '해석적 질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기다린 질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텍스트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질문, 그 질문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다. 그런  질문이, '해석적 질문'이며, 이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독서토론이나 독서지도(‘지도’라는 말이 좀 그렇지만)의 방법을 다루는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지만, 가령, 자녀와 함께 같은 책을 읽는 부모들을 위한(해석적 질문을 유도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깊이 있는 그리고 친절한 안내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핵심 포인트는『이솝 우화』를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

어쨌든, 『이솝 우화』>는 가장 짧은 시간에 읽고(미리 읽어올 필요도 없다), 해석적 질문을 할 수 있는 그런 텍스트다. 그 질문에 참가자들이 나름대로 의견이 발표하고, 그것이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다른 의견을 낳는 등 각종 독서토론의 '오프닝'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필자 또한 실제로 실행해보고서 하는 말이다). ‘청소년과 성인들을 위한 정본’ 『이솝 우화』(천병희 옮김, 숲)에는 현존하는 이솝 우화 전편(258편)이 (그리스어→우리말) 원전번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편을 이솝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라, 논란이 이어진다. 그러나 수록된 우화들이 가진 일관성은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또한 (앞서 강조한 해석적 질문 활용과 관련) 몇 편을 제외하고 우화마다 덧붙여진 '교훈'이 걸림돌이 된다. 가령, 아래 인용한 <살인자>의 경우 교훈은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죄지은 사람에게는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교훈'은 헬레니즘 시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더러 추상적이고 고지식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우화의 요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많다. 필요한 경우에 참조하되 굳이 '교훈'에 얽매이지 않고 읽기를 바란다."
옮긴이 서문‘(재미와 교훈을 갖춘 명작’)에서 번역가는 '교훈'을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한다. 아마도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맨 위에서 고딕체 등으로 강조하여 언급해야 할 사항이지 않을까?

 

교훈을 어떻게?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

다시 로버트 맥기의 인터뷰다. 이야기의 힘, 그 생명력은 '플롯, 플롯,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갈등 구조'에 대해 묻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시학』을 말하고 있는 것. "극장이든 책이든 이야기 작업의 규모와 크기에 따른 필수적인 반전의 개수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출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고 우리말로 옮기는데, 특히 비극과 관련하여 플롯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들을 요약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이든'이라고 할 때 비극경연(연극이란 공연예술)의 ‘대본’으로서의 비극을, '책이든'이라고 할 때는 읽는 것(곧 책으로)만으로도 ‘비극(작품)’이 소비됨을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 이 점을 짚고 있거니와 오늘날에도 비극은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고 있다.
그리고 로버트 맥기는 '한마디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며 이야기의 핵심을 강조한다. 이야기의 1번 법칙을 지켜야 하는데, '반전'이며, 이야기가 필요로 하는 반전의 개수(個數)가 있다는 것. "극장이나 공연, TV, 영화에서 2시간 정도(120분) 분량이면 최소 3회의 역전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서 역전이란 ‘반전’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작품의 플롯에는 (반전은 기본이고) 반드시 '급반전'이 있음을 역설한다. 로버트 맥기가 말하는 ‘역전’은 (보통 '막'이라고 부르는데) 인물의 인생에서 중차대한 변화를 말하는데, "최소 3회, 많게는 4회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는 비극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누구일까, 훌륭한 이야기를 창작(생산)하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다. 가령,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데 대학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말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를 알아야 한다. 때문에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거치는 것이 유리하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하니까. 다만, 국어국문학과라고 할 때, '국어학'과 '국문학'이란 두 갈래의 학문이 결합된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는 것 같다. 국어학은 언어학의 영역으로 (지금은 다른 대학에도 개설되어 있겠지만), 서울대의 경우 ‘언어학과’로 (국어국문학과와) 독립되어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기 때문에 ‘언어학과’는 ‘국어학’을 위주로 다루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 자체가 본위의 연구대상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한국 문학은 한국어를 재료로 한다는 것 말고는(거칠게 말하자면), 두 분야는 연관성은 깊지만 한데 묶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창작을 위해서, '국어국문학과'에 가는 것이 나은가, '문예창작학과'를 가는 것이 나은가도 해묵은 고민이다. '문예창작학과'를 얼른 떠올릴 것이나,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정답'은 아니다. '문예창작'이 글을 쓰는 기술(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작시술作詩術‘)을 우선하여 가르치고 배운다는 데서 그러한데, 가령, 시(詩)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원스럽게 답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대답이 『시학』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품이 좋은(훌륭한) 작품인가(what)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how) 하면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구분하지 않고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창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시학』만큼 좋은 가이드북이 없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how) 무엇(what)이 좋은 작품인지 알아야.. 

자주 인용하거니와, 『시학』을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 개념 하나가 바로 '전체'이다. 작품에서 이 '전체'란 방대한 서사시 『일리아스』 한 권일 수 있고, 『이솝 우화』의 수록된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아직도 '여우와 신 포도'로 옮기는 번역이 존재한다), 세 문장으로 이뤄진 우화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전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 참으로 간명한 정의다. 그런데, 중언부언처럼, 이 '처음'과 '중간'과 '끝'을 설명한다. 처음과 끝을 먼저 정의하고, 끝으로 '중간'을 정의하는 데 주목하자.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쟈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_『수사학/시학』 중 '시학' 제7장(''는 필자)

 

이야기가 하나로서 생명을 부여받으려면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야기의 최소(기본) 조건이다. '처음'과 '중간', '중간'과 '끝' 사이에 끼어드는 이야기 단위가 에피소드다. 그런데 어떤 에피소드도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의 최소 단위를 『이솝 우화』는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기본을 살피는 데 필독서가 된다. 언제든 어디서든 사전 준비(텍스트 읽기) 없이도 즉석에서 독서토론을 나눌 수 있는 텍스트인 것이다. 다음 우화는 단 두 문장으로 이뤄졌지만,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새끼를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한다고 여우가 암사자를 헐뜯자 암사자가 말했다.“한 마리이지만 사자야.”"
-『이솝 우화』, <194.암사자와 여우>

 

로버트 맥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서 강조한 역전(반전)을 포함하고 있는 우화도 적지 않다. 이 짧은 우화에 '있어야 할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인 뒤 피살자의 친척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살인자가 나일 강가에 이르렀을 때 늑대가 다가오자 겁이 난 그는 강가의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큰 뱀이 자기를 향해 기어오는 것을 보고 살인자는 강물로 뛰어내렸고, 그러자 강물 속에 있던 악어가 그를 먹어치웠다."
-『이솝 우화』, <045.살인자>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솝 우화』,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이야기의 최소 단위

늑대와 큰 뱀과 악어.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피할 곳이 없다(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 하늘과 땅과 물(바다와 강), '어디에도' 마땅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제우스가, 땅(지하)은 하데스가, 바다는 포세이돈이 분할 통치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온 지구, 온 우주라고 해야 할까?
새 학년 새 학기다. 특히, 신입생 가운데 어떤 장르이건 글쓰기를 직업으로 희망하는 이들이라면, 이 글에서 소개한 몇몇 책들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기를. 특히,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저서 『수사학』과 한 권으로 묶여 있는데, 번역가 천병희가 ‘시학’을 처음 번역한 해가 1975년이다. '시학'을 개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읽든, '시학'을 원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부록으로 읽든 『수사학/시학』(천병희, 숲, 2017)은 문학을 창작하거나 연구하려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주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이며,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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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 엄비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이 아니었을까? "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서울 도심 중학동 골목 수문동 바그다드카페에서')의 한 대목이다. 저자는 동십자각 부근 한 카페에 앉아 역사기행을 하고 있다. 조선의 왕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세계 만방에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언이었는가, 불과 한두 해 전에 겪은 일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그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종로통 시전으로 식료품을 사러 가는 나인들의 가마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지금 경복궁 정동(正東) 문(門)인 건춘문을 통과해야 했다. 한 나라 왕이 자신이 주인인 궁궐을 눈속임까지 하며 탈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조선 후기 경복궁 건춘문 밖에서 신식군대(별기군)가 훈련하고 있다. 문 앞 삼청동천 위로 종친부로 건너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개천이 있었는지조차 잊혔지만 고종은 마차에 올라 이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을 탈출하였다(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의 왕비(민자영, 1851~1895)는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하게 시해되었다.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저지른 만행이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일제가 가세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지아비로서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할 틈도 없었다. 고종은 고정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종 자신이 신변의 위험을 느꼈고, 그해 11월 궁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실패하고(춘생문 사건), 기회를 엿보던 차에 이듬해 이른 봄 재차 탈출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배경을 고려하여 인용문을 천천히 읽으면, 그것이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한 각본에 따라 엄비가 가마행렬을 이끌고 같은 시각 궁과 시전을 오가기를 되풀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엄비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비로 책봉된다. 왕비는  승하한 상태이고, 그렇기에 더욱 그 역할이 커진 귀하신 몸이 손수 시장을 보러다녔다는 것을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거사를 준비하는 사전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규모의 전쟁의 원인을 그것을 주도한 세력들의 입장에서 살피곤 한다. 때문에 거대한 양대 세력들 사이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투퀴디데스의 함정'을 소개하는 『예정된 전쟁』에서 조선은 청의 속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정도로 잠시 기술될 뿐이다. 또한 외침보다 더 무서운 전쟁은 한 나라 내부의 세력간 펼쳐지는 권력쟁취를 위한 전쟁이다. 기원전 431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발견한 한 에피소드와 비교해보려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은 왜 일어났는가?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했다.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에게 해의 해양제국을 건설했다. 둘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세력으로,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 군의 잔류 병력(육군)을 퇴각시키기까지 세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년가량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들 두 나라만 치른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제국 가까이 해안가에 위치한 크고 작은 그리스 국가들부터 본토의 군소 국가들이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이 두려워 보다 안전한 방어책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육상 세력 스파르테보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던, 아테나이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델로스(해상)동맹을 이끌면서 특히, 크고 작은 해상국가들의 보호국 역할을 하게 된다. 공짜는 없다. 아테나이의 해군력에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함선이나 병력을 그 댓가로 지불했고, 나중에는 군자금(현금) 형식으로 동맹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해마다 지불했다. 이를 기반으로 아테나이의 해군력은 급속히 신장되었고 동맹국들의 안보(지킴이)만이 아니라 에게 해의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 동맹이지만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해 함선(해군력)들이 필요했던 것, 이것이 황금기의 아테나이('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부른다)를 일군 배경이다.

이처럼 페르시아제국과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기원전 478년)을 발판으로 아테나이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이처럼 200여 개의 도시국가 중 절반이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주요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번영과 과도한 팽창정책을 견제할 목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주도로 결성)의 결속을 강화하게 된다. 이 동맹은 기원전 500년을 기준으로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이었다. 어쨌든 그리스의 양대 진영이 맞붙은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전쟁사'에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사 1권 23장(6)

'공포감'을 '두려움'으로 옮기기도 하고 '질투'(아테네의 번성과 스파르타의 질투가 부른 비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최근 들어 뜨거운 이슈로 등장한 '투퀴디데스의 함정'(혹은 '덫')이란 용어의 출처다. 불과 한 세대만에 경제력에서 군사력에서 주변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에서 중국의 급부상은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세계1위 국가의 지위와 특권을 누리던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두 세력의 긴장과 갈등을 사전에 해소하지 않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세계 3차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제 전 인류의 노심초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들 두 세력이 맞붙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예상되는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강대국들의 세력 대결에서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전장(戰場)이 되었다. 그때그때 그들의 세력 개결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고 안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27년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촉발한 '불꽃' 역할을 했던 사건(쟁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양대 세력의 틈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눈에 보이는' 전쟁의 원인에 좌우되기에 하는 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한국인의 관점은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에 직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코린토스만과 사로니코스만 사이 코린토스지협을 중심으로, 오른편의 메가라, 아테나이 등과 왼편 아래 스파르테의 위치 등을 살펴보면, 메가라가 거대 세력 사이에 낀 국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펼쳐진 그리스와 에게 해 일대의 지도를 살핀다. 육상세력으로 육군이 우위인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가 위치한 아티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야 한다. 해군력이 우위인 아테나이로서는 여차 하면 수많은 함선들을 국토로 삼을 작정으로 스파르테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테나이가 대책없이 스파르테의 육군을 견제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영화 <300>1에서 보았던 유명한 전투, 300인 스파르테 전사들이 페르시아 대군들을 막아낸 고개 테르모뮐라이를 기억할 것이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스파르테의 육군을 1차로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지형이 바로, 코린토스지협이다. 보유한 함선도 변변치 않거니와 육로로 침공해야 하는 스파르테는 코린토스 지협을 거쳐야만 아티케를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인 코린토스가 영토이며, 코린토스지협과 아테네 사이에 있는 도시국가가 메가라인데, 이 나라 또한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이다. 부상하는 아테네에 기존 주도세력인 스파르테가 느낀 '두려움' 때문에 이 전쟁이 발생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테나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설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 한다, 아테나이의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준비한다. 그것이 이 전쟁의 도화선 중 하나인 페리클레스가 공표한 '메가라 법령'이다. 또 하나 두 세력 사이에서 전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라가 코린토스(식민시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코린토스-케르퀴라 전쟁)다.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바다를 낀 국가들이라 해상무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아테네의 해상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살피면,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메가라시와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 항 사이에 그 유명한 살라미스 섬이 있다. 영화 <300>2의 배경이다. 코린토스지협을 경계로 서쪽 바다는 코린토스 만(灣)이고, 동쪽은 사로니코스 만이다. 사로니코스 만을 사이에 두고 아테나이 건너편이 아르고스인데, 이 나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세력이다.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사이의 바다 사로니코스 만이야말로, 에게 해 일대의 해상(해안) 국가들과 아테나이의 무역에서 가장 활성화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432년(이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는)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메가라인들이 아테나이의 사원에서 불경한 언행을 저지르고, 아테네에서 도망친 노예를 숨겨준 데 대한 벌로 메가라에 가한 일종의 경제제재다. 메가라 속한 동맹과는 별도로  메가라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해상무역권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2018년의 기사 하나를 살핀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는 실패했다. 왜 2421년 전 아테네가 메가라에 부여한 무역금수 조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사소한 조치'라고 여겼지만, 메가라는 '적대의 의도'로 읽었다. 압력은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생산했다. 위협이 공포를 부르자, 제재가 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 외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제재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재라는 수단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김연철 칼럼(통일연구원 원장, 한겨레, 2018-09-0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0301.html#csidxda67d0013b76af5ac4652ac09950c7f

 

투퀴디데스는 27년 전쟁의 불꽃 역할을 한 '눈에 보이는' 두 세력의 갈등을 세 가지로 보고 있다. 1)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소극적이지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를 지원한 점), 2)메가라 법령 공포, 그리고 3)'학살'로 표현되는 아테나이의 멜로스섬 침공이다. 이것들은 두 세력이 30년 평화조약을 깬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불안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데, 특히, 메가라에 대한 경제 제재는 스파르테의 역린을 건드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실제 전쟁 발발을 대비한 아테나이의 포석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라는 점에 유의하자.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하는 것도 식량을 비롯한 생활재 유통을 막는 경제 제재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권을 제약하는 현재에도 유용한 그런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사로 먹고사는 메가라 사람에게 아테네와 인근 항구 출입을 못 하게 했으니 '벌'의 효과는 전쟁만큼이나 쏠쏠하다. 메가라의 동맹국인 스파르타는 아테나이에 법령 철회 요구하지만 아테나이가 거부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파르테의 정치 체제는 정확히 과두정과 왕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가령, 페리클레스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정치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회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자의적으로 내릴 수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쟁과 같은 중대사의 결정에서 스파르테의 왕도 중지를 모아야 하는 설득전을 펼쳐야만 했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는, '전쟁사'에서 전쟁을 결정하기까지 두 세력 내부에서의 갑론을박을 소개한 것에 근거해, 두 지도자(페리클레스와 스파르테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친분이 두처운 관계였다)의 혜안에 따른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진단한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중대사는 양국 정부 내 각 분파들의 대립과 협상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는 얘기다. 페리클레스의 경우 민회의 실력자였지만 정치인 중 한 명이었고, 설득(정치연설) 여부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당시 아테네의 법률시스템은 독재를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살아 있었다. 스파르테의 경우,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동맹국들(각 1표를 가진), 특히 코린토스·메가라 등이 동맹회의에서 결사적으로 개전(開戰)하기를 압박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메가라만이 아니라, 두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그들이 속한 동맹의 맹주국이 전세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정체(스파르테의 과두정과 아테나이의 민주정)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린다. 스파르테는 자신들의 강점(육군력)을 이용해 수시로 아티카에 침공하여 아테나이를 압박하고, 아테나이의 경우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특히, 코린토스지협의 스파르테 동맹국을 침공하여 괴롭힌다. 특히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지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메가라를 수시로 침공한다. 함선을 동원해서 가볍게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아테나이로서는 힘든 전투가 아닌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를 살필 차례다. 전쟁 7년차 아테나이는 스파르테 인근의 퓔로스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를 회복하려는 스파르테와 싸워 승리한다. 스파르테인들은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다고, 스파르테 군사들은 끝내 항복하고 아테나이로 끌려가서 구금된다. 전쟁 8년차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함으로써, 중요한 현안을 해결한다. 바로 이즈음, 메가라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주도권을 잡자, 메가라 내부의 친아테나이파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테나이 군을 불러들이는 것. 잠시 전쟁 8년차 여름의 '전쟁사'를 인용한다.

"같은 해 여름 메가라 시내의 메가라인들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았으니, 전쟁에서는 전군을 동원해 매년 두 번씩 영토를 침범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내전 중에 민중파에게 쫓겨난 뒤 페가이를 거점 삼아 약탈 행위를 일삼는 자신들의 망명파에게도 시달렸다. 그래서 메가라인들은 망명파를 다시 받아들이고 협공으로 도시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을 자기들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6(1)

급기야 민중파 지도자들은 1)민중들의 지지기반이 굳건하지 않고 2) 망명파의 위협이라는 '상수'를 해결할 수 없다, 고 판단,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아테나이 장군들과 접촉하여 아테나이군이 그들의 성을 제압하도록 협조한다. 메가라인들은 민주정(민중파, 친아테나이)과 과두정(친 스파르테)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여기에 두 세력의 원군이 파견되어, 두 세력은 그들의 교두보를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쟁사'를 참조하시고) 이 내란 초기의 에피소드 하나를 인용한다.

 

"(3)날이 새려 했을 때, 이 메가라인 반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두기 위해 얼마 전부터 밤에 수비대장의 허가를 받고 약탈하러 간다는 핑계로 조정 경기용 보트 한 척을 사륜거에 싣고 해자를 건너 바닷가로 나가 출항했다가, 날이 새기 전에 보트를 사륜거에 싣고 성문을 지나 성벽 안으로 들여오곤 했는데, 새벽에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을 테니 미노아 섬을 봉쇄한 아테나이인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라고 했다. (4)그래서 이번에도 사륜거는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고, 성문은 여느 때처럼 보트가 들어가도록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아테나이인들이 각본대로 매복처에서 뛰쳐나와 문이 도로 닫히기 전 사륜거가 문틈에 끼여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방해하는 사이 문에 도달하려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동시에 메가라인 반역자들이 문간에서 보초들을 죽이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7(3~4)

 

'메가라인 반역자'란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려는 민중파 일부(친아테나이파)를 말한다. 정황상 민중파가 득세한 상황이라도 나라를 넘길 정도(민중파 대부분이 친아테나이파는 아니라는)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메가라인들로서는 당파를 떠나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투는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나고 메가라의 과두정은 오래 지속된다. 이제 타임머신에 올라, 1896년 2월 11일 우리나라, 일명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그날로 가보자.

 

아관파천은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왼편에서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옛 러시아공사관에 이른다. 이곳까지 당시 조선의 왕이 궁궐(경복궁)을 장악한 칭일파의 위협에서 피란한 사건이다. 고종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을 통해 궁을 벗어났다. 그곳이 어디든  왕이 머무는 곳(행재소)이 수도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러시아공사관은 요즘의 청와대 대톨령 집무실이 된 셈이다.『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김란기 지음, 발언미디어, 2017년 12월)에서 필자는 고종을 태운 가마의 이동경로를 추적한다. 고종은 왜 떠나야만 했으며(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의 살해, 일명 '을미사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얘기를 읽는 동안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아관파천 두 달 전에도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일명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친미파-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 서울 사진으로 추정. 1926년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궁궐 벽을 끼고 서 있는 건물이 건춘문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쯤이 종로통일 것이다.

 

춘생문은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는 문(門)이다. 건춘문은 경복궁의 정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지금 동십자각에서 북쪽으로, 북촌한옥마을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있는 경복궁의 동쪽 정문이다. 그런데, 이 건춘문은 궁궐의 나인들이 군주의 식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을 보러 오가던(최단거리), 곧 종로 시전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아관파천 때에 고종이 건춘문을 통과했다는 기록은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고종이 건춘문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아관파천 때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종과 세자를 태운 가마는 건춘문을 나온 후 어떤 경로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했을까?" -앞의 책

그런데,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은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로 보인다. 필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D-day를 정한 이후에 엄비가 몸소 종로의 시전으로 쇼핑을 핑계로 오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데, 필자는 거기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가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앞의 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엄비가 손수 장을 보러 종로의 시전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했고, 고종을 모신 가마가 그런 일상적인 행차로 가장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친일파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메가라시의 관문과 경복궁의 건춘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 벌인 두 사건을 비교하자니, 마음이 씁쓸하다. 이 간단한 비교를 하려고 얘기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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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지도를 봤어요.˝라는 영화 <접속>의 명대사를 조금 바꾸어, 제목을 정했다. 지도의 지도 없이 ‘전쟁사‘ 읽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