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좌-신Gods, 영웅Heroes, 신화Myth의 머리글자를 따서 GHM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콜먼의 태도가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설득력이 컸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스테인』(1,2권)의 주인공 실크 콜먼는 고전학자이다. 콜먼은 매사추세스 서부 버크셔에 있는 가상의 대학인 아테나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강의실로 복귀한 콜먼은 출석을 부르다 수업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학생들(나중에 흑인으로 밝혀진다)을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spooks로 지칭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 문제를 해명하고자 맞서다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자 않고 사직해버린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내 아이리스까지 급사한다.

 

이런 거짓된 비난의 전말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겠다며 주커먼을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커먼은 이 소설의 사회자 격인 일인칭 화자다. 주커먼은 이 작품 말고도 그의 『미국의 목가』(1997)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도 화자로 등장하는데, 때문에 이 세 작품은 일종의 삼부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네이선 주커먼은 필립 로스의 분신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또 하나, 그는 ‘결연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인 요소를 섞어 넣기를 즐긴 작가이다. 이 점에서 그의 프로필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시카고대학과의 인연이다. 그는 이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잠시 이 대학의 강사 생활을 했다. 시카고대학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고전 읽기를 교양교육의 기본으로 시스템에 편입시킨 특별한 대학이다. 시카고대학을 변화시킨 ‘위대한 고전 읽기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뤄볼 예정인데, 어쨌든 1929년 시카고대학의 5대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당시 30세)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 85년 동안 8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2014년 기준) 대학교의 초석을 놓은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소설  『휴먼스테인』에 설립한 가상의 아테나대학은 그의 프로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콜먼이라는 인물, 그리고 고전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수업 장면을 녹취하듯 펼쳐놓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살피는 데서 찾아보자.

 

“여러분은 유럽 문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콜먼은 강의 첫 시간에 출석을 부르고 나서 이렇게 묻곤 했다. “바로 불화에서입니다. 유럽 문학 전체가 싸움에서 기원했죠.” 그리고는 준비해온 『일리아스』를 집어들고 처음 몇 줄을 읽어나갔다. “‘시의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저주를 부르는 분노를 노래하라……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위대한 용사 아킬레우스가 맨 처음 불화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난폭하고도 힘센 두 인물은 무엇을 놓고 불화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술집에서 사내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 여자를 놓고 다투는 것이니까요. 처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그녀의 아버지한테서 강탈해온 처녀, 전쟁 와중에 유괴된 처녀지요. ‘마아 코우리Mia kouri'. 이게 이 서사시에서 그 처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미아‘라는 낱말은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가튼 의미를 지니는데 영어의 부정관사 ’a‘에 해당합니다. ’코우리‘ 곧 ’처녀‘라는 낱말은 서서히 변화해 현대 그리스어에서 딸이라는 뜻인 ’코리kori'가 되었습니다. 자, 아가멤논은 이 처녀를 본처 클리타임네스트라보다 더 좋아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 처녀를 따라올 수 없다.’ 아가멤논이 말합니다. ‘이목구비나 몸매 어느 쪽을 봐도.’ 이만하면 왜 아가멤논이 이 처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나요? 이 처녀의 유괴를 둘러싼 정황에 분노해 흉포해진 아폴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만 아가멤논은 거부합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밖에요. 쉽게 격분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는 어느 작가라고 기꺼이 그려보고 싶어 할 법한, 그야말로 폭약 같이 쉽게 격발되는 거친 인물입니다. 특히 자신의 위신이나 욕구와 관련된 경우, 전쟁사에서 가장 과민한 살인기계로 변하는 인물이죠. 모두에게 칭송받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에 가해진 모욕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됩니다.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모욕, 처녀를 빼앗긴 모욕에 대한 분노의 위력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한때는 그가 영광스러운 보호자였고,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집단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다툼은 그러니까 젊은 처녀, 그리고 처녀의 싱싱한 몸과 성적 강탈에서 얻을 쾌락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좋든 나쁘든 정력가인 용사 군주가 수컷으로서의 권리와 위엄을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것에서 위대한 상상력이 넘쳐흐르는 유럽 문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불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는 것이며……”(이 책 1권 16~17면)

 

 

우리의 단군신화의 주제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임을 떠올리면 참 다르지요. 그들이 그들의 문학의 기원을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가보다 하면 될 것을, 긴 인용까지 해가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크 콜먼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강의 스타일을 엿보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우리말 원전번역  『일리아스』(천병희)을 읽으면, 콜먼이 언급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배경은 좀 차이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라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조건부가 아니었다. 아가멤논의 속마음이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브뤼세이스를 취하였다.’이지 조건부는 아닌 것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의)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인용은 실크 콜먼의 강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한 ‘녹취록’ 수준의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크 콜먼이 직면한, 출석을 부르다가 우연히 던진 한마디가 그의 ‘아름다운 노년’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곧 명예의 실추와 그에 따른 분노는, 그 스스로가 아킬레우스적임을 이 작품은 초반에서 일종의 배경으로 까는 것이다. 그가 평온을 되찾는 한 여자와의 만남(71세인 그가 만난 34살의 여인, 포니아 팔리), 그 만남은 한 여자가 중간에 낀 ‘삼각 관계’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일리아스』를 어떻게 해석하건, 『일리아스』는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그리고 필립 로스의 자전전인 기록과 무관하지 않게, 이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급반전’까지는 아니라도, 실크 콜먼의 인생이 간직한 아이러니는 작품 후반에 드러나는데, 그리스 비극으로 치면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면모를 또한 그는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한 고전 몇 편을 읽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써본 글이다. 사실 『일리아스』의 표면 주제인 트로이아 전쟁 원인 중 주요한 하나는, 헬레네를 되찾아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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